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원폭 사용(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써야 한다)" 건의를 거절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리 S. 트루먼 (Harry S.Trumanㆍ1884년~1972ㆍ88세ㆍ미 대통령(33대ㆍ1945.04~1953.01)"은 "맥아더 (MacArthur Douglasㆍ1880~1964ㆍ84세)"가 하자는 대로 하면, "제3차 세계 대전"이 터진다고 생각하여, 한반도에서 "무승부 전략"을 세웠다.
1. "맥아더"의 오판이 부른 "중공군 개입ㆍ총퇴각"을 수습, 한국을 지켜낸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1번째 교훈은, "오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가디스 교수 : "6ㆍ25 때,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였더라면, 한반도는 원폭투하장이 되고, 제3차 대전으로 갔을 것이다.
1950.09.15일, "맥아더 원수(UN군 사령관)"가 지휘하는 UN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UN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맥아더"는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했다. UN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은 9월28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시작한 것은 10.01일이었다. "맥아더"는 한국을 구한 면도 있지만, 한국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간 책임도 있다.
6ㆍ25 때, 맥아더는 "공보다 과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공이 크긴 하지만, "중공군 개입" 움직임을 알고도 덮어버린 점, 1950.10월말의 1번째 중공군 기습을 "정찰활동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1달 뒤 다시 진격하다가 "대반격"을 부른 점, "중공군 남진" 개시 후, "중국 폭격, 원폭 사용 등 대규모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한국 포기론"을 건의한 점 등이다. UN군이 압도적 병력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라도 북진은 기정사실이었다.
① "정보판단"에서 실패했다.
그는 UN군이 북진해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중공군이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UN군은 중공군이 "만주"로 이동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원이 중공군과 섞여서 같이 걷기도 했다. 1950.10.15일, 맥아더는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여도 사상최대의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는 "찰스 윌로비"였다. 이 사람은 맥아더가 이미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 즉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
<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잘못 판단한 배경 >
• 1949.10.01일 정권을 수립한 신생 중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므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불가능할 것이다. • 중국의 대미 경고는 UN 가입을 위한 외교적 위협 또는 정치적 공갈 정도의 협박에 불과하다. • 만약 중국이 개입할 의사가 있었다면, 낙동강선이나 인천상륙작전 시에 개입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 소련이 미국을 의식하여 중국에 해-공군의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공군의 지원이 없는 중공군은 유엔군의 막강한 공군력과 화력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정직하지 못했다.
1950.10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북진하는 국군을 쳤다. 수개 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와 포진하고 있었는데도 "맥아더 사령부"는 그 1/10 정도로 추정했다. 그는 명백한 사실이 등장했는데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북진을 중단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야 했음에도 그는 1달 뒤인 11월 하순, 또 다시 무모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③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11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UN군을 총력으로 기습했다. 맥아더는 뒤늦게 현실을 인정한다. 맥아더의 엉터리 정보판단과 부정직한 태도로, 수많은 UN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의 기습을 당한 UN군은 싸우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서울"까지 총퇴각 명령을 내린다.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번 기습에 놀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한다.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돌변했다.
④ 변명만 했다.
UN군이 "평양~원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했더라면, 38선까지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접촉을 피하게 하고 "총퇴각"을 명령하여, "서울"을 싸우지도 않고 내어준 뒤 "수원" 이남까지 물러났다.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였다. 맥아더는 이 사이 변명만 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점에 대해선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고, UN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만주 폭격을 트루먼 정부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을 향하여, 증원군을 보내주지 못하겠으면, 한국에서 철수시켜달라고 협박했다.
"대만 군대"를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당시 "대만 군대"는 "군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엉터리들이었다. 이들이 중국본토에 상륙하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맥아더는 중국을 공격하자는 제안도 했다. "한국전선"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중공군에게 땅을 넘겨주고 있으면서 중국과 정면대결하자고 한 것이다.
⑤ 맥아더 속셈은 중국을 수복하여, "아시아의 시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기회로 삼아, 전선을 "중국 본토"로 확대시키려 했다. "트루먼"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런 확전을 뒷받침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맥아더는 "극동"만 보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자유세계 전체"를 지켜야 했다. 그때 "소련"은 "원폭실험"에 성공한 상태였다. 미국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힘도, 국가적 의지도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친다면, 소련이 중국 편에서 개입할 것이고, 핵무기를 쓰는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았다. "트루먼"이 확전을 결심했더라면, 핵을 쓰는 "3차 대전"이 일어났든지, 월남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미중 전쟁"이 중국 본토에서 계속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미국이 이기지 못했을 것이며, 미군철수 과정에서 한반도는 포기되었을 것이다. "트루먼"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한전"을 통하여, 한국에서 확보한 것은 남한과 평화였다. 휴전 뒤, "한미동맹"을 구축, 이 평화의 시기를 선용하여, 북한군의 재 남침을 저지하고,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불렀다.
⑥ "워싱턴의 미 국방부ㆍ합참"도 맥아더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
"미 군부"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들은 거의가 맥아더의 훨씬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기가 치솟은 맥아더를 견제하려 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을 펴도 이를 방치했다.
⑦ 맥아더는 "서부전선ㆍ동부전선"의 작전 지휘를 분할했다.
동부전선은 "알몬드 장군(10 군단장)"ㆍ서부전선은 "워커 중장(8군 사령관)"이 맡았다. 맥아더는 "알몬드"를 편애했다. "통합작전"이 불가능해졌다.
⑧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한 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8군 사령관)"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는 "반격작전"을 펴서,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 올렸다.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반격작전"을 시작하기 전, "한국전선"으로 날아와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반격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하여, 부하의 공을 가로채려 했다.
⑨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맥아더의 그늘에 가려서, 과소평가 받는 사람은 "트루먼ㆍ리지웨이"다.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중공군 개입 후에도 한국 포기 압력을 거부했던 "트루먼"이야말로 정말로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많은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이순신", "트루먼"은 "원균"이다.
⑩ 문민우위의 전통을 무시했다.
UN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발언중지 명령도 무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항명한 그를 해임한 것은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늦었다는 평을 받았다.
⑪ 웅변 뒤의 몰락
맥아더는 귀국하여, 영웅 대우를 받고, "미 의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트루먼"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이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공세였다. 그 직후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민주당 의원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거짓말 하는 장군ㆍ무책임한 장군ㆍ세계정세를 아주 좁게 보는 장군"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피력했던 핵심적인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란 것이 폭로되었다.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청문회 이후 여론의 지지는 사라졌다. 1952년, 선거에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맥아더의 부관"이었다. 그는 맥아더보다 훨씬 원만하고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⑫ 그의 실패는 명예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측근들을 "예스맨"으로 채웠다. 그들은 맥아더가 싫어하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황제"나 다름없는 맥아더를 둘러싸고, 안락한 도쿄에 앉아서 한반도 지도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엄동설한의 한국전선은 맥아더와 그 측근들에겐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하루도 한국에서 잔 적이 없다. 맥아더는 언론 타기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쇼맨십은 그의 무덤이 되었다.
⑬ 그의 정보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
"모택동"은 당초 한반도로 출병하는 중공군 사령관에 "임표"를 임명하려 했다. "임표"는 칭병하곤 이 제의를 거절했다. "모택동"은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수개월 간 사령관이 "임표"라고 오판했다. 자신이 상대하는 적장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운 것이다.
2. 1950.10.15 (96분간 회담): 웨이크 회담 (Wake Conference) 트루먼ㆍ맥아더 장군
1950.10.15일, "웨이크섬(Wake Island)"에서 맥아더를 만난 이후,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트루먼은 66세였고, 맥아더는 70세였다. 맥아더의 답변은 "거의 없다"였다. 두 사람은 긴장된 관계였으며,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두 사람은 사사건건 갈등과 충돌을 빚었다. 트루먼의 주요 관심사는 "한국전쟁에 소련과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었다. • 트루먼 : 나는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장군으로부터 긴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직접 만났다. 우리 만남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1950.10.15일, 맥아더는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여도 사상최대의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는 "찰스 윌로비"였다. 이 사람은 맥아더가 이미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 즉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
1950.08월 실시한 여론 조사는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이 실수가 아니며(65%), 20%는 실수라고 응답했다. 당시 트루먼은 미국 시민들의 대중적 지지를 힘입어, 광폭행보를 주저하지 않았다.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정책수립자"들이 맥아더와 더불어 중국의 개입 의도와 능력을 경시하는 가운데, "북한의 조기 점령을 낙관하였다"는 사실은 1950.10.15일 "트루먼"의 지시로 태평양상의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이루어진 만남에서도 여실이 드러났다. 원래는 "트루먼"이 "맥아더 장군의 본토 귀환"을 지시하였으나, 맥아더가 전쟁지휘로 인해 "장시간 전장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이를 존중하여 결정된 만남이었다.
1950.10.09일, 맥아더는 "도쿄 연합국 최고사령부 사무실"에서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만나자"는 전문을 받았다. "웨이크 섬(Wake Island)"은 "도쿄 사무실"에서 3,058km, "워싱턴"에서 7,564km 거리에 위치하는데, "트루먼"이 전시 중인 맥아더를 고려하여, "도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정했던 것 같다. 사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워싱턴"으로 부르려고 했으나, 맥아더가 "전시 중인 사령관의 작전지 이탈은 곤란한 문제"라는 점을 들어, 거부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이 자신을 배려한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웨이크 섬"으로 먼저 날아가 대기했다.
만남에서 "트루먼"은 "전쟁의 전망ㆍ중공군의 개입가능성"에 관해 질문하였고, 맥아더는 전쟁의 전망에 대해 "북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추수감사절 때면 끝날 것이며,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미 제8군을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희망사항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중공군은 개입시기를 상실하였고, 설렁 중공군의 일부가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더라도 그들은 공군의 지원이 매우 빈약하므로, UN군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육전을 펼칠 것이다."고 장담하면서, 전쟁의 조기 종식과 더불어, 미군의 조기 철수가 가능함을 확인하였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낙관적인 언급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1950.10월 경, 한국전쟁에 투입된 UN군 병력은 이미 33만 명을 넘어섰으며, 극동에 배치한 공군ㆍ해군을 더하면, 총 병력은 40만 명을 훌쩍 넘었으며, 참패한 북한군 3만 명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병력을 두고 보면, 전쟁은 이미 미국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는 트루먼과 "더 이상 소득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회담은 불과 96분. 맥아더는 서둘렀다. "트루먼"과 오찬을 사양하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다. 불편한 사람과 마주앉아 식사하기란 보통 거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트루먼"이 "워싱턴"에서 가져온 "공로훈장(DSM)"을 맥아더에게 수여했다, 맥아더는 같은 훈장을 이미 5개나 가지고 있었다.
< 여 담 >
"웨이크 섬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것이,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 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 나오는 "맥아더"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70살 쳐 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들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왔다."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던 어떻게 생각하던 난 신경 안 쓰지만, 다시는 군 통수권자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 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3. 존 리드 하지 (John Reed Hodgeㆍ1893~1963ㆍ향년 70세ㆍ일리노이주(州) 출생)
미군정청 군정장관(1945.09~1948.08ㆍ외교관ㆍ군인ㆍ정치가ㆍ미군정청 대통령 :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ㆍ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군인으로써는 괜찮은 인물이었지만, "정치가ㆍ행정가"로써는 가히 "최악이나 다름없다"는 혹평을 들었다.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높지만, 일반인들 사이의 인지도는 낮고, 미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한지역을 통치하였지만,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초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혼란기를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하였고, 그러면서 조선인에 대한 비하 발언이나 떨어지는 정치 감각을 지니고, 여러 학살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수습책보다는 무책임한 대책을 내놓는데 급급했다.
"1차 세계대전ㆍ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1945년 "2차 대전" 종전 시절 "미국 육군 제24군단장"이었으며, 그 후 1945~1948년까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으로 활동했다. "미군정기간" 중, "이승만ㆍ김구" 등과 정치적으로 충돌했고, 그 와중에 차라리 "김규식"을 실권 없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로 추진하려다가 끝끝내 실패하기도 했다. 그의 군정 통치에 대한 평가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저 용감하게 전투나 잘 하는 "무골"에 지나지 않는 사람일 뿐이어서, 국제정세ㆍ국내정세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남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직업군인 방식대로 단순하게 대처하다가 남한의 해방정국을 그르쳤다는 시각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시아에 대해 사실상 무지하다시피 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그의 휘하 민사부 요원들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언론인 김학준"에 의하면, 예컨대 한민족은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 한민족은 아주 오랜 기간 외국의 지배를 받음이 없이 독립 국가를 유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오직 "귀족적 소수"만이 혜택을 입었고, 대다수의 민중, 특히 농민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4. 맥아더 (MacArthur Douglasㆍ1880~1964ㆍ향년 84세ㆍ아칸소주(州) 리틀록 출생)
미국 군인(맥아더 원수)ㆍ일본의 백인 쇼군(연합군 점령 하 일본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ㆍ태평양 전쟁(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ㆍ육군 원수로 지휘)ㆍ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공병장교"로 시작하여, "전설ㆍ신화"라 불릴만한 미 역사상 가장 화려한 경력을 누린 군인으로 "미군 최연소 대장ㆍ육군 원수까지 승진"ㆍ"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였다. "6ㆍ25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ㆍ중국으로의 확전(擴戰)"을 반대한 군 통수권자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카이사르 화법). "맥아더, 그 사람은 말이야~ "
① 옷차림새 : 짙은 선글라스ㆍ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ㆍ수제 콘파이프 담배(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ㆍ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 사진에는 모자를 벗은 적이 없다.
② 복무 : 1903~1937 : 미합중국 육군 ㆍ미국 육군 원수 → 1941~1964 : 필리핀 자치령 육군ㆍ필리핀 육군 원수 → 1910~1920 : 멕시코 혁명 → 1914~1918 : 제1차 세계 대전 → 1939~1945 : 제2차 세계 대전 → 1950~1953 : 6ㆍ25전쟁
③ 아서 맥아더 4세 : 외아들ㆍ맥아더 58세에 본 늦둥이ㆍ아버지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군인 "A.맥아더" 아들로, 1903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였으며, 그 후 육군에 근무하며, 1930년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군"에서는 "극동통(極東通)"으로 알려졌고, 1936년 필리핀군(軍)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퇴역하였다. 그 후 대일관계(對日關係)가 긴박하였던 1941.07월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다.
1942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호주로 이동,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대일작전을 지휘하였다. 그 해 가을부터 "뉴기니 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 1945.0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50.0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전세를 역전시켜, 적을 "한반도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폭격ㆍ중국연안봉쇄ㆍ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0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여러모로 "맥아더의 파면"은 "이승만" 입장에선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1951년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앞에서 통일을 놓치게 된 상황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하였으나, 미국 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은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기존의 남한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나면, 바로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맥아더"는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여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는데 "맥아더"가 파면되었으니, "이승만 입장"에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친 셈이었다. 은퇴 한 해 전인 1950.09.15일 오전 6시, "인천상륙작전"을 개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은 1951년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저지할 방안을 놓고,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갈등을 빚다가,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 당한다.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명언을 남기고, 미련 없이 군복을 벗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951.04.09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는 52년간의 군 복무를 끝내며,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고별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전 세계 국가들 중,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민이 보여준 그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국민의 반공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연설 마지막에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노래 속의 노병처럼 이제 군 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한국민은 종전 4년 뒤인 1957년 상륙작전을 펼쳤던 인천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인천시 자유공원 내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은인"으로 기억해 왔다.
< 어 록 >
•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
• 나는 돌아온다. (I shall return)
• 전투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하는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
•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
•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
•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기관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
•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
•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뚤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 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과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ㆍ명예(Honor)ㆍ국가(Country)"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 있는 생각은 "부대와, 부대와, 부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 신분인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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