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ㆍ28학생시위"는 건국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자생적 시위"였고, "4ㆍ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었다는 점에서, 근세사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이다. "2ㆍ28시위"는 당시 "고교 2학년"인 어린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1. 2ㆍ28 민주운동 (2ㆍ28 학생시위→ 3ㆍ15 마산시민 항쟁→ 4ㆍ19민주혁명)
• 일 시 : 1960.02.28일 (일요일) 오후 1시~ 3시 • 참여인원 : 대구 경북고 학생 (800여 명)
"한국 근ㆍ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은 "3ㆍ1운동(1919)ㆍ6ㆍ10만세운동(1926)ㆍ광주학생운동(1929)" 등의 한국 독립운동에서 광복 후, "6ㆍ25(1950)"를 거치면서 1960년대부터는 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2ㆍ28시위"는 1960년부터 30여 년간 계속되는 "독재정치ㆍ부정부패"에 대응한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으로 본다는 것이다.
"대구 경북고" 학생들의 "2ㆍ28시위"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첫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권력이 요구하는 관제시위를 벌였다. 1950년대에 학생들의 비판적인 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6.05.05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돌연히 사망해, 운구가 서울역에서 "효자동" 자택으로 옮겨질 때 격렬한 시위가 발생해 700여 명이 연행됐는데, 이 시위에 대학생들이 다수 가담했다.
1957.04월, "이기붕의 장자"로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강석"이 입학시험 없이 등록하자, "서울대 법대생"들이 며칠간 동맹휴학을 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에 묶여 있었고,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959년 가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들로 구성된 "전국대학생 구국총연맹"이 "자유당 후보 선거운동"에 나서는 실정이었다. 이처럼 "대구지역"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직접적으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일요일인 02.28일 "대구"에서 유세를 벌이자, 당국이 "학생ㆍ공무원ㆍ노동자ㆍ시민들"이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게 엉뚱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내내, "북진멸공ㆍ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되었고, 고위 관료가 행차를 해도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 시위는 "자유당 독재정권 타도"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또 자신들의 행동이 "학생혁명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계산속에서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2ㆍ28시위"가 단순히 "일요 등교"에 따른 단순한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뚜렷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시대의식의 반영"으로 일어났으며, 현대 학생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민주주의 실천운동"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2ㆍ28시위"의 전개과정에서 "학생대표"들은, 시위를 위해 하루전날부터 구호를 다듬고, 계획을 세웠으며, 당시에 외쳤던 구호가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비판적 목적의식"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임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 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시위나 "4ㆍ19혁명"은 "2ㆍ28시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1960.02.28일(일요일), 그날 "수성천"변에서는 "장면 박사(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연설회가 계획되었다.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는 이성을 잃고, 고교생인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했는데, 학교에서는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친다고 했고, "단체영화 관람"이나 "토끼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다.
"경북고"의 경우, 02.25일에 03.03일 치르게 되어 있는 "학기말 시험"(당시에는 3월이 아니라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을 일요일인 02.28일 치르겠다고 했다. 28일 "대구고교"는 "토끼사냥"을,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경북대 사대부고"는 "임시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간계를 간파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고, 그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ㆍ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ㆍ대구시청ㆍ자유당 경북도당사ㆍ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 추궁을 받았다.
2. 상세 일지
① 1960.02.28일 (일요일) 오후 1시경
"대구 경북고 이대우(학생위원회 부위원장)"가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은 뒤, 800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ㆍ학원의 자유를 달라ㆍ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ㆍ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오후 01:30분경, "경북고" 학생들은 "도청"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연행되면서, 3시경까지 데모를 했으며, 120여 명이 연행되었다. "대구고교"는 2시부터 30분 동안 시위를 벌였다. "경북대 사대부고"는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었다. "경북여고"는 교문을 걸어 잠갔으나, 일부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30여 년 동안 "불의ㆍ부정ㆍ독재ㆍ민족ㆍ민중생존" 문제에 대해, 시위 등을 통해 발언을 했다. "극우 반공체제"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이 활동할 수 없게 되자, 학생들이 앞으로 30여 년 동안 그 역할을 대신 떠맡는 세계 역사상 희귀한 사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② 1960.02.29일(월요일) 이후
02.29일에도 "경북여고ㆍ대구여고ㆍ대구상고"의 일부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03.02일, "이강학(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괴"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시위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일어났다.
03.05일, "장면 부통령 후보"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유세를 한 뒤, 퍼레이드를 벌일 때 학생 1,000여 명이 비를 맞으며 그 뒤를 따랐다. 학생들은 "인사동" 부근에서 경찰이 저지하자, "부정선거 배격하자ㆍ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격렬한 시위는 03.08일 "대전고"에서도 일어났다. 학생들은 그동안 "서울신문"을 강제 구독시키고, 수업시간에 "이승만 연설"을 틀어주고, "이기붕"에 관한 뉴스영화를 보여주는 데 불만이 많았는데, 03.08일의 "민주당 강연회에 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거사를 계획했다. 학생 1,000여 명은 03.08일, 스크럼을 짜고, "장면 후보 강연회"가 열리는 "대전 공설운동장"으로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줄달음치다가 "무장 경관"이 곤봉 등으로 난타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 시위로 학생 간부들과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03.10일에는 "대전 상고생ㆍ수원 농고생ㆍ충주 고교생"이 데모를 했다. 이날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서 "3인조ㆍ5인조 공개투표 모의훈련" 끝에, "민주당 비밀당원"이 "반공청년단장"에게 살해되었다. 03.12일, "부산 해동고교생"들이 "학도 호국단가"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고, "청주고교생"도 시위에 나섰다. 3월 13일에는 서울시청 앞, 명동 입구 등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학생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이 시위할 때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과 국정연구회에서는 가두선전차를 타고 “학생들은 자중하라”라고 소리 질렀다.
③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 전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고교생 시위"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03.14일자, 한 석간신문은 "폭력에 떠는 3ㆍ15 분위기"라는 기사를 통해, 도처에서 칼ㆍ주먹이 난무했고, 그 와중에 "김포"에서 "민주당 참관인"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03.14일, "포항고교생ㆍ인천 송도고교생ㆍ원주농고생"이 데모를 하는 등 시위가 많았다. 부산에서는 "동래고교ㆍ부산상고ㆍ항도고교ㆍ북부산고교ㆍ혜화여고ㆍ데레사여고" 등이 시위하면서, "우리 선배는 썩었다ㆍ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학생"들을 불신하면서, "고교생"들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무장 헌병"들이 "교통순경"을 대체해, 교통정리를 했던 서울에서도 03.14일 밤, 늦게 시위가 일어났다. 9시 경, "화신백화점" 일대에서 "대동상고ㆍ균명고ㆍ중동고ㆍ강문고ㆍ보인고생" 약 200명이 쏟아져 나와, 노트 쪽지에 펜으로 "살인선거 물러가라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쓴 삐라를 뿌리면서, 데모를 감행했다.
④ 운명의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일
투표는 "최인규(내무부장관ㆍ1919~1961ㆍ42세)"가 기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곳곳에서 "대리투표"가 공공연히 저질러졌다. 일부 지방에서 "사전투표"가 발각되었고, "3인조 투표"도 각지에서 행해졌다. 곳곳에서 "자유당 완장부대"가 "경찰ㆍ청년단원" 등과 함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당 참관인"은 도처에서 내쫓겼고, "민주당"은 "전남ㆍ경남"에서 일찌감치 선거를 포기했다.
"민주당 중앙당"은 투표가 끝나기 전인 오후 4:30분에 "3ㆍ15선거"는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행위"라고 규정하고,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가 전적으로 "불법ㆍ무효임"을 선언했으며, "민주당"은 "참관인"도 철수시켰다.
"한희석(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겸 기획위원장)" 등 "자유당 간부"들은 개표 상황을 지켜보다가,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ㆍ장면 32표"라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 도시였다. "한희석"은 "최인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무위원들도 일부 지역의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최인규ㆍ이강학(치안국장)" 등은 한밤중에 "경비전화"로, "이승만은 80%ㆍ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각지에서는 부랴부랴 "감표"에 들어갔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내무부 지방국장)"이 50% 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었다.
그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수의 88.7%에 해당하는 963만 3,376표를 얻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부통령의 경우, "이기붕"이 유효투표수의 79%에 해당하는 833만 7,059표, "장면"이 184만 3,758표로 발표되었다. 이런 득표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는 "이승만ㆍ이기붕"은 말할 나위도 없고, 3살 먹은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3ㆍ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진주"에서 "민주당원" 10여 명이 "무언의 시위"를 했다. "광주"에서는 50여 명의 당원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라고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마산"에서 시민들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3ㆍ15"와 같은 부정선거에도 방관하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⑤ "마산" 사태
03.15일 오전 7시, 투표시간이 시작되면서, 야당성이 강한 "마산"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민주당 참관인"들이 "투표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47개 투표소 중, "민주당 참관인"이 들어간 곳은 3개소뿐이었다. 그러던 중, "시청 옆" 한 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이 사전투표를 한 "투표함"을 발견했다.
시민들은 투표할 "번호표"를 받지 못했다고 "민주당 당사" 앞에 몰려들어, "번호표"를 찾아달라고 아우성쳤다. "투표소" 시설 또한, 장막 뒤에서 감시하는 "내통식"이어서 "비밀투표"를 할 수 없었다. "3인조 투표"는 물론이고, "투표지"를 뒤집어 "선관위원"에게 보일 것을 강요당했다. 오전 10:30분, "민주당 마산시 당"은" 중앙당ㆍ경남도당"과 상의 없이,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ㆍ선거위원ㆍ운동원"을 모두 철수시켰다. 오후 1:30분, "민주당 경남도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오후 3:40분경, "마산시 민주당원"들은 데모에 나섰다. "정남규(도의원)" 등이 앞장서고, 30여 명이 뒤따랐다. 그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정남규" 등이 연행되었지만, 시위대는 계속 늘어났고, "데모대"는 일단 오후 6시에 해산했다.
오후 7:30분경, 약 10,000명의 "시민ㆍ학생"이 "마산시청" 일대에 모였다. 그때 "소방차" 1대가 "시위대"를 향해 오다가, 돌팔매를 맞아 운전수는 뛰어내리고, 차는 전신주 2 개를 들이받아 정전이 되었다. "정전"과 거의 동시에 "최루탄"이 발사되고, 뒤이어 총성이 울리면서, 중학생이 쓰러졌다. 일부 시민들이 "북 마산" 쪽으로 방향을 돌려, "파출소"를 에워쌌을 때, 또 총소리가 울렸다. 밤 9:30분, 날아온 돌에 "석유 램프"가 쓰러져, "북마산 파출소"에 불이 붙었고, 곧 전소되었다.
그 무렵부터, 흥분한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떼를 지어, 곳곳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민주당"으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가, "자유당"으로 간 "허윤수"의 집이 파괴되었고, "서울신문사ㆍ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ㆍ국민회" 등이 들어 있는 건물과 2개의 "파출소"가 파괴되었다. "시위대"는 밤 11:30분경 해산했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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