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은 "정신적 대통령은 나"였다. "쿠데타" 당시만 해도 "박정희(朴正熙ㆍ다카키 마사오ㆍ1917(경북 구미)~ 1979.10.26(서울)ㆍ 62세)"에게 밀리는 듯했던 "윤보선 (尹潽善ㆍ1897~1990ㆍ향년 93세)"은 "청와대"를 나온 뒤, "박정희" 그늘에서 벗어난 뒤로는 "박정희"가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됐다.
1. "윤보선"은 "박정희"에게는 일종의 "천적"이었던 셈이다.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관계에서는 곤란을 겪거나,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자주 나타났다. 그런 "윤보선" 앞에서 "박정희"는 "딸 바보" 못지않은 "윤보선 바보"가 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당하는 듯했지만, 나중에는 "박정희"를 골탕 먹인 "윤보선"은 "박정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뒤에도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1990년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2. 1979년 12ㆍ12 / 1980년 5ㆍ17 쿠데타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으로서, "박정희 쿠데타"를 추인해 준, 군부의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 승인해줬다는 점에서는 "최규하"와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외형적 상황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든 점이 "윤보선"에게 있었다.
3. 1960년 "5ㆍ16쿠데타" 세력에 적극 협조
1960.05.16일 새벽 3:30분, "윤보선"은 "피신하시라"는 "장도영(육군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냥 청와대에 머물렀다. 또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미국"과 얼마나 교감을 나눴는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윤보선"은 오전 10:18분에 "박정희를 제압하자"는 "카터 매그루더(주한미군 사령관)ㆍ마셜 그린 (주한미국대사 대리)"의 제안을 받고도 고개를 저었다. "쿠데타 세력"과의 조우를 피하거나, 진압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3,600명이라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병력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사후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추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추인"은 군부 장성들이 "박정희"에게 반격을 가하지 못하게 막는 "법적 방어막"이 됐다. "윤보선"이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몸을 숨겼다면, "박정희"는 쿠데타를 합법화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4. "윤보선"이 "대통령직 사임 성명"을 발표한 것은 쿠데타 10개월 뒤인 1962.03.22일이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표를 수리한 것은 2일 뒤인 03.24일이다.
그 10개월 동안,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의 정권 장악에 필요한 "법적 조치"를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뒷받침해줬다. "쿠데타 당일"인 05.16일 "군사혁명위원회"로 출발했다가, 05.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된 이 기구의 각종 결정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윤보선 대통령"이 승인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쿠데타"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그해 11.01일 "대장"으로 진급하기까지 "별 셋ㆍ 별 넷"을 달아준 사람도 "윤보선"이다. (육군대장 계급장은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이 달아주었다.)
그래서 "윤보선"은 적어도 법적 측면에서는 "박정희 쿠데타"의 1등 공신이었다. "윤보선" 본인이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압 때문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는 어느 정도의 적극성 내지, 자발성을 보이며, "박정희 정권"을 지원했다.
5. "윤보선"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공개 석상에서 "박정희 씨"라고 불렀다.
1960년대에도 "대통령"을 "아무개 씨"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통념과 괴리됐다. 그런데도 "윤보선"은 그렇게 불렀다. "인물과 사상(2016.02월호)에 실린 "역사저술가 김용관"의 "박정희와 윤보선"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1964.07.08.일, "윤보선(제1야당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시국 대책 연설을 하면서 전날 있었던 "박정희의 특별교서"를 하나씩 비판했다. 그런데 연설문을 낭독하는 내내 "윤보선"은 "박정희 씨"라고 불렀다. "공화당" 의원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장내는 시끄러워졌고,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해버렸다. "윤보선"은 한 번도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6.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박정희" 공격 : 1963년 "대선" (대통령직 사임 1년 뒤)
"의원내각제 하"에서 "허수아비 대통령"이나 다름없었던 그는 "청와대"에 몰려온 군인들을 보고 겁에 질려 다시는 정치 쪽에 얼씬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투지가 더 강해졌다.
이로 인해 "박정희" 측으로부터 "당신도 결국 우리 편 아니냐?"는 식의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윤보선"이 1년 뒤인 1963년 "대선"에 출마해, "박정희는 민주주의 신념이 의심스러운 자다"라는 공격을 퍼 붓자, "이후락(박정희 후보 대변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경향신문 기사(1963.09.28일자) "왜 폭로 작전을 쓰나"에 따르면, "이후락"은 "5ㆍ16 주체세력의 이념 성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면서, "혁명정부의 이념에 대해서는 5ㆍ16혁명을 환영ㆍ합리화하고 또 1년여 혁명정부의 대통령으로서 혁명을 적극 지도해주신 윤보선 씨에게 물으면 더욱 잘 알 것"이라고 비꼬았다.
"청와대"로 몰려든 군인들 때문에, "쿠데타 조력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는 점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이용당한 희생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두 사람 관계를 이렇게 규정하고 끝낼 수는 없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이용한 것 못지않게, "윤보선"이 "박정희"를 곤경에 빠트린 측면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육체적 완력이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가 현저히 떨어지는데도, 이상하게 그 앞에 가면 기가 죽는 일이 있다. 이런 양상이 "박정희ㆍ윤보선"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
7. "윤보선"은 "1963년 대선ㆍ1967년 대선"에 연이어 출마해, "박정희"와 겨뤘다.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다.
• 1963년 대선 : 45.1%를 득표, 46.6%의 박정희에게 1.5%p 근소한 차이 패배
• 1967년 대선 : 40.9%를 득표, 51.4%의 박정희에게 10.5%p 이상 큰 차이 패배
1963년 "대선"이 "군부정권" 하에서 불공정하게 치러졌음을 감안하면, 45.1% : 46.6%라는 공식 결과가 실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윤보선"이 "박정희" 체제에서도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수도 있다.
1965년, "윤보선(68세ㆍ통합 야당인 민중당 고문)"은 당원들과 함께 "서울 안국동 로터리"에서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벌였다. 오늘날 "헌법재판소" 근처이자, 자기 집 근처인 이곳에서 그는 경찰의 비상식적인 진압 작전에 직면했다. 1965.06.22일 자 <경향신문> "투위(鬪委), 성토와 연좌데모"에 따르면, 경찰은 윤보선을 포함해 50여 명이 모여 있는데다가 최루탄을 8발이나 떨어트렸다. 사회지도층들을 향해 8발이나 쏜 것은 그들이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8발이나 떨어지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자리의 "윤보선"이 얼마나 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윤보선이 유독 박정희한테 강했다"는 점은 "박정희"의 치명적 약점이 될 만한 메가톤급 폭로가 그의 입에서 나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63년 대선 때, "윤보선"이 폭로한 "박정희의 공산당 경력ㆍ여순항쟁(여순사건ㆍ여순반란) 연루 의혹"은 "박정희"는 물론 "박정희 지지자들"의 족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보다도 더한 "반공 국가"를 표방한 "박정희"에게, "공산당 경력"은 치명적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박정희의 이념적 모순ㆍ앞뒤 안 맞는 출세욕ㆍ인간적인 의리를 경시하는 특성" 등을 노출함으로써, "박정희"에 대한 신뢰성을 두고두고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다.
폭로할 당시 "윤보선"은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공격은 "박정희" 진영을 당혹하게 하고,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만섭(박정희 후보 찬조 연사)"가 "당신은 친미주의자 아니냐?"며, 다소 엉뚱한 반론을 펴는 일이 있었을 정도다.
1963.10.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10ㆍ15 선거 마지막 유세"에 따르면, "이만섭"은 "윤보선 씨가 박정희 씨를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이며, 윤 씨는 인질로 잡혀서라도 미국 원조를 더 얻어오겠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겠는가?"고 말했다. 그 역시 친미주의자인 "박정희" 쪽이 "윤보선"의 친미 성향을 공격하는 상황이 연출됐을 정도로, "윤보선"의 공격은 "박정희" 캠프에 혼란을 던졌다.
"박정희"는 "윤보선"의 공격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받아쳤다. 1963.10.03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인 "낡은 매카시즘의 수법"에서 나타나듯이, "박정희"는 "윤보선"이 제기한 사상 논쟁을 "구태의연한 정치 악습"으로 몰아붙였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사상을 문제 삼고, "박정희"는 "윤보선"의 친미 경력을 비판하며, 그의 행태를 "매카시즘"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풍긴다. "윤보선"이 "보수ㆍ수구세력"을 연기하고, "박정희"가 "진보 진영"을 연기했던 셈이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 가문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 역시 "친일파"였으므로, 이런 공격은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자신을 잊게 할 정도로 "윤보선"이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정체성의 혼란을 보였다"는 것은 "윤보선"의 공격이 그만큼 매서웠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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