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칠가살 (七可殺)"을 , 의열단은 "오파괴 (五破壞)"라는 것을 정해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1. 칠가살 (七可殺)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에 협조한 대가로 얻은 금전이나 직위를 이용해, 일신의 영달을 꾀해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족적 공분을 사서, 민족 지사들에 의해 처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과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02.05일자 1면에서 "칠가살(七可殺)"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는 항일 민족진영에서 "마땅히 죽여야 할 7가지 대상"으로 정한 것이다. "김구"가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ㆍ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모두 이 일환으로 도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적의 수괴 ② 매국적 (賣國賊) : 매국노 ③ 고등경찰ㆍ형사ㆍ밀고자 ④ 친일 부호 ⑤ 총독부 관리 ⑥ 불량배 ⑦ 모반자 (謀反者)
이들 가운데 "적의 수괴"는 "조선총독ㆍ정무총감ㆍ도지사ㆍ경찰서장" 등 고관 가운데 "일본인"들을 말한다. 그밖에 "매국적(매국노)"를 비롯해 "고등경찰ㆍ밀정ㆍ친일부호ㆍ총독부 관리ㆍ불량배ㆍ모반자" 등은 전부 "조선인"들이 그 대상이다.
"불량배ㆍ모반자"가 여기에 포함된 것은 다소 의아하게 여길 수 있는데, 설명을 보태자면 이렇다. 1920년대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지역의 토호들을 찾아가 기부를 요구한 사례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불량배" 가운데 독립군을 사칭해 강도짓을 하다가 "일경"에 적발된 경우가 발생해, 민족진영의 이미지와 "군자금 모금활동" 등에 적잖은 타격을 주기도 했다.
망명지에서 풍찬 노숙하는 "항일투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이들을 빙자해 강도짓을 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도 있었다. 1920년대 당시, 국내신문에는 "짝퉁 독립군"들의 강도 행각 기사가 심심찮게 실렸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이런 강도들을 "시국(時局) 표방 강도"라고 불렀다. 1921~1929년 사이에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가운데 "시국 표방 강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기사가 무려 106건이나 된다. "시국 표방 강도"가 급증하자 급기야 "총독부"는 특별 단속법 제정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밖에 중요한 비밀을 누설하거나 동지를 배반한 자도 "불량배"에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모반자(謀反者)"란 어떤 부류의 자들을 말할까? "독립신문"의 실린 내용에 따르면, "독립운동"에 가담키로 해놓고서 도중에 변절하여 역으로 민족진영에 해를 끼친 자를 말한다.
일제통치 35년 동안에, 특히 말기로 가면서 민족진영 인사 가운데 "변절자"가 적지 않게 속출하였다. 심지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변절자"가 나왔으며, 평소 지사(志士)로 추앙받던 인물 가운데 지조를 버린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밖에도 "사당(私黨)"을 만들어 민족진영에 장해가 된 자도 "모반자"에 포함돼 있는데, 이들 역시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다.
2. 칠가살 (七可殺) : 의열단
한편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義烈團)"에서도 창단 초기부터 "칠가살(七可殺)"을 규정했었다. "의열단"에서 규정한 "칠가살"은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일본인 고관) ④ 매국적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 (土豪劣紳ㆍ악덕 지주)
"임시정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불량배ㆍ모반자"가 빠지고, "대만 총독ㆍ반민족적 토호"가 대신 들어간 셈이다. "대만 총독"이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이나, 그 역시 "일본인 고관"이라는 점에서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3. 오파괴 (五破壞) : 의열단
"의열단"은 "칠가살" 이외에도 "오파괴(五破壞)"를 별도로 정해, "일제의 주요통치 기관 파괴공작"에 나섰다. 그 대상은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주요기관
• 1909년 : 이재명 의사 -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힘.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 병원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 1920년 : 박재혁 의사 -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 1921년 : 김익상 의사 - 당시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에 폭탄 투척
• 1923년 : 김상옥 의사 -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 1926년 : 나석주 의사 - 일제 경제침략의 본산인 "동양척식회사ㆍ조선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 폭탄 투척 후, 일경과 대치하던 중, 총으로 자결을 시도하다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고등계 미와 와사부로 경부"에게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사망
< 일제 식민지인 조선ㆍ대만의 최고통치자였던 "총독"에 대한 처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
• 1919년 : 강우규 의사 - 1919.09월, "제5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사이토 마코토"는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내리다가 "강우규" 등의 폭탄습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64세)
• 1928년 : 조명하 의사 - "대만 총독"을 처단하려고, "대만"으로 건너갔다가, "타이완"을 방문 중이던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ㆍ일본 육군 대장)"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집어던져,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쳤고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는 이 일의 책임으로 사임되었고, "구니히코 왕"은 이듬해 1월 단검의 독이 온몸에 퍼져 사망하였다). 24세로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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