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된 "간도 특설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ㆍ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ㆍ동북항일연군ㆍ조선의용대ㆍ대한독립군단(만주 북서부"에 잔존)"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부대"로, 독립운동ㆍ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 1922 : 통의부 (대한통의부)→ 의견불화
• 복벽주의 계열 : 전덕원 (최익현 휘하의 소모장 (召募將) 출신ㆍ대한독립군단 간부) → 1923.02ㆍ의군부 (義軍府) 결성→ 통의부에 압도ㆍ참의부로 편입
• 공화주의 계열 : 양기탁 (애국계몽운동ㆍ독립군 단체의 통일운동 전개)→ 정의부로 편입
"대한통의부 (統義府ㆍ통의부)"는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단체ㆍ군정부(軍政府)ㆍ자치조직"이다. 1922년, "남만지역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해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청산리대첩"을 거두었던 독립군 주력부대는 "밀산(密山)"을 거쳐,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이동하였다. 이 사이 남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서로군정서ㆍ광복군총영ㆍ광한단ㆍ광정단ㆍ한교공회ㆍ의성단"등은 "일제 침략기관 공격ㆍ부일배 응징"에 진력하고 있었다. 또한 "장백현(長白縣)"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비단ㆍ광복단ㆍ흥업단ㆍ대진단ㆍ태극단" 등의 독립군 단체들은 1921.10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결성하였다.
"경신참변(1920.10)ㆍ자유시참변(1921.06)" 이래, 소강상태에 있던 "남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은 강력한 연합의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1922.02월, 독립군 단체대표들이 "환인현(桓仁縣)"에 모여, "남만한족 통일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조직을 해체하고, 통합 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 참여 > 한족회 일부 • 서로군정서 • 대한독립단 • 광한단 : 서로군정서 유격부대 • 광복군 총영 • 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 • 보합단(輔合團)
초기 조직은 "총장제(總長制)"로, "총장(채상덕)ㆍ사령관(김창환ㆍ서로군정서 총사령관))이 선임되었다. 결성 목적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전개하는 것 뿐 아니라, 재만 한인사회(在滿韓人社會)의 자치행정을 담당하는 "행정부"의 기능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2. 1924 : (3부 설립) 참의부(1924.06)ㆍ정의부(1924.11)ㆍ신민부(1925.3)
① 육군 주만 참의부 (參議府) : 1924.06~ 1929.10월까지 활동한 무장독립운동단체
참의장 : 백광운 → 최석순 → 윤세용 → 김승학 / 관전현(寬甸縣)ㆍ집안현(輯安縣)ㆍ환인현(桓仁縣)ㆍ통화현(通化縣) 등 4개 지역 관할
"압록강 대안지역"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하게 펼쳤던 만큼 한편으로는 일제 군경의 공격 대상으로 피해가 컸다. "남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기관으로 출범한 "대한통의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통의부ㆍ의군부" 간의 대립 속에서도 중립을 지키며,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통의부 의용군"의 1ㆍ 2ㆍ3ㆍ5중대는 양부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자, "임시정부 직할부대 창설"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만주"에 있는 모든 항일독립군사단체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고, "만주"지역 독립 운동가들이 "상하이"로 파견되어 "임시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하여, "광복군 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군 조직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임정"으로부터 "김승학ㆍ이유필"이 파견되어, 1924.06.26일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무장 항일단체로서 "관전현(寬甸縣) 대우구(大牛溝)"를 본부로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었다.
② 정의부 (正義府ㆍ의장 김동삼) : 1924.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
"김동삼ㆍ양기탁ㆍ지청천"등이 "봉천성ㆍ길림성" 등 "남만주" 지역 일대를 거점으로 창설하였다. 처음에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 두고, "참의부의 관할권(관전ㆍ집안ㆍ환인ㆍ통화 등 4현)을 제외한 지역에 12개 "지방 총관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ㆍ길림의 대차ㆍ신안둔ㆍ대강자ㆍ반석"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 경에는 17개 "지방 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ㆍ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ㆍ87,000여 명을 관할하였다.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대두된 가운데, 1923.01월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임시정부"가 불신을 받는 가운데, "창조파ㆍ개조파"가 대립하다가 회의가 결국 결렬되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ㆍ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07월과 09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가 열렸다. 그 결과로 1924.11월 "남만"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③ 신민부 (新民府ㆍ의장 이범윤ㆍ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 : 1925.01월 "이범윤ㆍ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북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결성한 군정부
관할지역은 "북만 흑룡강성 일대" 16개 지역 (동빈현ㆍ주하현 오길밀ㆍ임강현 위사하ㆍ구강포ㆍ왕청현 석두하ㆍ해림현ㆍ목단강ㆍ관남현 신안진ㆍ오상현 사하자ㆍ사사도ㆍ마도석ㆍ길림현 구참ㆍ목릉현 소추풍ㆍ동녕현ㆍ왕청현 양수천자(凉水泉子) 등)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ㆍ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07월과 09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가 열렸다. 그 결과로 1924.11월 "남만"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북만"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1925.01월 "북만주 목릉현"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한 결과, 03.10일 "영안현 영안성"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게 되었다.
< 참여 > 북만 16개 지역의 민선대표(民選代表)ㆍ10개의 국내 단체의 대표 • 대한독립군단 : 김좌진ㆍ남성극ㆍ최호ㆍ박두희ㆍ유현(劉賢) 등 • 대한독립군정서 : 조성환ㆍ김혁ㆍ정신 • 중동선교육회 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신민부 조직"에서 "대한독립군단"이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김좌진" 계열의 "북로군정서" 출신들과 "대한독립군정서" 역시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결국 "신민부 조직"은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3. 1925 : 미쓰야 협약(三矢協約)
미쓰야 미야마쓰(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와 장쭤린(장작림ㆍ중화민국 둥베이(만주)의 군벌)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협약, 이 협약으로 만주 내 항일 독립운동이 크게 탄압되어 위축되었다.
4. 1928 : 3부 통합운동 (한ㆍ중 연합작전)
(통합) 혁신의회(1928.12)→ 한국독립당(1930.07)→ 한국독립군(1930.07) :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쌍성보ㆍ사도하자ㆍ대전자령 전투)
(통합) 국민부 (1929.04)→ 조선혁명군(1929.05)→ 조선혁명당(1929.09) :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영릉가ㆍ흥경성 전투)
※ 지청천 (池靑天ㆍ1888~1957ㆍ향년 68세) : 독립운동가(만주)ㆍ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ㆍ친 이승만계 정당(대한국민당ㆍ자유당) 활동ㆍ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유일한 정규 "육군사관학교" 졸업자ㆍ중위 때 망명)ㆍ서로군정서 간부ㆍ대한독립군단 조직(서일ㆍ홍범도ㆍ김규식ㆍ김좌진 등)ㆍ고려혁명군 결성(이범석 등)ㆍ대동 청년단 단장ㆍ초대 무임소장관ㆍ국회의원(1대ㆍ2대- 대동청년단ㆍ민주국민당)
※ 양세봉 (梁世奉ㆍ1896~1934ㆍ향년 38세)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ㆍ독립 운동가(민족주의 계)ㆍ만주지역 한중 항일 연합군 결성ㆍ1920~ 1930년대 초반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 수많은 국내 "진공작전"과 "만주"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 "북한 애국열사릉ㆍ남한의 애국지사 묘역"에 동시에 안장돼 있다.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맹활약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크게 감명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5. 1932~1945 : 만주사변 직후, 설립된 만주국
지청천→ 1933년 중국 본토로 건너와,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됨ㆍ양세봉→ 1934년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 박창해가 사주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
※ 만주국 (滿洲國) : 일본제국이 "만주사변(1931.09월)"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ㆍ1931년,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하였고, 1932.03.01.일 "선통제 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를 황제로 내세웠다.
6. 1931 : 만주사변ㆍ9ㆍ18사변ㆍ1931.09.18~1932.02.18ㆍ15년 전쟁의 시작
1931.09.18일, 일본 제국이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ㆍ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룬다.
• 일 시 : 1931.09.18~1932.02.18 • 장 소 : 만주ㆍ중국 • 결 과 : 일본 승리
• 교 전 : 중화민국(국민혁명군) - 일본제국 육군
• 지 휘 : 중화민국- 장쉐량ㆍ마잔산ㆍ펑잔하이 - 병력 : 160,000명 / 일본제국- 혼조 시게루ㆍ미나미 지로 - 병력 : 30,000~ 66,000명
< 요 약 >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 일본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싸우던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 일본 지원)"에게 퇴각 권고→ "관동군" 일부 참모가 반발하여, "장쭤린" 암살(1928)→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 종결→ "장쉐량("장쭤린" 아들) "국민당 정부(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합류(1929)→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에 타격→ 만주 전체 침략을 위해 "만보산 사건(1931.07)", 자작극 "류타오후 사건(1931.09) 발생→ "동삼성"전역 점령(1932.01)→ "만주국(괴뢰정권)"(1932.03)→ 국제연맹 비난탈퇴→ 국제연맹 탈퇴 → "중일전쟁(1937.07.07~ 1945.09.02)→ 제2차 세계대전(1939.09.01~ 1945.09.02)
7. 1937 : 보천보 전투ㆍ제2 동흥사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사회주의 계열ㆍ후에 북한지도부→ 1941년, 소련 영내로 이동→ 제88 특별 여단 (교도 여단)에 편입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ㆍ최현 부대"와 "조국광복회"의 "박달ㆍ박금철 부대" 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습격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한국의 일부 지역이 "일제"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 일 시 : 1937.06.04.~05 • 장 소 :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보천보ㆍ현,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
• 결 과 : "조국광복회"의 조직 궤멸 위기→ 혜산사건(惠山事件)ㆍ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 교 전 :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김일성ㆍ최현 부대)ㆍ조국광복회(박달ㆍ박금철 부대) • 피 해 : 동북항일연군ㆍ조국광복회- 25명 사망ㆍ30명 부상 / 일본 경찰추격대 - 7명 사망ㆍ14명 부상
8. 1938 : 조선의용대 창설 (우한)
"의용대"는 전투부대가 아니었는데, 한국어ㆍ중국어ㆍ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전공작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
1942 : 조선 의용군에 합류 (옌안ㆍ화북지대) + 팔로군(공산당ㆍ마오쩌둥) → 조선 의용군(병력 8,000~ 10,000명ㆍ독립군 중 최고부대) / 1942 : 한국 광복군에 합류 (충칭) + 국민당(장제스) → 한국 광복군(병력 800명)
• 설립일 : 1938.10.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1941
• 성 격 :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 "제1지대ㆍ제2지대"로 나눠서 활동
• 주 도 : 김원봉(대장)ㆍ조선민족혁명당 주도- 최창익(공산주의자)
• 단 원 :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 김원봉ㆍ최창익ㆍ김성숙ㆍ유자명 / 최고기관(지도위원회): 이춘암ㆍ최창익ㆍ김성숙ㆍ유자명ㆍ기타 정치부원 2인 / 제1지대 : "박효삼 대장" 외,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 / 제2지대 : "이익성 대장" 외, "전위동맹" 중심의 74명
9. 1938 : 간도특설대 창설 (동북항일연군 탄압)→ 옌안 (화북지대)까지 공격 → 조선 의용군ㆍ팔로군 공격
"간도 특설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ㆍ동북항일연군ㆍ조선의용대ㆍ대한독립군단(만주 북서부"에 잔존)"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부대"로, 독립운동ㆍ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1939~1943)"과 "열하성ㆍ하북성"에서 "팔로군"과의 전투(1944~1945)를 수행했다.
• 일 시 : 1938.12.01~1945 (108회 출동) • 소 속 : 만주국 육군 • 본 부 : 젠다오 성 (간도 성 - 연변지역)
• 창립 취지 : "만주사변(1931)ㆍ중일전쟁(1937)" 이후, 필요성 절감ㆍ이이제이 (以夷制夷):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인들이 잡아야 한다. (선발 기준 : "선" 지원, 검증 후, 대원으로 선발)
• 대원 구성 : 대대 급 특수부대ㆍ800여 명 (대장- 일본인외, 나머지 대원- 전부 조선인) - 조선인 대원 : 김백일(5기ㆍ김찬규)ㆍ백선엽(9기)ㆍ송석하ㆍ강재호ㆍ김석범ㆍ신현준ㆍ이용ㆍ임충식ㆍ 윤춘근ㆍ박창암ㆍ마동악ㆍ최남근
• 역 할 : 항일 조직 토벌 전문타격대ㆍ토벌 대상(동북항일연군 (양정우 지휘)ㆍ조선인ㆍ한족)ㆍ"연변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9~1943 :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과 전투 수행→ 172명 살해 / 1944~ 1945 : "열하성ㆍ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 수행→ 103명 살해ㆍ62명 체포
10. 1924 : 국공 합작 (國共合作): 중국 국민당(장제스)ㆍ공산당(마오쩌둥) 사이의 연합
① 제1차 : 1924.01~ 1927.07월 : 국민당(장제스)ㆍ공산당(마오쩌둥)이 군벌타도를 위해 협력 → "공산당"이 독자적인 군대가 없이,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합작을 결정하고,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는 것
② 제2차 : 1937.09~ 1945.08월 : 일본과 싸우자 → 자신의 무력을 갖추게 된 "공산당"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국민당"과 대등하게 합작했다는 것
③ 제3차 : 제의 →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 국민정부"를 향해, 평화적 통일을 위한 "3차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11. 1927 : 국공 내전 (國共内戰) : 중국 국민당ㆍ공산당 (해방전쟁) 사이의 내전
① 제1차 : 1927.07~1936ㆍ중국 공산당 공농홍군 (약 8만6천명) : 지휘관 - 모택동 / 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 (약 70만 명) : 지휘관 - 장개석 → 결과 : "5차 공격"을 견디지 못한 "공산당 홍군 (紅軍)"이 "대장정 (大長征ㆍ1934.10~ 1935.11)"ㆍ15,000 km에 달하는 중국 공산군 (홍군 (紅軍))의 역사적 대 행군 (1934.10.15~1935.11)ㆍ10만 명 이상 출발 (1만 명 생존ㆍ생존율은 고작 10 %)→ 홍군의 옌안 정착 성공
② 제2차 : 1946~1949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옮기게 되는 계기) → 결과 :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ㆍ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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