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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무관학교 ① 황푸ㆍ봉천ㆍ만주ㆍ신흥ㆍ일본 육사

by 당대 제일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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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6월, "중국 국민당"에 의해, "황푸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ㆍ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쑨원"은 스스로의 "혁명군"을 조직하기 위해, "소련"의 조언을 받아, "소련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떠서 학교 체제를 편성하였다.

 

1.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 신흥강습소 → 신흥무관학교 → 경희대학교 전신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ㆍ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19년 "3ㆍ1운동"이후, "조선" 젊은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자, 다시 "류하현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 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산리 전투"로 "신흥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 의용대ㆍ조선혁명군ㆍ대한독립군ㆍ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등에 참여 /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 "중학교 과정ㆍ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 설립자 : 1911년 "이상룡 (설립자ㆍ초대 교장)"을 주축으로, "이동녕ㆍ이회영/ 이시영 형제ㆍ윤기섭ㆍ김형선ㆍ이장녕ㆍ이장직"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 설 립 : 1911.06.10일 "서간도(길림성 류하현) 추가가 대고산" 아래,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로 개교→ 1919.05.03일 "3ㆍ1운동"이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

• 목 적 : 독립군 양성      • 위 치 : 서간도 (길림성)      • 교 관 : 이범석ㆍ지청천ㆍ신팔균 등

• 졸업생 : 김원봉(의열단 단장)ㆍ19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 배 경 : "을사조약" 체결 전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작전을 도입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ㆍ연해주"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1910년대, "러시아ㆍ만주"의 국경지역인 "흥개호 부근 봉밀산ㆍ북간도 왕천현의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고, 독립운동 단체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북간도"의 "간민회" 등이 있었으며,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으로 설립하였고,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 군관학교 (軍官學校)

① 육군무관학교 (陸軍武官學校)ㆍ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ㆍ한국 육군무관학교

• 설 립 : 1896.01월 설치ㆍ"아관파천"으로 인해, 불과 5명의 졸업생만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 재설립 : 1898년 (대한제국 수립 이듬해), 신식장교를 양성을 위해, 재설립 → 해산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09년에 폐지

• 목 적 :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 양성             • 위 치 : 한성

• 졸업생 : 282명 졸업, 이 중 14명이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

김좌진 : 청산리 대첩 당시 지휘관 (1905년 입학)ㆍ지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재학 중, 일본 유학)ㆍ신규식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ㆍ박승환 : 황실근위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 (육군 참령)ㆍ신팔균 :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ㆍ이장녕 :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② 황푸 군관학교 (黃埔軍官學校)ㆍ황포군관학교ㆍ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

• 설 립 : 1924.06월~ 1927 (중국 국민당이 설립)  학교 설립 의식 때, "쑨원"의 연설문이 나중에 "중화민국 국가 가사"가 되었다. "쑨원"은 스스로의 "혁명군"을 조직하기 위해, "소련"의 조언을 받아, "소련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떠서 학교 체제를 편성하였고, "소련의 군사 고문단" 등이 와서 강의"쑨원" 사후, 국민당 정권을 잡은 "장제스"에 의해, 점차 우경화하여, 1927년 "국공합작" 결렬로 해체

• 목 적 :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          • 위 치 : 황푸 (광둥 성 광저우)

• 초대 교장 (장제스)ㆍ정치부 교관 (저우언라이ㆍ왕징웨이(왕정위))ㆍ교관 (네룽전ㆍ예젠잉)

• 졸업생 : 중일전쟁ㆍ국민당-공산당 내전기간, 중국의 수많은 장군ㆍ군사 지도자 배출한 학교ㆍ3년간 약 7,000명 (6기)ㆍ한국 독립운동가(출신 교관ㆍ졸업생)- 김원봉ㆍ최원봉ㆍ오성륜 등

③ 봉천 군관학교ㆍ펑톈 군관학교ㆍ만주국 중앙 육군 훈련처 → 만주국(신징) 육군군관학교의 전신

• 설 립 : 1932~ 1939, 9기생을 끝으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해체

• 목 적 : 만주국 육군의 장교 양성       ㆍ2년제 군관학교       • 위 치 : 펑톈(선양시ㆍ중국 랴오닝

• 졸업생 : 조선인은 4기생부터 입학할 수 있었다.  5기 : 정일권(육군 대장ㆍ국무총리)ㆍ김백일(육군 중장)ㆍ송석하(육군 소장)ㆍ김일환(육군 중장ㆍ교통부장관)ㆍ김석범(해병 중장)ㆍ신현준(해병 중장)  /  6기 : 양국진(육군 중장)  / 8기 : 석주암(육군 소장)  /  9기 : 백선엽(육군 대장ㆍ교통부장관)

④ 만주 군관학교ㆍ만주국 육군군관학교 (滿洲國 陸軍軍官學校)ㆍ신징 군관학교

• 설 립 : 1939~ 1945, 7기생을 끝으로,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해체ㆍ1939년, "신징(만주국 수도)"에 설치 향후, 시설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 기술학교"로 사용

• 목 적 : 만주국 육군의 장교 양성ㆍ4년제 군관학교        • 위 치 : 신징(만주국 수도)

• 졸업생 : 만주계ㆍ일본계(일본ㆍ점령지인 조선 출신ㆍ타이완 출신) / 제1기 입학생 중, 일본계는 172명  / 1기 : 김동하(해병대 중장)ㆍ박임항(육군 중장ㆍ건설부장관)ㆍ방원철(육군 대령)ㆍ윤태일(육군 중장ㆍ국회의원)ㆍ이기건(육군 준장)ㆍ이주일(육군 대장ㆍ감사원장) / 2기 : 박정희(육군 대장ㆍ대통령)ㆍ이한림(육군 중장) / 3기 : 최주종(육군 소장) 5기 : 강문봉(육군 중장ㆍ국회의원) 6기 : 김윤근(해병대 장군)

⑤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陸軍士官学校ㆍImperial Japanese Army Academy)

• 설 립 : 1868년(메이지 1)ㆍ교토에 설치ㆍ병 학교(兵學校, 훗날 병 학소(兵學所)로 개칭) → 1869년(메이지 2)ㆍ오사카로 이전ㆍ병 학료(兵學寮)→ 1871년(메이지 4)ㆍ도쿄로 이전

• 목 적 : 일본제국 육군의 병과 장교ㆍ병을 양성          • 위 치 : 도쿄

• 졸업생(사관후보생) : 11기(1889) - 김의선(대한제국 참령ㆍ임시정부 국무차장) / 15기(1903) - 류동렬(대한제국 참령ㆍ임시정부 참모총장)  / 23기(1911) - 김광서(독립운동ㆍ일본육사 최우등 졸업ㆍ1기 김일성 장군으로 추정) / 26기(1914) - 지청천(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  (육사 본과) : 55기(1941) - 정일권(국무총리ㆍ육군대장) /  56기(1942) - 이형근(육군대장) /  57기(1944) - 박정희(대통령ㆍ육군대장)ㆍ이한림(육군대장)

 

3. 한 국

① 군사영어학교 (英語學校ㆍ1945) → 국방경비대(1946) → 국군의 모태(1950)

 설 립 : 1945.12.05.~ 1946.04.30    • 목 적 : 광복 후, "광복군ㆍ일본군ㆍ만주군" 출신 장교에게, "영어ㆍ미국식 군사훈련"을 6개월 정도 교육한 "국방경비대"의 군관학교이다.

 졸업생 : 1기(60명)은 주로 "일본 육사ㆍ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ㆍ평균 연령 23~24세 이상  /  1기 - 백선엽(육군 대장ㆍ교통부장관)  /  2기 - 정일권(육군 대장ㆍ국무총리)ㆍ이형근(육군 대장)  /  4기 - 김종오(육군 대장ㆍ육군참모총장) 5기 - 민기식(육군 대장ㆍ육군참모총장)  /  6기 - 장창국(육군 대장ㆍ합동참모회의 의장)  /  7기 - 김용배(육군 대장ㆍ육군참모총장)  /   8기 - 김계원(육군 대장ㆍ대통령 비서실장)

② 남조선 국방경비대 (南朝鮮 國防警備隊) → 한국 국군의 전신

<"군정법령"에 의거> 1946.06.15일, 국방경비대→ 조선경비대로 개칭 / 국방경비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

"국방경비대"는 "육군"을 직할하였고, "해안경비대"가 예하였다.  "항공대(공군 전신)"은 "조선경비대 육군" 예하에 있다가, 1949년에 "공군"으로 독립한다.

• 설 립 : 1946.01.15 (육군 창설 기념일)~ 1948.12.15 / "미군정"이 "1개 연대" 병력으로 창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으로 개편

• 광복 이후, "일본군ㆍ관동군ㆍ국민혁명군ㆍ팔로군ㆍ광복군" 출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조선 국군 준비대" 등 "사설군사 단체ㆍ유사군사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 1945.11월에는 그 수가 무려 60여 개를 헤아렸고, 난립을 막고, 정식 군대창설을 위해 "미군정"은 이들 단체에 대한 "해체령"을 내렸다. 창설 이후, 각 도에 "1개 연대씩 창설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늘려나갔다.  1946.01.15일, "태릉"에 있던 "구 일본군 지원병훈련소 시설"에서 "1연대 A중대(중대장 채병덕 정위)"의 187명으로 시작하여, 02.08일 "1연대"가 "대대 편성"을 완료했다.

• 지휘관 : 창설 당시, 50대의 "중견 급 군장교"로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던 "원로급 일본군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4~1915년에 졸업, 임관한 26~27기생들이었다. 

• 사령관 : 1946.09월, "하지 중장"이 조선인 "이형근"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 / 존 T.마샬( 육군 중령ㆍ1946.01~1946.02)→ 러셀 D.베로스(육군 대령ㆍ1946.02~1946.08)  → 이형근(사령관 대리ㆍ국방경비대 참령ㆍ1946.09~1946.12)  → 송호성(국방경비대 중령ㆍ1946.12~1948.11) → 이응준(1948.11~ 1948.12.15)

• 경비대 육군 사령관 : 원용덕(1946.01~1946.12)→ 송호성(1946.12~1948.11)→ 이응준(1948.11~ 1948.12)

 

4. 북 한

①  강건 종합군관학교 (姜健 綜合軍官學校)ㆍ김책 공군대학ㆍ김정숙 해군대학

정규 과정 학생들은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초급 지휘관"으로 임용되므로, 한국 "육군사관학교"와 기능상 거의 유사하다.

 설 립 : 1945년 개교한 "평양학원"  "군사교육 부문"이 따로 떨어져 나와, 1946년 "중앙보안간부학교"로 흡수된 것을 시작으로, "제1군관학교ㆍ강건 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55년부터 현재 명칭으로 불린다. 마지막 2번의 개칭은 "한국 전쟁" 중 전사한 당시 "강건(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이름을 딴 것이며, 이 학교의 교내에는 "강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목적 : 초급 지휘관 배출육군 장교 : 강건 종합군관학교공군 장교 : 김책 공군대학해군 장교 : 김정숙 해군대학

• 위 치 : 평양직할시 평양순안 국제공항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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