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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의열단 ① 의열단 (1919)ㆍ한인애국단 (1931)ㆍ조선의용대 (1938)

by 당대 제일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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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義烈團)"을 이끌던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과 "한인 애국단 (韓人愛國團)"을 이끌던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는 각각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1. 의열단 (義烈團)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설립일 : 1919.11.07~1924.01.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독립당     • 주 도 : "김원봉 (약산)"이 단장

• 성 격 :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 단 원 : 김원봉ㆍ윤세주ㆍ한봉근ㆍ한봉인ㆍ이성우ㆍ곽경ㆍ강세우ㆍ이종암ㆍ김상윤ㆍ신철휴ㆍ배동선ㆍ서상락ㆍ권준ㆍ이수택ㆍ이낙준

※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향년 60세) →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 : 혁명가ㆍ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의백)ㆍ조선의용대 총대장)ㆍ군인 (중화민국 육군 소위 (1927~1930))ㆍ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1941~1945)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1 대의원노동상국가검열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ㆍ일제 시기, 최고액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당시 현상금 100만원(현 333억 원)ㆍ김구 60만원(현 200억 원))

"의열단"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ㆍ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ㆍ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적 기관(5개소)파괴와 7악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적 기관(5개소)"는 "조선총독부ㆍ동양척식주식회사ㆍ매일신보사ㆍ경찰서ㆍ기타 주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ㆍ군 수뇌ㆍ타이완 총독ㆍ친일파 거물ㆍ밀정ㆍ반민족적 대지주ㆍ자본가"이다. 말하자면, "의열단"은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ㆍ착취ㆍ친일파들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① 주요 사건

1920.09.14 : "박재혁"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  12.27 : "최수봉" "밀양 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 투척   1921.09.12 : "김익상" "조선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투척, 폭발로 청사 일부가 파괴  1922.03.28 : "김익상이종암오성륜",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다나카 기이치(본 육군대장)" 암살하려다 체포 "오성륜"은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1943년 처형  1923.01.12 : "김상옥"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4.01.05 : "김지섭" "도쿄의 궁성 정문" ,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 1926.12.28 : "나석주" "동양척식 주식회사조선 식산은행" 습격

"의열 투쟁"은 1924.01.05일,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24.01.03.일, "니주바시 사건(일왕 궁성의 다리ㆍ일왕이 사는 궁성을 없애버리려 했다)"- "김지섭"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28년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 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1926년, 이후 많은 "의열 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 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② 공약 10조

•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 한다.

③ 조선혁명 선언 (의열단 선언)

1923년, "김원봉"은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신채호(단재)"를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글로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1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조선혁명 선언)"을 집필했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 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ㆍ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다. "의열 단원들"은 거사 후에 이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ㆍ암살ㆍ파괴ㆍ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제5장 마지막 문장>

④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기율 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축적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무장 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김원봉"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임시정부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다. 이후 "의열단"은 "임시 정부"의 한축이 되었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을 배격하던 "우파 계열의 김구"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2. 한인애국단 (韓人愛國團)

설립일 : 1931.10~1932.04       주 도 :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국무령ㆍ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성 격 :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 일본 왕에 폭탄투척

단 원 : 이봉창윤봉길유상근유진만이덕주최흥식 등

활 동 : 1932 : "이봉창""사쿠라다몬 사건""윤봉길""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투척 사건  1932 : "유상근이덕주"의 다롄 폭파 사건

① 창설

"임시 정부"에서 추진한 독립운동 중, 비밀공격 조직을 통한 "주요인물 제거를 목표"로 한 활동으로 조직한 것이 "한인애국단"이다"임시 정부" "국무령"이던 "김구"가 중심이 되어, "김석안공근이수봉이유필"이 간부로서, 조직을 운영하였다"한인애국단"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로서, 일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여, 일본의 국가 운영 체계나 대외침략을 좌절시키는 즉, 소수 지도자를 제거하여, 큰 성과를 올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독립운동의 비밀결사" 조직인 셈이다.

② 활동

1931년 말, "일왕"을 암살하기 위하여, "이봉창" 대원을 "동경"으로 비밀리에 잠입시켰다1932.01.08, "이봉창" "일왕 히로이토" "만주 괴로국 부의(傅義)"와 함께, "동경" 교외에서 관병식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쿠라다 문" 앞에 도달하자,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주변 사람만 피해를 주고, "일왕 살해"는 실패하였다"이봉창"은 그해 10월 사형에 처해졌다이 사건을 "국민일보(중국 국민당 기관지)" "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여 중국인을 놀라게 하였다이 사건으로 "일본군" "상하이 사변(상하이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1932.04.29, "윤봉길"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된 "전승기념 겸 천장절(天長節일왕 생일)" 기념식장에 잠입하여, 식이 거행되는 중, 단상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사령관대장)우에다(육군)노무라(해군 중장)시게미쓰(주중 공사)" 등 무려 7명을 현장에서 즉사 또는 중상을 입히는 거사를 하였다. "윤봉길" 역시 현장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중국"에서는 이를 보고, "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인 한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이 밖에도 1932.04, "이덕주유진만"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였고, "최흥식유상근" "다롄" 도착하는 "국제연맹 조사단원"을 마중 나온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주요 인물을 표적으로 하는 "암살계획"이 추진되고, 성공되는 사례가 발생하자 "일본"은 매우 긴장하게 되었다.

 

3. 조선의용대 (朝鮮義勇隊)ㆍ조선항일의용군ㆍ국제여단

"의용대"는 전투부대가 아니었는데,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전공작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

설립일 : 1938.10.10(중국 후베이성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1941

주 도 : 김원봉(대장)조선민족혁명당 주도- 최창익(공산주의자)

성 격 :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 "1지대2지대"로 나눠서 활동

단 원 :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 김원봉최창익김성숙유자명 / 최고기관(지도위원회): 이춘암최창익김성숙유자명기타 정치부원 2인  /  1지대 : "박효삼 대장" ,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 / 2지대 : "이익성 대장" , "전위동맹" 중심의 74

조선의용대

 창설

"중일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구나 김원봉"의 진영에 들어가, "국민당"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한인애국단의열단민족혁명당한국국민당" 등은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합의"에 의해 운영되기보다는 "김구나 김원봉"의 의사대로 운영되는 편이였다.

"박건웅""부분적비밀적단속적" 형태의 활동을 "전면적공개적지속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리하여 "박건웅""국민당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을 세우라고 요구하였다"나청(박건웅의 중국인 친구)""조선민족전선"에 기고하여, 중한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이는 "평등 합작""통일 지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혁명을 이끌고,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전면적 연합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공합작" , "공산주의들""팔로군"을 형성하였듯이, "조선 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오야마 가즈오(일본인 반전운동가)""조선의용대 조직계획 방안"을 작성하여, "장개석(군사위원회 위원장)주은래(부부장)장여생(부부장)강택(정치부 제2청장)하충한(정치부 비서장)봉생(국제문제연구소장)진성(정치부장)"의 동의를 얻어냈다"국민당 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1지대2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조선대만 반파시스트동맹""중앙 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그래서 "조선의용대""국제의용군"이라고 불렸다.

"의용대""전투부대"가 아니었다"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선전 업무)"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이것은 그들이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후에도 변치 않았고, 1945.08월에 가서야 "전투부대"로 재편성되었고, 1945년 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 규모가 커졌다"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조선의용대""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관할 하에 있는 "중국 부대"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였으므로, 그들은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② 활동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통일된 후원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국민당 정부군" 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중국" 측으로부터 지급받았다"조선의용대"는 큰 틀에서는 "한중 평등 합작"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개석"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인사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 혁명가들"로 판단했으며, 최전선에 이들을 배치했다1939.02, 7,000명의 "조선인 부대""광주"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교들"을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반란 징병자들이 "의용대"에 합류하였다.

③ 분 열 (최창익이 분열→ 화북 지방의 의용대 통제장악→ 연안파)

1940, "김원봉""조선의용대"에 소속된 "사회주의 독립투사들""김원봉""임정 합류"에 반발, 갈등을 빚었다1941, "의용대" 내에서,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최창익(공산주의자)""의용대""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고, "무정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 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이때부터 "조선의용대""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에, "연안파"로 일컬어진다"의용대""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1942.07"임시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군무부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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