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ㆍ163cm)"은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 두목"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다가 "국제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는데,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해 월남하는 데 성공→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 논란ㆍ의혹
① 공산주의자 논란
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으나, 민필호와 장준하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평소 김원봉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필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장준하는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지적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은 광복군 제1지대 시절에 이미 공산당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고 했다.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정내 보수세력인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② 일본군 출신 이간질 논란
일본학도병 출신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영, 중국군으로 합류, 한국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 헛된 약속으로 허풍을 떨었다"며, 김원봉이 자신들을 영입하려는 노력에 대해 "우리들의 중경행을 막으려는 수작을 부렸다."고 비판했다. "장준하" 일행이 거절하자, 그는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그가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서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 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고 진술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라며, 그가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한 것의 진심조차 의심했다.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③ 정말 골수 사회주의자며, 한국을 저버리고, 월북한 변절자인가?
그가 세운 "의열단 강령"이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업을 국유화해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켜, 평등의 경제제도를 확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가 명백한 사회주의자였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사회주의가 민족해방운동과 결합되던 당시 정세를 읽은 그는 우리민족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새로운 혁명의 방식의 하나로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중국 내 독립운동 당시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의견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역만리 타국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국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면, 좌우이념을 넘나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1명의 독립 운동가였을 뿐이다.
"자발적 월북자"이기에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서훈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도 아쉬움이 남는다. 독립운동시절 그의 비서였던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수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즉,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여운형"의 피살 이후 친일파와 정치깡패들의 위협이 날로 더해갔고, 때문에 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강제적으로 월북하게 된 그의 상황과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채 그를 무조건 자발적 월북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논리가 아닐까?
2. 사상ㆍ노선
"의열단 단장"일 때, 그는 "독립운동에는 좌파와 우파가 합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1925년, 동아일보 사설에 "합치되는 두 운동"이라고 실은 내용에,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을 썼다.
"우리 운동선상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2가지 풍조가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일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한 문자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간단히 말하면, 우리 조선 사람의 처지로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락과 합동이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번영 자유평등을 위하여 분투노력한다는 그 실질문제에서 2가지 운동이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하나는 형식이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계급의 투쟁으로 나타난다하여 2가지 운동의 차이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중략) 즉, 이 2가지가 조선에서는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1945.0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소위 계급의 "황용주 (MBC사장)"는 그와 오랜 시간동안 얘기를 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 김삼웅(독립기념관장)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인 김원봉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시켰을 개연성이 크다.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3. 불행한 가족사
1번째 부인 최씨는 "평안도 출신" 여성이었고, 2번째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ㆍ관절염 등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김두봉"은 "박차정"의 외당숙이었다. 친분관계가 있던 "김두봉"은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사위"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분관계는 그가 재혼한 뒤에도 이어졌다. 이어, 3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생)"이고, 2째는 "김철근(1947생)"이다. 북에 "최동선"이 낳은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남쪽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빨갱이 집안"이라며, 손가락질 받았다. 특히 한국전쟁 때, 그의 형제 4명ㆍ사촌동생 5명이 월북한 "김원봉"처럼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밀양"의 한 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는데, "김봉철(1918~1986)"은 당시 생존하였다. 아버지는 간신히 총살은 면했지만,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전쟁 통에 굶어 죽었다.
5째 동생 "김봉철"은 1960년 "4ㆍ19혁명"으로 "장면 정부"가 들어서자, 네 형제의 유골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밀양 피학살자 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유족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1년 뒤 "5ㆍ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김봉철이 밀양 피학살자 조사대책위원회에서 북한을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2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고한 옥살이를 하고 난 뒤, 화병이 나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6년에 사망하였다. 7명의 자녀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거리에서 동냥을 하거나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지난 2010년에서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 형제에 대한 재심이 열렸고, 오래 전 원심을 파기하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4. 생애 (요약)
어린 시절, "밀양 남천강변"에서 밤낮으로 축구를 하거나, 냉수욕을 하면서 신체를 단련했고, 일제강점기 금지되었던 "조선 역사서"들을 읽으며,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민족의식이 강한 편이었기에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시절에는 "메이지 천황 생일날"에 동창들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16살의 나이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경성 중앙중학교"로 편입한다. 1916년(18살)부터는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조국독립의 꿈을 키워갔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일제가 이 평화적인 혁명운동을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동료들과 함께 1919년, 항일비밀결사단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ㆍ일본정부"를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
"의열단"은 1920~1926년까지 7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도쿄 왕궁"과 각급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육군대장 다나카" 암살을 시도하는 등 크고 작은 암살 및 파괴활동으로,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의열단"은 무고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손쉬운 테러가 아니라, 조선 민중을 억압하는 인물과 시설에 대해서만 공격하는 어려운 길을 애써 택했다. "의열(義烈)"이라는 말, 그대로 "김원봉ㆍ의열단원들"은 조국독립이라는 의(義)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맹렬히 활동했던 것이다.
1926년에 이르러 그는 "개인적인 암살 투쟁"이라는 "의열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항일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우선 자신의 역량부터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열단 단장"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생도로 입교한다. 이곳에서 "민족해방운동 사상ㆍ군사전략"을 학습하고, 졸업 후 "국민당 장교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에 가담하고, "장제스ㆍ저우언라이"등 중국의 중요인사들과 친분을 갖게 된다. 이후 군사양성을 위해, "남경군관학교"의 한인입학을 추진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했다.
이후, "조선의용대ㆍ민족혁명당"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한편, "황포군관학교" 시절, 인연을 맺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설립,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인력으로 활약한 150여 명의 인재들을 직접 길러내기도 했다. "이육사(독립운동가ㆍ민족시인)"도 바로 이곳 "조선혁명 간부학교"에서 배출됐다.
1935년, "김규식" 등과 "민족혁명당"을 창당ㆍ활동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통합 요구에 부응, 1940년대 초,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ㆍ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 후, 1946.02월 "민족주의민주전선ㆍ인민공화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47.02월, 그는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수모를 당한다. 1947.07.19일, 그와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움직이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여운형"을 따르던 그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좌우합작운동"에 더 노력한다. 그러나 "친일파ㆍ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거처를 옮기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김원봉"은 월북하기에 이른다.
1948.04월, "김규식ㆍ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귀환하지 않고 월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여, 그곳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월북 후, "국가검열성상ㆍ노동상ㆍ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ㆍ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직 등의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한다. 1950년 한국전쟁 전, "김일성"의 정책ㆍ남침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주관, "만포진" 부근의 야산에 안장해 주었다.
그러나 납북된 "조소앙ㆍ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한다. 북한에선 고위직을 받았으나, 한반도의 중립국화를 주장할 정도로 "하나된 자주독립국"에 집착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1958.11월, "김일성"이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할 때, "김원봉" 역시 이들과 함께 숙청당한다.
5. 복권 문제
비운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의 복권은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는 월북한 북한최고위층이었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었다.그러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던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한 건국훈장추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김원봉의 경우, 자발적인 월북자인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서훈할 수 없다"며, 논의를 일축시켰다.
이후 2007년, 막내 여동생인 "김학봉"씨가 "김원봉"의 독립운동활동에 관한 공적자료를 정부에 제출하며, 다시금 건국훈장을 수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2005년과 같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의 고향친구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윤세주"는 1982년에, "박차정(김원봉 부인)"도 1995년에 뒤늦게나마 건국훈장을 받았음에도, "김원봉"은 여전히 외면 받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 하지만 현재 그를 기억하는 기념사업회나 관련단체가 하나도 없어 "임시정부 기념사업회ㆍ여천 홍범도 기념사업회ㆍ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등의 항일운동기념단체11곳이 주축이 되어, 그의 독립운동 서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근 • 현대사) > 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건- 1895 : 의병ㆍ을미의병ㆍ을사의병ㆍ정미의병ㆍ13도 창의군 (0) | 2022.10.23 |
---|---|
의열단 ④ 윤세주 (석정)ㆍ조선의용대 최고 이론가 (0) | 2022.10.20 |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① 의열단 단장ㆍ조선의용대 총대장 (0) | 2022.10.20 |
의열단 ② 칠가살 (七可殺ㆍ임정)ㆍ오파괴 (五破壞ㆍ의열단) (0) | 2022.10.20 |
의열단 ① 의열단 (1919)ㆍ한인애국단 (1931)ㆍ조선의용대 (1938) (0) | 2022.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