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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50.09 : 인천 상륙작전 (50.09.15)ㆍ장사 상륙작전 (50.09.14)

by 당대 제일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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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UN군 사령관 "맥아더 (MacArthur Douglas1880~196484)"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이다. "서울 탈환"으로 이어져, "한국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1950.06.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07월 첫 주에 "참모장 알몬드(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1. 인천 상륙 작전 (Battle of Incheon) ㆍ작전명 :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피 해 : 222(연합군)1,350(북한군  병 력 : 75,000명 - 미 제1사단(15,000)미 제7보병사단(60,000)

해군 함정(261)미 순양함(4)미 구축함(7) 항공기(19)경비정(1)구축함(1)전투함(20)ㆍ3,500명(주둔군(2,000명)ㆍ지원군(1,400명)ㆍ경비병(17명))

 교전국 : UN한국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 - 맥아더()백선엽백인엽손원일신현준  / 북조선 : 김일성최용건남일

 배 경

1950.06.29,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 "맥아더"는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M,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 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1이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08.28일 미국 합동 참모 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사실 인천 상륙 작전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고, 또한 인천항을 지배하는 감제 고지인 월미도를 사전에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2차 대전에서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태평양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큰 효과를 보았던 맥아더는 이번 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사전 작전

상륙 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 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 전으로 시작되었다.

09.04,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09.15일까지 지속되었다. 상륙 이틀 전인 09.13일에는 미 해군이 "월미도"를 사전 폭격했다09.15일에는 "영덕군" "장사 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장사 상륙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작전" 09.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09.15일에 "장사 상륙작전"이 진행되었다고 적혀있다.

 

2. 장사 상륙 작전 (長沙)ㆍ작전명 : 174고지

 일 시 : 1950.09.14~ 5일      장 소 :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결 과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학도병들의 전멸로 철수ㆍ북한군의 남진 지연적 후방교란 및 보급로 차단UN군의 승리 및 철수

 피 해 : 사망(139)부상(92)북한군(불명)      병 력 : 772(학도병육본직할독립 제1유격대대)56(지원요원)북한군(불명)      교전국 : 한국 - 이명흠 대대장 / 북조선 - 김무정

1950.09.13. 15:00, "문산호(2,700톤급)으로""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09.15 05:00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국군의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장사동"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7번국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고, 철수한 작전이다.

"인천 상륙 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실시되어, 양동작전으로서는 성공하였다원래는 "8"에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당초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사망한 학도병을 제외하면, 모두 행방불명 상태이다원래는 3일간 상륙한 뒤, 귀환할 예정으로 총기 등의 물자도 3일치만 지급되었다그러나 "문산호"가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총알과 식량이 부족해진 가운데에서도 "7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출하러 "(조치원 호)"를 보냈지만, 죽기 전까지 싸웠던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였다배가 상륙하면, 배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상륙작전에 동원되었던 "문산호(lst-120)" 1991.03월쯤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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