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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건106

사건- 61.05 : 5ㆍ16 군사쿠데타 (정변) → 박정희ㆍ김종필 등장 "5ㆍ16 군사쿠데타 (정변)"는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 "서울ㆍ부산ㆍ대전ㆍ광주ㆍ경기도ㆍ강원도ㆍ김포ㆍ부평ㆍ수색ㆍ포천" 등에서"쿠데타"를 목적으로 일어난, 유혈 군사반란이다. 1. 5ㆍ16 군사 쿠데타 (정변) "소장 박정희(제2군사령부 부사령관ㆍ제6관구 사령관 (서울 관할ㆍ영등포ㆍ혁명 지휘본부)ㆍ육사 8기(중령 김종필)ㆍ9기(소령 이낙선)"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ㆍ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ㆍ해병대ㆍ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한 군사정변 "소장 박정희"는 미국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군의 참모총장" 몰래, 장성ㆍ핵심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모의를 통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제2공화.. 2022. 11. 12.
사건- 60.04 : 4ㆍ19혁명 / 3ㆍ15 부정선거 → 이승만 4선 당선 "4ㆍ19혁명(革命ㆍ4월 혁명)"은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ㆍ반정부(反政府) 항쟁으로,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 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 혁명ㆍ4ㆍ19혁명ㆍ4ㆍ19학생혁명ㆍ4ㆍ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렸으나, "5ㆍ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1. 4ㆍ19혁명 (4ㆍ19革命ㆍ4월 혁명) • 일 시 : 1960.04.19일 • 참여인원 : 10만 명 이상 • 사 상 자 : 사망 186명 (.. 2022. 11. 11.
사건- 60.02 : 대구 2ㆍ28 학생시위 → 4ㆍ19혁명의 도화선 "2ㆍ28학생시위"는 건국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자생적 시위"였고, "4ㆍ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었다는 점에서, 근세사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이다. "2ㆍ28시위"는 당시 "고교 2학년"인 어린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1. 2ㆍ28 민주운동 (2ㆍ28 학생시위→ 3ㆍ15 마산시민 항쟁→ 4ㆍ19민주혁명) • 일 시 : 1960.02.28일 (일요일) 오후 1시~ 3시 • 참여인원 : 대구 경북고 학생 (800여 명) "한국 근ㆍ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은 "3ㆍ1운동(1919)ㆍ6ㆍ10만세운동(1926)ㆍ광주학생운동(1929)" 등의 한국 독립운동에서 광복 후, "6ㆍ25(1950)"를 거치면서 1960년대부터는 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되.. 2022. 11. 11.
사건- 58.12 : 보안법 파동ㆍ2ㆍ4 정치파동 "2ㆍ4 정치파동ㆍ보안법 파동"은 "자유당"이 "대공 사찰 강화ㆍ언론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ㆍ지방자치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사건으로, 1958.12.24일, 경찰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의원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채, "자유당" 의원들만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ㆍ지방자치 단체장을 임명제로 하는 지방자치치법 중 개정안" 등, 27개 법안을 전격 통과시켰다. 1. 2ㆍ4 정치파동ㆍ보안법 파동(保安法 波動) • 일 시 : 1958.12.24일 • 목 적 : 대공 사찰 강화ㆍ언론 통제 → 공안 정국 조성 "제4대 총선"의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과 야당의 불만이 팽배했던 시기, 위기감을 느낀 "자유당"이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이른바 "공안 정국"을 .. 2022. 11. 11.
사건- 54.11 : 호헌동지회 (호동회) ← 4사5입 개헌 "호헌동지회 (護憲同志會)"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노리고, 위헌적으로 강행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반대하기 위해 결집되어, 1954.11.30일 출범한 "범 야당연합모임"을 말한다. 당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 의원은 물론, "자유당 탈당파ㆍ무소속동지회ㆍ순수 무소속"의원 등 60여명이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대여 투쟁을 벌이기 위해,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1. 호헌동지회 (호동ㆍ호동회) 호헌동지회(1954.11)→ 신당조직촉진위원회 구성(1955년 초)→ 민주당 출범(1955.09)ㆍ"민주당"이 출범함으로써, "호헌동지회"는 발전적으로 해체 • 일 시 : 1954.11.29일 • 목 적 : 사사오입개헌 반대ㆍ대여 공동투쟁 • 규 모 : .. 2022. 11. 11.
사건- 54.11 : 4사5입 개헌ㆍ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이승만 3선 당선 "사사오입 개헌 (四捨五入改憲)"이란, •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사사오입(반올림)"을 내세워, 당시 "정족수 미달"이었던 헌법안을 통과시킨 "헌법 개정(제2차)"에 붙은 별칭으로, "자유당"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품으로, "이승만의 대통령 3선ㆍ자유당 장기 집권"이 목적이었다. 1. 사사오입 개헌 (四捨五入改憲) : 4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은 올린다. 1954.08.06일, "초대 대통령에 한정한 연임제한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11.27일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재적 의원 203명 중, 찬성(135)ㆍ반대(60)ㆍ기권(7)표로 부결되었다. 개헌정족수인 재적 2/3에서 1표가 부족했던 것이고, "국회 부의장"이 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다급해진 "자유당.. 2022. 11. 11.
사건- 52.06 : 중석불 ($) 사건ㆍ중석불 불하사건 "중석불($) 사건 (重石弗事件ㆍ중석불 불하사건ㆍ중석불 파동)"은 1952.06월, 정부가 "중석(텅스텐) 불"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 기업에 불하하여, 밀가루ㆍ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무역업자들이 5배 장사를 하여, 500억 원의 부당폭리를 취했다. 1. 중석불($) 사건 (重石弗事件ㆍ중석불 불하사건ㆍ중석불 파동) "대한중석"에서 생산되는 "중석"을 수출하여 얻어지는 달러가 특정 무역업자에게 흘러간 사실이 밝혀져,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정부와 야당 간에 정치적 쟁점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도 휴전과 함께 흐지부지되어, 관련 무역업체는 사건 발생 5년 뒤인 1957.04월 대구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 2022. 11. 11.
사건- 52.05 : 부산정치파동ㆍ발췌개헌안 통과 → 이승만 2선 당선 "부산 정치파동"은 1952.05.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이승만 정권"의 폭력행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며, "발췌개헌안"은 "장택상(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新羅會)"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마련했다. 1. 부산 정치 파동 (1952.05.26일) 1952.05.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이승만 정권"의 폭력행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 "이승만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 2022. 11. 11.
사건- 50.12 : 흥남(부두) 철수 → 1ㆍ4 후퇴의 시작 "흥남(부두) 철수"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ㆍ국군 제1군단"이 "흥남부두 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이다."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UN군ㆍ국군"은 1950.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 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UN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1. 흥남 (부두) 철수 "흥남 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ㆍ해ㆍ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전의 성공으로 "UN군ㆍ국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일 시 : 1950.12.15 (출항 기준)~ 12.24 (10일간) • 결 과 .. 2022. 11. 10.
사건- 50.12 : 장진호 (長津湖) 전투 → 1ㆍ4 후퇴의 시작 "장진호 전투"는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후퇴작전이 "1ㆍ4후퇴"의 시작이었다. 1950.11.26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예하, "미1 해병사단"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2주간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1. 장진호 (長津湖) 전투 이 전투에서, "미1 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ㆍ4후퇴"의 시작이었다... 2022. 11. 10.
사건- 50.09 : 인천 상륙작전 (50.09.15)ㆍ장사 상륙작전 (50.09.14) "인천상륙작전"은 UN군 사령관 "맥아더 (MacArthur Douglasㆍ1880~1964ㆍ84세)"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이다. "서울 탈환"으로 이어져, "한국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1950.06.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07월 첫 주에 "참모장 알몬드(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1. 인천 상륙 작전 (Battle of Incheon) ㆍ작전명 :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 피 해 : 22.. 2022. 11. 10.
사건- 50.06 :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50.06.28) "한강교(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1950.06.28일, 새벽 2:40분경,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최창식 대령(국군 공병감)"에 의해, "한강 인도교ㆍ경인철교ㆍ경부 복선철교" 중, "경인철교(상행선)ㆍ경부 복선철교(하행선)"을 제외한, 3개의 다리가 폭약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2개 다리에 설치한 폭약이 폭발하지 않은 것) 1. 한강교(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 기 본 : "한강 인도교"는 별칭으로, "열차가 아닌 사람이 건너는 다리"라는 말이다. "한강교"(→ 제1한강교→ 한강대교)는 1916년~ 1917.10월 완공되었다. 당시 한강에는 다리가 3개(서쪽으로부터 한강철교ㆍ한강교ㆍ광진교)가 있었다. 차량 수 : 1911(2대)ㆍ1915(70대)ㆍ1917년(114대) • 일 시 : ..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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