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50.12 : 흥남(부두) 철수 → 1ㆍ4 후퇴의 시작

by 당대 제일 2022. 11. 10.
반응형

 

"흥남(부두) 철수"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ㆍ국군 제1군단"이 "흥남부두 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이다."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UN군ㆍ국군"은 1950.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 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UN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1. 흥남 (부두) 철수

 "흥남 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ㆍ해ㆍ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전의 성공으로 "UN군ㆍ국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일 시 : 1950.12.15 (출항 기준)~ 12.24 (10일간)       결 과 : 연합군의 흥남철수 성공

 함정 이용- 인명(20만 여명병력- 10피난민- 10)각종 차량(17,500대)물자(35만 톤)  / 항공기 이용- 병력(3,600)차량(196)물자(1,300)  /  "피난민 승선"으로 "폭약(400)차량/장비(560만 톤)"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왼료된 후, "해군 함대폭격기"가 흥남부두와 미선적 군수물자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전부 폭파시켰다

관련 인물 : 미 제10군단국군 제1군단알몬드 장군(미 제10군단장)김백일 장군(국군 제1군단장)현봉학(통역인미 제10군단 소속민간인 고문관)

• 피난민-  98,100명 : 메러디스 빅토리호 (14,500)버지니아 빅토리호 (14,000)레인 빅토리호 (7,000)마다케츠호 (6,400)토바츠 마루호 (6,000)요나야마 마루호 (3,000)BM 501 (4,300)LST 074 (3,500)LST 081 (4,000)LST 661 (9,400)LST 666 (7,500)LST 668 (10,500)

흥남 (부두) 철수

"장진호 전투""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이 전투에서, "1 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이 후퇴작전이 "14후퇴"의 시작이었다.

"한국정부""UN""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12.04"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아울러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14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했다"중공군"의 역습으로 가장 위급한 상태에 있던 "UN""육로동해해안" 방면으로 신속하게 후퇴하였다따라서 "UN"은 서해에서의 철수보다는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12월 당시, "서부전선" 상으로 북진한 "8"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는 지형특성상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장진호 전투" , "하갈우리"에는 현지주민을 비롯하여,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주변 계곡이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자 운집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영하 27"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천신만고 끝에 후퇴하였으며, "원산"에 주둔해 있던 "미 제3사단""중공군"이 남쪽의 퇴로를 막아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이때 집결 병력은 105천여 명이었다

1950.12.09., "맥아더 원수"의 철수명령이 하달되었고, "미 합참"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되었다12.11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장비가 탑재되기 시작하여, 14일 선적이 완료되었으며, 15"흥남부두"에서 출항하였다12.23(해군 기준으로는 24)까지 이후 "UN국군 제1군단""흥남철수"를 완료하였다.

"알몬드 장군(미 제10군단장)"은 처음에는 600만 톤이나 되는 무기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김백일 장군(국군 제1군단장)현봉학(통역인)"의 설득으로 마지막에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하였다"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였다LST 1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000여 명이 승선하였지만,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1,000여 명이었다.

2.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철수 작전

"김백일 장군(국군 제1군단장)현봉학(통역인미 제10군단 소속민간인 고문관)""알몬드 장군(미 제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메러디스 빅토리 호""흥남 철수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4,000여 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3.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

2017, "문재인(文在寅1953~ 19대 대통령)"은 취임 후,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며 06.28(현지시각) "미국 장진호전투 기념비"에 헌화식을 가졌는데, 기념사에서 자신의 가족이 겪었던 "흥남철수" 에피소드를 언급했고, "빅토리 호"1등 항해사인 "로버트 러니"를 직접 만났다.

"그 때 메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는 저희 부모님도 계셨습니다.(중략) 지금 아흔이신 제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항해 도중인 12.24, 미군들이 그 배 속의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비록 사탕 한 알이지만, 그 참혹한 전쟁 통에 그 많은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준 그 따뜻한 마음씨가 저는 늘 고마웠습니다. 존경하는 장진호 전투 용사와 후손 여러분! 대한민국은 여러분과 여러분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존경의 기억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