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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독립군 ① (요약) 변천사 ① 자유시 참변ㆍ봉오동/ 청산리전투

by 당대 제일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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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06월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ㆍ흑하사변 (黑河事變)"은 독립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ㆍ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소련 영토인 "스바보드니(이만ㆍ연해주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ㆍ사살한 사건으로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ㆍ상해 파" 간의 정면 대결로 발생한 것이다.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 1920.06 : 봉오동 전투 (鳳梧洞)

"조선만주"의 국경지역에서 "독립군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전투였다"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이흥수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19사단 월강추격대대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독립군의 선제공격골짜기 유인책험준한 골짜기 지형기후 조건을 이용한 전투였다.

이후, 1920.08월까지 거듭된 소규모 전투습격작전에서 번번이 "북로군"에게 패하거나 기습공격을 당하자, 결국 "일본군"192010월 초, 독립군 소탕을 위한 간도 출병을 결정, 작전을 개시했다"홍범도의 일지"에 의하면, 이 전투에 3명의 "소련 적군(赤軍)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일 시 : 1920.06.06.~ 06.0706.20

장 소 : 함북 종성군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봉오동(鳳梧洞)안산고려령삼도구

지휘관 : 대한군북로독군부 - 홍범도최진동(일명 최명록)강상모안무)ㆍ신민단 - 이흥수한경세

병 력 : 독립군 약 1,280~1,300명  (대한군북로독군부 1220~30신민단 60) /  일본군 약 490~ 500

피 해 : 독립군- 전사(4)부상(2)민간인 사망(9) / 일본군- 전사(157)부상(300)중상(200)경상 (100)

결 과 : 연합군(대한군북로독군부신민단) 독립군의 승리)ㆍ독립군 연합부대가 승리를 거두어, 독립군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만주의 의병조직의 확대참가자 증가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중국에 본격 침투를 계획한 일본은 "훈춘 사건(琿春 事件)"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만든다.

봉오동 전투

2. 1920.10 : 청산리 대첩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10.21~ 26일까지, 1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완루구어랑촌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간도 왕청현~ 백두산 산록" 사이에서 벌어진 10여 회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북로군정서(김좌진)대한독립군(홍범도)군무도독부군(최진동)신민단" 등이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 함께 싸웠으며,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관내 청산리"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간도" 출병한 "일본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연합부대"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특히 눈부셨다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으며,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2연대장 김좌진, 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 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삼둔자 전투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일 시 : 1920.10.21~ 28

장 소 :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관내 : 허룽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골짜기

지휘관 : 대한군북로독군부 - 홍범도최진동(일명 최명록)강상모안무 /  북로군정서군(김좌진 서일사령관김규식 대대장나중소 참모장이범석 연성대장) 대한독립군(홍범도)군무도독부군(최진동)국민회군(안무)의민단(허근강창대방위룡김연군)신민단(김준근박승길양정하)

병 력 : 독립군 약 3,050~ 4,700(북로 군정서군(700~800)대한 독립군(300~1400)신민단(1,100)국민회군(200~250)한민회(200~500)대한광복단(200)의민단(200)의군부(150)군무 도독부) / 일본군 약 30,000~ 35,000

피 해 : 독립군 - 전사(60)부상(90) / 일본군 - 불명

결 과 : 대한 독립군의 승리경신참변(庚申慘變) 발생의 계기

청산리 대첩

3.  1920.10 : 간도 참변 (間島慘變ㆍ간도학살 사건ㆍ경신 참변 (庚申慘變)ㆍ훈춘사건ㆍ혼춘참변 (琿春慘變))

1919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군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20, "일본군"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재만 한인"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ㆍ1920, 일본 제국이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으로,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북"에 주둔하는 "나남사단(21사단)" 1개 연대를 출동해서, "훈춘" 입성해, 주변의 한인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일 시 : 1920.10.02. / 청산리 전투(10.21~28) 이후 3~ 4개월

 장 소 : 혼춘 (琿春)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

 관 련 : 중국 마적 장하오(張江好창장하오) 400여 명 마적 일본군 병력 -  2만 명

 피 해 : "만주"에 있는 조선인 1~ 3만여 명을 학살민가 2,500학교 30여 개가 불에 탔다 확인된 것으로, 10.09~11.05일까지(27일간)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은 3,693명으로 "혼춘현(242)연길현(1,124)화룡현(572)왕청현(347)영안현(17)서간도지방 (804)"에 달하였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적어도 3만여 명에 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10.02일 상오 5, "일본"에 매수된 "중국 마적 장하오(張江好창장하오)"400여 명의 "마적"을 인솔하여, 야포 3문을 앞세우고 "혼춘"을 공격하였다. 당시 "혼춘"에는 "일본 총영사관 경찰총독부 파견경찰대함북경찰대"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그러나 "마적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혼춘성" 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이때 마적들에게 중국인 병사 70여 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하였고, 일본인 9명도 피살되었다뿐만 아니라, 미리 피신하여 빈집이 된 "일본 총영사관"도 소각되었다.

이와 같은 "혼춘사변"을 야기한 "일본"은 재만 일본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주둔군 19/20사단시베리아 출병군 제11/13/14사단만주파견군관동군" 등에서 총 2만 명의 병력을 "만주"로 투입하였다그런데 10.16, "중국정부"가 거세게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에 대한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독립군소탕작전은 실패가 예상된 것이었다"청산리 전투" 패전 후,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독립군""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안전지대(산속중소 국경지대)로 피신하였고, 이에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1920.10.21.~ 28일까지, "독립군" 추격하던 "일본군"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서 한국독립군에게 완패하였으며, 그 뒤 "독립군"들은 "소만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 국인"에 대하여, 무차별 학살을 단행하였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만주"에 있는 조선인 1~ 3만여 명을 학살민가 2,500학교 30여 개가 불에 탔다확인된 것으로, 10.09~11.05일까지(27일간)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은 3,693명으로 "혼춘현(242)연길현(1,124)화룡현(572)왕청현(347)영안현(17)서간도지방 (804)"에 달하였다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적어도 3만여 명에 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일본군"은 약 2달 간 "독립군 근거지"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간도참변간도학살사건"이다그리고 "일본군""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4. 1920.12 : 대한독립군단 ( 서일)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로, "청산리 전투(1920.10)봉오동 전투(1920.06)" 등의 패배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세력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1920.12"·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중국 흑룡강성 계서시(鷄西市)에 위치한 항일 투쟁지)"에서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연합부대"이다.

< 연합에 참여한 부대 (1920.12밀산) >

북로군정서 (서일김좌진) 대한독립군 (홍범도) 서로군정서 (지청천) 대한국민회 (구춘선이명순) 대한신민단 (김규면): 대한독립군단에 합류 못함

의군부 (이범윤) + 군비단 (의군부 잔여부대김홍일 광복단 (이범윤): "단장 이범윤"은 상징적 인물이었으며, "중부대판(中部大辦)"의 직함을 가졌던 "김성륜"""의 실제 책임을 맡았다.

혈성단(김국초) 군무도독부(최진동) 야단(아소래) 대한정의군정사(이규) 의민단(방우룡)

※ 서일 (徐一ㆍ서기학(徐夔學)ㆍ1881~1921ㆍ40세ㆍ호- 백포(白圃)ㆍ함북 경원군 출생) :독립 운동가 1902"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 망명했다. 1911년경,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1919, "김좌진"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1919"31운동" 이후, "중광단""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 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

"대한정의단대한군정회""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김좌진이범석""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총재"를 맡았다1921,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06.28"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2달 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5. 1921.06 :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黑河事變)

독립 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소련 영토인 "스바보드니(이만연해주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사살한 사건으로 "고려 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상해 파" 간의 정면 대결로 발생한 것이다"사할린 의용군(이항군)""볼셰비키 군(임시 고려군정회자유대대)"의 포위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상하이 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간도 참변" 이후, "간도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해 온 4,000여 명의 독립군 부대들이 "자유시" 집결하였고,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휘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자유시 집결 목적 :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 전개하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

지도부는 "고려혁명군대한의용군"2개 세력으로 나뉘어, 군권을 놓고 대립하였는데, "고려혁명군"측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소련군"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대한의용군"의 무장 해제를 결정하였다"고려혁명군""소련 적색군"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를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가하였다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당시 12개 조직"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2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당시 "이범석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김좌진""이만 시"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일 시 : 1921.06.27     주 체 : 상하이 파 공산당대한의용군(대한독립군단 소속)사할린 의용군이항군 /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고려혁명군(임시 고려군정회)자유대대 + 소련군(볼셰비키 군)

피 해 : "독립군 960"이 전사하였으며,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대한독립군단 총 병력은 3,500여 명, 독립군단- 12, 한인의병대- 8, 20여개 "대한의용군" 2,000여 명 가운데, 100명이 사망하고, 800여 명이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는 이곳을 탈출하여,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결 과 :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 군대 중, "자유대대이항군"사이에 "독립군 통수권" 둘러싼 갈등으로 일어났다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연해주 지역" 조선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와해궤멸되었다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적군에 모두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여기서 살아남은 "독립군", 대부분이 "상하이 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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