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60.04 : 4ㆍ19혁명 / 3ㆍ15 부정선거 → 이승만 4선 당선

by 당대 제일 2022. 11. 11.
반응형

 

"4ㆍ19혁명(革命ㆍ4월 혁명)"은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ㆍ반정부(反政府) 항쟁으로,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 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 혁명ㆍ4ㆍ19혁명ㆍ4ㆍ19학생혁명ㆍ4ㆍ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렸으나, "5ㆍ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1.  419혁명 (419革命4월 혁명)

일 시 : 1960.04.19일         참여인원 : 10만 명 이상      사 상 자 : 사망 186(대학생 22명ㆍ고교생 36명ㆍ노동자 61명ㆍ무직자 33명 / 부상- 1,500여 명 국민학생중학생 19, 화이트컬러 10, 기타 5)

1960.04, "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인규" 하수인이 되어 계획한 대대적인 부정선거의 지침이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되었다.

지시된 부정선거계획의 내용을 보면, "40% 사전투표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 공개투표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내통식 기표소의 설치투표함 바꿔치기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득표수 조작발표"등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되었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마산 315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04.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04.19, 경찰이 "경무대(대통령 관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이후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04.25일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전국 교수단"의 일격으로, 마침내 04.26,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이로써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정권은 12년 만에 막을 내렸다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06.15(615 개헌)으로 "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419

2. 1954.11 : 사사오입 개헌 (四捨五入改憲) 파동

1952.07,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 선포 하에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1954.11,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하였다"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과 자유당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었다당시, 국회는 재적의원 203명 중 202명이 출석하여 찬성 135, 반대 60, 기권7표로 개헌한 부결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개헌안 통과의 3분의 2선인 136명에서 1표가 모자랐기 때문에 부결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이틀 후에 자유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사사오입의 이론(135.33)을 내세우면서 가결을 선포하였다.

3. 315 부정선거 (不正選擧)

1960.03.15,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기붕"을 후보로 세웠다한편, 야당인 "민주당""조병옥장면"을 정부통령으로 내세웠다당시, 민심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크게 이반되어 있었다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계획을 세웠다.

당시 85세였던 "이승만"이 노령이었기 때문에 재임 중에 병사하면, 이를 승계할 부통령에 "기붕" 선시키기 위해 자유당 정권은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전국 경찰에 대한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시키고, 이어서 전국 시동 단위로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득표를 위한 활동을 지시하였다.

한편, 1960.01.29,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선거의 조기실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자유당 정권"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부통령 선거"를 앞당겨, 03.15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그런데, 02.15"조병옥"이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선거의 초점은 대통령 유고시에 승계권을 갖은 "부통령 선거"에 집중하게 되었다선거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 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기붕" 833만 표(73%)로 공고되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1960.03.15

"315 의거"1960.03.15일 오전 야당인 "주당 마산시당"이 선거 포기와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시작됐다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민들의 항의가 거세지면서 "협잡선거 물리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자, 경찰은 실탄 발포로 대응했다.

이 때문에 8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부상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으며, 수백 명이 체포돼 구금되기도 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항거하던 "김주열(당시 17세ㆍ마산상고 1학년) 열사"가 어디론가 실종됐다강경한 무력 진압으로 시위는 한동안 주춤하는 듯했다.

1960.04.11

27일 후인 04.11일 오전 11,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마산"에서 시위 중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바다위로 떠오르게 된다그것도 떠오르지 못하도록 돌멩이가 매달아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른쪽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 있었다"마산 도립병원"에 안치됐던 "김주열"의 시신은 경찰이 몰래 빼돌려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남원"에 안장시켰다.

"김주열"의 소식이 알려지자, 분개한 시민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하게 되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이승만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성이 드러나면서, 다시 "마산" 전역은 시위 물결로 뒤덮였다"재선거, 학살 경관 처단" 등의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경찰이 또 발포해 추가로 2명이 희생됐는데, 이러한 폭압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서울부산대구광주"등 전국에 걸쳐 시위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1960.04.18~19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마치고 자진 해산하여 귀가하던 중, "서울 종로" 일대에서 수십 명의 괴한으로부터 무차별 폭행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다음날 신문에 이 일이 알려지고, 그 괴한들은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폭력 깡패조직"으로 알려졌다정부에 큰 불만과 분노를 품고 있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민주화에 목마른 혈기왕성한 학생들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력진압에 분개한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시위에 가담하게 외었으며, 점점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 민심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고, 국민의 인내는 한계에 달해 04.19일 운집한 시위대가 경무대까지 진출해 "이승만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서울 등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80여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상이 빚어졌다.

3. 날짜별 상세 일지

04.19일 이전 상황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이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지도력도 크게 약화되었다"자유당"의 실력자인 "이기붕"의 건강은 더 나빴다그는 "운동신경실조증"이란 희귀병에 걸려 있었다이 때문에 "자유당 강경파""경무대(현 청와대) 비서"가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이승만""인의 장막"에 가려졌고, 장관들도 대통령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1959.08월 중순. "월터 다울링(Walter C.Dowling) 주한 미국대사""허터(Christian A.Herter) 미 국무장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영부인은 비서 박찬일과 협력하여 대통령을 불쾌하게 할 만한 정보를 되도록 차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혹 대통령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건에 대해 그녀가 이 대통령 이름으로 직접 정책결정을 내리기도 했다는 사실은 오랜 관행으로 되어 왔다 최근 이 대통령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그가 숙지하지 못한 외부의 통제 불가능한 정보들이 증가하면서 이 같은 관행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아마도 박찬일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보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59.12, "민주당""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1960년 실시될 "부통령 선거"에 대비했다구파인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신파인 "장면""부통령 후보"에다 "당 대표" 자리를 맡아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균형을 유지했다당시 한국사회는 "물가 상승조세부담 증가농촌 경제 파탄" 등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팽배했다대학을 나온 고등실업자가 늘어나고, 학생운동노동운동 등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어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한국경제는 미국 원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1957년부터 원조가 대폭 줄자 어렵던 국민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민생고가 극심해지자,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또한 "이승만 정권""미국 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958.12.24., "보안법"이 무술경관들이 야당의원을 연금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통과되어 파동이 나자, 1959.01, "미국 정부"는 불만의 표시로 "다울링 대사"를 소환하기까지 하였다"미국 정부""이승만 정권""한일 국교정상화"에 소극적이자,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급사

1960.01.19,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 "미국 월터 리드(Walter Reed) 종합병원"에 입원하였다이에 "이승만 정부"02.01일부터 "선거유세기간"으로 정하고, 03.15일을 "선거일"로 공고했다조기 선거 실시 이유로는 "농번기 피하기정국 안정" 등을 들었다216일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사망했다·부통령 선거 약 1개월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민주당은 1956년에 이어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대통령 후보가 선거기간 중 사망한 것이다.

1956년 선거 : 정 - 신익희(申翼熙1892~195664) 뇌일혈(또는 심장마비) 급사 / 부 - 조봉암(曺奉岩1899~195960)진보당 사건으로 사형

1960년 선거 : 정 - 조병옥(趙炳玉1894~196066) 급사 / 부 - 장면(張勉1899~196667)총리

 

민주당은 이미 대통령 후보 등록은 마감되었기 때문에, 다른 후보를 내세울 수도 없었다"조병옥" 후보의 사망으로 "이승만 대통령"4선은 사실상 결정되었으나, 부통령 선거는 "장면" 후보가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었다이에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인 "국회의장 이기붕"의 추종세력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그러니까 "부정선거"는 대통령 자리가 아닌 "부통령 자리"를 놓고 벌어진 것이다"내무장관 최인규"는 전국의 시장군수경찰 간부들을 불러, "부정투표 계획"을 지시했다전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를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도록 하였다.

선거 유세 기간인 02.28일 일요일 "대구"에서 그동안 "관제 시위"에 동원되어 오던 고교생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후 2,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자유당 경북도당"은 며칠 전부터 각급 기관장들과 학교장을 소집하여, 시민과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각종 행사를 개최하거나, 학생들을 등교시키라고 지시하였다일요일인데도 등교하게 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다경찰과 충돌하여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03.05, "서울운동장"에서 "민주당 유세"가 열렸는데, 유세가 끝나자 학생 시민 등 약 1천 명이 "학생은 궐기하라" 외치며, "종로"에서 시위행진을 하였다03.08, "대전"에서도 시위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했다이후 03.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1960.03.15 : 선거 실시

03.15,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투개표 부정"으로 "자유당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이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오후 03:40분 무렵부터 약 1천의 학생 시민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시내 중심가를 시위 행진하였는데, 저녁 7시 경에는 1만 명으로 늘어났고, 8시 경 경찰이 발포하였다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민주당"은 이날 오후 04:30분 성명을 발표하여,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행위"라고 규정하였다.

03.18, "마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최인규(내무부 장관)ㆍ이강학(치안국장)"이 사임하였다03.24, "부산"에서 고교생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자, 부산시내 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그러나 다음날 폭우 속에서도 "부산 동성중고테레사 여고경남공고혜화여고"생들이 시위를 벌였다04.01, 대학이 개학하였고, 서울 시내 주요 대학생들은 시위를 계획하였다.

04.11,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 발견

04.11, 오전 11:20분 경, "마산 사건" , 행방불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다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이 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의 잔혹한 시위 진압으로 "김주열"이 살해된 것이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2만여 명이 규탄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저녁 09:30분 경 발포하기 시작, 2명이 숨졌다04.18,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경무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이들은 귀교하는 도중, "종로5"에서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04.19일 : 419혁명 발발

오전부터 10만이 넘는 중고생, 대학생들이 재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오전 08:30분 경, "대광고" 학생 1천여 명이 "신설동 로터리"를 돌아, 서울 시내 중심가로 행진하였고, 9시를 조금 넘어, "서울대 문리대생"을 선두로 "법대약대수의대치대생" 3천 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09:30분에는 "서울대 사범대생" 1천 명과 "상대" 2천여 명이, 10시에는 "고려대생" 4천 명이, 10:20분에는 "건국대생" 2천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시에는 "동국대생" 2천여 명, "성균관대생" 3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고, 12시 경에는 "연세대생" 5천 명, "홍익대생" 1천 명이 시내로 진입했다정오를 넘어설 무렵, "광화문" 일대에는 10만이 넘는 시위대가 몰렸다.

경찰은 "시위대"에 밀려, "효자동 종점"에서 시위대와 대치하였다"경무대" 입구 정문과 "시위대"의 거리는 100여 m 였다경찰은 "시위대"가 더 전진하지 못하도록, "소방차"를 바리케이드 삼아 배치하였다오후 01:40분 경, "시위대"가 소방차 3~4대를 탈취하여,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무대" 정문으로 향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이날의 발포로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였고, 6,000여 명 정도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오후 5, "서울부산대구대전광주" 5대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이날까지도 "이승만 대통령""315 부정선거"를 모르고 있었다오후 8"월터 매카너기(Walter P.McConaughy) 미국 대사""경무대"를 방문하여, 사태 수습을 논의하였다오후 10시 경, "육군 15사단""계엄군"으로 서울로 들어오자,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04.19일 이후

04.20,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학생에 대한 보복행위를 금지시켰다오후부터 KBS는 정규방송을 중단하였고, 오후 7시에 "이승만 대통령""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04.21, 전국의 소요 사태에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직했다"장면""내외신기자회견"에서 사태수습방안은 "재선거뿐"이라고 주장하였다이날 "서울대" 5개 대학총장이 "송요찬 계엄사령관""검찰총장"을 방문하여,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또한 "매카나기 미국 대사"가 방문하여, 사태 수습에 대한 "미국정부"의 견해를 담은 "허터 국무장관의 각서"를 전했다.

04.22, "송요찬 계엄사령관""서울대고대" 9개 대학 학생대표와 회담하고, "419 사망" 학생들의 "합동장례식"을 허가했다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역임한 "허정(許政)변영태(卞榮泰)""경무대"로 불러 요담하였다04.23, "시국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이승만 대통령""동족살해에 통곡하며, 계엄해제를 위해 노력하자"는 담화를 발표하였다"국회의장인 이기붕""내각책임제"를 지향하며,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04.24, 정부는 "상오 5시를 기해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한다"고 발표하였다"이승만 대통령""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했다또한 "이기붕""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 수습방안에 만족하는 국민은 적었다.

04.25, "계엄사령부""대통령 특명으로 모든 구속학생을 석방했다"고 발표하였다"이승만 대통령""허정"을 국무위원 가운데, 서열 1위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이기붕""부통령직"을 사퇴했으므로, 대통령 궐위 시에는 "외무장관""대통령 권한 대행"이 될 것이었다"이승만 대통령""허정""외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하야"를 고려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민주당"은 대통령 사임과 선거 재실시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서울 시내 27개 대학, 259명의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계엄령"으로 위축되었던 시민들이 다시 합류하였다교수들은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대를 출발, 종로 5, 미국 대사관을 거쳐 태평로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대학교수들은 사전에 미 대사관과 협의하였다). 미국 정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 취소를 발표하였고, 원조 중지를 경고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04.26. 이른 아침 "1군 사령부"에서 "군단장급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만이 유일한 사태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이 결의내용은 오전 8시 경, "김종오(참모차장)""미국 수석고문관"에게 통고되었다.

서울 중심가에 시위 군중들이 모여,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며, "광화문"으로 나아갔다"계엄군"으로 출동한 "15사단""1군 사령부 참모"들로부터 "어떠한 경우라도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 훈시를 받았다"15사단장 조재미(趙在美) 준장"은 장병들에게 일체 강경진압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시위대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계엄군""시위대"를 방관하였고, 탱크에 올라가 환호하는 것마저 허용했다11시 경, "이승만 대통령""대통령직 사퇴""선거 재실시" 등을 발표하였다.

04.260시 경, "이기붕 일가"가 모두 피살되었다.

"이강석 소위(이기붕의 장남)"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아버지 이기붕어머니 박마리아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알려졌으나, "자유당" 내부의 "이기붕 반대파"가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04.27

"이승만 대통령""사임서"가 수리되었고, "허정(외무부장관)""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04.28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허정(과도정부 내각수반)""혁명적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하겠다."고 천명하면서, 1차로 "과도내각의 각료 명단"을 발표하였다"내무부장관에 이호법무부장관에 권승렬재무부장관에 윤호병문교부장관에 이병도부흥부장관에 전례용보사부장관에 김성진" 등이 임명되었다.

05.01

"허정(과도정부)""315 선거를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05.28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권유에 따라, "하와이"로 떠났다1965.07.19, 90세를 일기로 별세,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