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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64.06 : 한일 회담ㆍ김종필- 오히라 메모 → 6ㆍ3항쟁

by 당대 제일 202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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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韓日會談)"은 1951~1965.06.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있었던 "한국ㆍ일본" 간의 일련의 협정을 말한다. "5ㆍ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4.03월부터 본격화한 "한일회담" 타결 움직임은 학생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불러왔고, 1964.06월 반대시위가 절정에 이르러, "6ㆍ3항쟁"을 초래하게 된다.

 

1. 협상 결과

 8 $ : 무상기금 3 $/10년간 지불 + 정부유상차관 2 $/연리 3.5%7 거치 20년 상환조건 + 상업차관 3 $

1960년(총리 장면) 23억$ 배상금 요구→ 1961.11월 박정희ㆍ이케다 회담→ 1962.11.12일 김종필(중앙정보부장)ㆍ오히라 마사요시(외상) "김ㆍ오히라 메모" 작성→ 1964년 한일회담 추진→ 1965.06월 국교정상화조약 조인   (1964.06.03.~07.29 : 63항쟁ㆍ63시위ㆍ한일협상반대운동)

※ 1962.11.12 PM 8~12시(4시간 회의) : 오히라 8천만 $ 제시→ JP 6억 $ 요청→ 6억 $로 결정ㆍ당시 일본 외화보유고: 14억 $ (전체 57% 선ㆍ무상 21% 선)

오히라

2. 한일회담 (韓日會談)

회담 관련, 한국 측 주요인물은 회담이 본격화된 1964년 당시 "박정희(대통령)김종필(국무총리)김동조(한일회담 수석대표)"이다회담타결 결과, 한국일본이 국교를 수립했으며,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조약은 1965.06.22일 조인되고, 12.18일 성립발효되었다한국정부 수석전권대표 "이동원(외무부장관)김동조(한일회담 수석대표)시나 에쓰사부로(외상일본정부 수석전권대표)다카스키 신이치(한일회담 수석대표)"사이에 조인되었다

"한일회담"은 전후 미국에 의해 구상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구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 우방국이었던 "소련"이 전후 적대국가로 돌변하여, 미국에 대해 팽창정책을 진하고, 또 중국이 1949년 공산국가로 전환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일본을 냉전의 동반자로 하여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 봉쇄정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역협력체제 구축을 위해 미국은 1951.09월 일본과 "강화조약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회담"을 추진했다또한 여기에 한일 양국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회담을 이끈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3. 한일기본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 정식명칭으로서, 양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10.08.22일 또는 그 이전에 한국과 일본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무효로 하며, 한국 정부가 유엔 총회 결의 제1953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는 것이 주요골자로 되어 있다이 기본조약 외에 법적 지위 문제청구권 문제해결 및 경제협력어업문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한국과 일본이 서로 간에 일반적 국교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1965.06.22일에 조인한 조약으로, 4개 협정 및 25개 문서로 되어 있다.

4개의 협정 :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25개의 문서 : 협정부속서(2)교환공문(9)의정서(2)구술서(4)합의의사록(4)토의기록(2)계약서(2)왕복서간(1)

4. 진행 과정

1951.10.20, "양유찬(한국 대표)마쓰모토 슌이치(일본 대표)" 간에 "도쿄"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하고, 1952.02.15, "1차 본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조정을 위한 기본조약 체결일본거주 한국인의 법적 지위재산청구권문화재 반환어업 문제선박 문제 등 여러 문제를 중심으로 교섭이 시작되었다이 교섭은 원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1952.04)"전에 타결할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란의 씨"를 내포하고 있어, 전후 14년에 걸친 장기교섭으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한일회담은 1960년을 기점으로 하여, 전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1960, "4차 회담"까지는 한국 측이 일제지배에 대한 반감에서 과격한 배일정책을 취하였고, 이에 반하여, 일본 측은 "구보다 망언"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과거 한국을 침략한 이후, 약탈공출 등에 대한 보상 액수도 낮고,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청구권 문제"에서 미군정령에 의해 멸된 재한 일본재산에 대해 "역 청구권"을 들고 나오고, "평화선 철폐"라는 현실적 이해만 충족시키려 함으로써 회담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런 감정적인 대립 외에도 당시 양국이 모두 정치경제적으로 회담 조속타결의 현실적 필요성을 별로 느끼고 있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 때문에 "시간을 끌수록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교섭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960, 일본은 "2공화국"이 출범한 것을 기회로 조속한 "한일회담"을 타결하려 하였으나, "장면 총리" 23$의 배상금을 요구했고, 회담은 결렬된다.

5. 1960년대 :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재원조달 + 미국의 아시아정책

1960년대, 들어선 "3공화국"하에서, 경제개발을 신앙으로 삼은 "박정희"는 재원 조달을 위해, "일회담"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나 단지 "경제개발 재원조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그것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그건 "박정희"가 간절히 원했던 "516군사정변"에 대한 미국 승인을 얻어낸 조건 중의 하나였다.

미국에게 "한일회담""중국베트남" 등 미국이 보기에 안보상의 불안 요소들에 대응하는 전략의 전제 조건이었다. 미국에서는 지나친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한 반성, 달러 위기 등으로 일본의 이기적인 행위에 대한 비난일본의 방위부담 증가아시아 평화에의 기여 등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그 일환으로 "한일회담" 타결요구가 강력히 대두되었다이에 일본에서는 "이케다 하야토 내각"1962년 말부터 회담 조기 타결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1964년에 성립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일 국교정상화"를 최대 과제로 내걸고 추진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에서도 "민주당 정권"부터 대일정책에 유연성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516군사정변" 후에 성립된 "공화당 정부"는 예상되는 미국의 "군사경제원조 감소"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산위협에 대한 한일 양국의 결속과 자립경제체제 확립을 위한 경제협력을 위해, 다소 조속한 감이 들 정도로 회담타결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일본의 경제 진출을 둘러싼 반대여론이 비등하였으나, 1961.11"박정희이케다" 회담에서 회담촉진 분위기가 조성되고, 1962.11.12"김종필(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외상)"간에, 소위 "오히라 메모"를 작성하여, 청구권 문제의 해결원칙에 합의를 보았다"본이 한국에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7 거치 20년 상환조건으로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

1963.07, "김용식(외무장관)오히라(외상)"간의 회담에서는 "어업문제의 조속해결"에 합의하였다"경제개발"을 신앙으로 삼은 "박정희"는 재원 조달을 위해, 1964년 봄,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그러나 "한일회담"의 추진은 순조롭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으며, 언론은 그 투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반대 투쟁에 대한 탄압탄압에 대한 저항격렬함은 확고한 신앙의 대결인지라 전쟁을 방불케 했다.

6. 1965,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 : "- 오히라 메모" 합의

1961.11.22,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 협조를 요청했다"박정희"의 협조 요청에 따라,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한국에 입국했다1962, "김종필(중앙정보부장)" "오히라"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이 협상내용은 "- 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1962.10.20(1차 회담서울)1962.11.12(2차 회담일본),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약탈 문화재 반환일동포 지위동해어업권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 버렸. 이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1962, "-오히라 메모" (김종필- 오히라 마사요시) : "63 학생운동사"에서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요시다의 회담, 1963.11월 존슨-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종필 메모

청구권은 3 $(무상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장기 저리 차관도 3 $로 한다     한국의 대일무역 청산계정 4,600 $는 청구권 3 $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 메모

청구권은 3 $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무역 계정 4,600 $는 청구권 3 $에 포함한다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합의 사항

무상공여 3 $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 $ 3 $ 중에서 상쇄한다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 $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20년 분할 상환연리 3 5 (정부 차관)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 $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민간 차관)

 63 학생운동 (1964년,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한일기본조약 비준

1964.01월부터,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1964.06.03일에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02월에는 "기본조약",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06.22,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08.14일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본조약"을 비준하였다. 1965.12.18일 오전10:30,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7. 야당의 반대

"윤보선장택상장준하박순천이범석" 등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을 "대일굴욕외교"로 규정하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였고, 학생 운동가들도 동참한다.

이후 1964.03, "장준하사상계""한일회담 반대시위" 선봉에 섰고, "윤보선장택상"을 중심으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가 설치되고, 1964.03월부터 "윤보선장택상장준하박순천이범석" 등은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박정희김종필" 등과 "한일회담 주체세력"을 비판하였다.

1965.02, "시나 에쓰사부로(외상)"의 서울방문기본조약 초안 작성 이루어지는 등 회담이 급진전되어, 1965.06, "국교 정상화조약"에 조인하고, 12월에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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