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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34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② 논란ㆍ의혹ㆍ사상ㆍ가족사 "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은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 두목"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다가 "국제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는데,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해 월남하는 데 성공→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 논란ㆍ의혹 ① 공산주의자 논란 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으나, 민필호와 장준하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평소 김원봉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필호는 "교활한.. 2022. 10. 20.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① 의열단 단장ㆍ조선의용대 총대장 "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액 현상금(현상금 100만원(현 320억 원))이 걸렸던 인물이며, "김구"와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인물로, "의열단장(1919년 의열단 조직)ㆍ조선의용대장ㆍ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1930년대 후반)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1.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향년 60세) →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 혁명가ㆍ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의백)ㆍ조선의용대 총대장)ㆍ군인(중화민국 육군 소위(1927~1930))ㆍ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1941~1945)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2022. 10. 20.
의열단 ② 칠가살 (七可殺ㆍ임정)ㆍ오파괴 (五破壞ㆍ의열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칠가살 (七可殺)"을 , 의열단은 "오파괴 (五破壞)"라는 것을 정해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1. 칠가살 (七可殺)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에 협조한 대가로 얻은 금전이나 직위를 이용해, 일신의 영달을 꾀해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족적 공분을 사서, 민족 지사들에 의해 처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과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02.05일자 1면에서 "칠가살(七可殺)"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는 항일.. 2022. 10. 20.
의열단 ① 의열단 (1919)ㆍ한인애국단 (1931)ㆍ조선의용대 (1938) "의열단 (義烈團)"을 이끌던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과 "한인 애국단 (韓人愛國團)"을 이끌던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는 각각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1. 의열단 (義烈團)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설립일 : 1919.11.07~1924.01.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독립당 • 주 도 : "김원봉 (약산)"이 단장 • 성 격 :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 단 원 : 김원봉ㆍ윤세주ㆍ한봉근ㆍ한봉인ㆍ이성우ㆍ곽경ㆍ강세우ㆍ이종암ㆍ김상윤ㆍ신철휴ㆍ배동선ㆍ서상락ㆍ권준ㆍ이수택ㆍ.. 2022. 10. 20.
무관학교 ②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경희대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의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ㆍ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경희대학교 전신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ㆍ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19년 "3ㆍ1운동"이후, "조선" 젊은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자, 다시 "류하현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 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산리 전투"로 "신흥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서로.. 2022. 10. 15.
무관학교 ① 황푸ㆍ봉천ㆍ만주ㆍ신흥ㆍ일본 육사 1924.06월, "중국 국민당"에 의해, "황푸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ㆍ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쑨원"은 스스로의 "혁명군"을 조직하기 위해, "소련"의 조언을 받아, "소련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떠서 학교 체제를 편성하였다. 1. 군관학교 (軍官學校) ① 육군무관학교 (陸軍武官學校)ㆍ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ㆍ한국 육군무관학교 • 설 립 : 1896.01월 설치ㆍ"아관파천"으로 인해, 불과 5명의 졸업생만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 재설립 : 1898년 (대한제국 수립 이듬해), 신식장교를 양성을 위해, 재설립 → 해산 :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09년에 폐지 • 목 적 :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 양성 • 위 치 : 한성 • 졸업생 : 282명 졸업.. 2022. 10. 15.
독립군 ③ 왜 광복군은 국군의 주체가 되지 못했나? 1940.09.17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었고, "김구(임시정부 주석)"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한ㆍ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했다. 1.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 설립 일시 : 1940.09.17일 • 설립 장소 : 충칭(중국 임시 수도)의 가릉빈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21년 만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1888~1957)장군" 아래, "이범석(1900~1972)"을 참모장으로 모두 4개 지대로 편성했다. 이때 "광복군"은 병력과 부대 편제를 갖추지 못해, "중경"에서 동원 가능한 30여.. 2022. 10. 15.
독립군 ② 무기ㆍ식사 "한국 광복군"은 일본군 장비 이외에도 "소련제ㆍ체코슬로바키아제ㆍ독일제" 총기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적백내전" 당시, 사용되던 구식 무장들을 헐값에 사들였거나, "중국 국민당군"에게서 다수의 "체코슬로바키아ㆍ독일제" 병기를 보급받았기에 가능했다. 또한 "북로 군정서군(김좌진)"은 "러시아 내전" 때, "연해주"로 퇴각하던 "백군 소속 체코 부대"가 총기ㆍ탄약 등을 매각해 줘서 무기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 외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밀수업자로부터 무기를 밀수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① 가격 : 장총 1정 + 탄환 100발 : 35원 (간도 노동자 1명의 1년 노임 (30~45원)) ② 군자금 조달 : 금반지ㆍ금비녀ㆍ비단 보자기ㆍ놋요강까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으로 내놨.. 2022. 10. 15.
독립군 ① (요약) 변천사 ② 조선의용대ㆍ간도특설대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된 "간도 특설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ㆍ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ㆍ동북항일연군ㆍ조선의용대ㆍ대한독립군단(만주 북서부"에 잔존)"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부대"로, 독립운동ㆍ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 1922 : 통의부 (대한통의부)→ 의견불화 • 복벽주의 계열 : 전덕원 (최익현 휘하의 소모장 (召募將) 출신ㆍ대한독립군단 간부) → 1923.02ㆍ의군부 (義軍府) 결성→ 통의부에 압도ㆍ참의부로 편입 • 공화주의 계열 : 양기탁 (애국계몽운동ㆍ독립군 단체의 통일운동 전개)→ 정의부로 편입 "대한통의부 (統義府ㆍ통의부)"는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단체ㆍ군정부(軍政府)ㆍ자치조직"이다.. 2022. 10. 15.
독립군 ① (요약) 변천사 ① 자유시 참변ㆍ봉오동/ 청산리전투 1921.06월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ㆍ흑하사변 (黑河事變)"은 독립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ㆍ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소련 영토인 "스바보드니(이만ㆍ연해주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ㆍ사살한 사건으로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ㆍ상해 파" 간의 정면 대결로 발생한 것이다.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 1920.06 : 봉오동 전투 (鳳梧洞) "조선ㆍ만주"의 국경지역에서 "독립군ㆍ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전투였다.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이흥수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봉오동..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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