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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52.05 : 부산정치파동ㆍ발췌개헌안 통과 → 이승만 2선 당선

by 당대 제일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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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정치파동"은 1952.05.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이승만 정권"의 폭력행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며,  "발췌개헌안"은 "장택상(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新羅會)"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마련했다.

 

1. 부산 정치 파동 (1952.05.26일)

1952.05.26, "이승만 대통령""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이승만 정권"의 폭력행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승만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 ,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구속한, 일련의 정치적 파행이었다이 사건으로 "김성수 부통령""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고 반발하여, 사표를 냈다당시, "헌병대"가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끌고 사라지는 모습은 이 사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부산 정치 파동

2. 진행과정

당시 정부는 19506.25,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 피란 중인 가운데, 전쟁 중 터져 나온 "행정상 무능력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되어, 다가온 "2대 대통령 선"에서 연임을 위협 받고 있었다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국회의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한, "신당 운동"을 추진, 1951.12"자유당"이 창당되었다.

1950.05.30, "국회의원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11.30, 정부는 "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그러나 1952.01.18,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정부와 국회 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1952.01.18,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재석 163명 중, 찬성(18)반대(143)기권(1)로 부결되자, "이승만" "국민회조선민족청년단(족청)대한청년단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 관제데모를 부추겼고, 치깡패 집단인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된 벽보전단을 부산일대에 뒤덮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官製民意)"를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하였다.

1952.04, "이승만""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 그가 이끌던 "신라회(新羅會)""개헌지지" 쪽으로 끌어들였다05.25,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해, "부산경남전남전북"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이범석"을 내무장관에, "원용덕"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여,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주동 의원의 포에 나섰다.

05.26,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는 한편,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를 "헌병대" 강제로 끌고 가, 일부 의원에게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웠다"정헌주이석기서범석임흥순곽상훈권중돈" 12명은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이를 계기로 "김성수 부통령" 05.29"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3. 국제구락부 사건 (1952.06.20일ㆍ國際俱樂部)

"정치 파동"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이승만"06.04일에 "국회 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06.20,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하는 회의장에 괴한이 습격하여 피습당하는 일 (국제구락부 사건)이 발생했으며, 06.25"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06.30, "민중자결단""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52.06.20, "이시영김성수장면" 81명의 인사가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정부 측이 내놓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꾀한 사건이다.

1952.01.08, 정부 측이 제안한 "대통령직선제양원제(兩院制)"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 측에서는 "국회해산반민의(反民意)국회의원 소환" 등의 위협적인 견해를 표명함과 동시에, "관제(官製) 데모"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위협하였다.

이에 국회 측은 "곽상훈 의원"으로 하여금 122명의 서명을 얻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도록 하여 정부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정부측은 국회해산을 위하여, 동원한 "땃벌떼백골단(白骨團)민중자결단(民衆自決團)" 등의 관제 데모와 공비소탕을 이유로 한 "비상계엄 실시", 05.25일의 "국회의원 납치"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28일 국회에서는 11명의 구속의원 석방과 계엄령 해제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고, "UN연합 한국위원단"의 계엄령과 연행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 역시 묵살하였다. 06.20, "신흥우김창숙" 등의 인사가 "국제구락부"에 모여, 입법부 수호에 대한 구국선언을 꾀하다가, 회장에 난입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유혈 속에 중지되었다이러한 가운데, "신라회(新羅會)의 장택상""삼우장(三友莊)" 사이의 의견을 절충한 "발췌개헌안" 07.04일 통과되어, 07.07일 공포되었으며, 07.28일에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4. 발췌 개헌안 (拔萃改憲案)

이처럼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자, 06.20"이시영김성수장면조병옥김창숙" 등 야당의원 60여 명은 "국제구락부"에서 "호헌구국 선언"을 꾀하였으나, 괴한들의 습격으로 무산되었다"장택상(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新羅會)"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 마련했다.

1952.07.04, 군경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 166명 중, 찬성(163)반대(0)기권(3)"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07.07, 개정 헌법이 공포되고, 28"비상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이로써 "이승만 독재정권"의 기반이 굳어졌다.

5. 발췌 개헌 당시의 정치적 상황

① 발췌개헌안 (拔萃改憲案) : 헌법 1차 개헌 : 1952.07.07 (헌법 전문 변경사항 없음)

"부산(임시수도)"에서 국회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의 요구를 부결하여,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은 국회를 탄압하고,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절충안인 "발췌개헌(대통령직선제 + 양원제 실시)"으로 독재정치의 기틀을 잡았다.

② 1대 국회의원 선거ㆍ1대 대통령 선거

1948년, 한국 최초의 총선ㆍ대선이 있었다. 1948.05.10.일, "총선"으로 국회의원이 당선되고, 2달 뒤인 07.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는 48개 정당들이 참가하여, 총 198명 당선(제주도 2개구는 "제주 4ㆍ3사태"로 선거 연기) : 무소속(85명)ㆍ대한독립촉성국민회(55명)ㆍ한국 민주당(29명)ㆍ대동 청년단(12명)ㆍ조선민족청년단(6명)ㆍ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2명)ㆍ기타 단체 소속(11명)등 : 제1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총재) 55명 당선 (28%)ㆍ제2당 - 한국민주당 (김성수 수석총무ㆍ당수(黨首) 김성수는 총선에 출마하지 않음) 29명 당선 (15%)

"제헌헌법"은 "대통령 간선제"로, 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이었고, 당시 국회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많았기에 대통령 선거는 당연히 이승만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 된 후에, 08.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다.

③ 1948.07.20일 오전10시 시작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

선거

④ 2대 국회의원 선거ㆍ2대 대통령 선거

1950.05.30일, "국회의원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11.30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당시 정부는 1950년 6.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 피란 중인 가운데, 전쟁 중 터져 나온 "행정상 무능력ㆍ부정부패ㆍ 국민방위군 사건ㆍ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되어, 다가온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을 위협 받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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