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義兵)은, 국내외 각지에서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위성을 가졌고, "대한제국"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을 가졌다.
1. 의병(義兵)ㆍ창의군(昌義軍)
• 을미의병 (1895)ㆍ을사의병 (1905)ㆍ정미의병 (1907)ㆍ13도 창의군 (1907) → 독립운동
• 정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을 뜻하는 말
• "임진왜란ㆍ정유재란ㆍ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민간 무장 조직
• "대한제국" 시기, "의병" 역시,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2. 의병투쟁 → 독립운동으로ㆍ의열 투쟁과 테러의 구분
1895년 말, "을미사변ㆍ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봉기한 "의병전쟁"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은 "지속성ㆍ광범위성ㆍ근대성ㆍ다양성ㆍ강력한 투쟁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독립운동"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작부터가 무장투쟁인 "의병 전쟁"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은 한말, 국민적 "의병 전쟁"을 거쳐, 1920년대 "만주ㆍ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930ㆍ1940년대, "항일 빨치산 투쟁ㆍ조선의용대(군)ㆍ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은 독특한 방략인 "의열 투쟁"도 있었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온 인류에게 정의ㆍ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열 투쟁"은 "테러"와 매우 다른데, 우선 "목적"에서 큰 차이가 있다. "테러"는 개인ㆍ일부 집단ㆍ단체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의열 투쟁"은 "공공 이익"을 위한 것이다.
"공격 대상" 또한 "테러"는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크지만, "의열 투쟁"은 "침략 원흉ㆍ공공의 적ㆍ식민기관이나 단체" 등으로 특정 한다. 또한 "의열 투쟁"은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ㆍ이유ㆍ주체"를 밝히지만, "테러"는 그렇지 않다. 달리 말하면, "의열 투쟁"은 부귀와 영화를 위한 것도,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목숨을 던져, 민족의 대의를 구현하고, 역사를 바꾸고,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의열 투쟁"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기에는 "의사ㆍ열사"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사상ㆍ철학ㆍ조국애ㆍ민족혼"이 녹아 있는 것이다.
3. 조선 시대, 이전
대체적으로 "조선" 이전에는 "의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조선" 이전에는 개인이 지배하는 "사병"이 존재하였고, 때로는 "사병"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활동하기도 하는 등, "관군ㆍ비 관군"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고려 삼별초"는 "고려"가 항복하기 이전에는 "최우의 사병집단"이었으며, "대몽항쟁"에서 유명한 "김윤후"가 "살리타"를 무찌를 때, 그의 신분은 "승려"였고, 그가 이끈 군대는 "노비"가 주축이 된 "민병"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민병"들을 "의병"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① 삼별초 (三別抄)
"몽골 침략기"에 대항하던 "고려 무장세력"이며, 원래는 하나의 단일한 단체가 아니었다. 뒤에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다. 다른 반란군과는 달리 원래는 "비정규군"이었다가 "정규군"으로 재편된 군대였다. "제주도에서 궤멸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나, 일부 세력이 "류큐 왕국(오키나와 지역)으로 향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② 최충헌 (崔忠獻ㆍ1149~1219ㆍ고려 무신ㆍ최 씨 정권의 1번째 지도자)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4번째 "무인 집권자" ㆍ1196~1219년까지, 23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③ 최 우 (崔 瑀ㆍ1166~1249ㆍ고려 무신ㆍ최충헌의 아들)
1219~1249년까지, 30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④ 무신정권 (武臣政權ㆍ1170~1270 (의종 24~ 원종 11))
1170~1270년, 100년 동안 "무신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김인준)→ 임연→ 임유무)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ㆍ문신 "김돈중(김부식 아들)"은 촛불로 나이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으며, 당시 "김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자, "정중부"는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새겨 두게 되었다.
4. 조선 시대
① 한민족 4 대첩 : 행주대첩ㆍ한산도대첩ㆍ살수대첩ㆍ귀주대첩
② 임진왜란 3대 대첩 : 행주대첩ㆍ진주대첩ㆍ한산도대첩
③ 임진왜란 육전 3대첩 : 행주대첩ㆍ진주대첩ㆍ연안대첩
④ 임진왜란 (壬辰倭亂) : 6.6년 전쟁ㆍ1592.05~ 1598.12
⑤ 정유재란 (丁酉再亂) : 2년 전쟁ㆍ1597.08~ 1598.12
⑥ 정묘호란 (丁卯胡亂) : 2개월 전쟁ㆍ1627.01월 중순~ 3월 초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⑦ 병자호란 (丙子胡亂) : 59일 전쟁ㆍ1636.12.28~ 1637.02.24 : "청나라"와 벌어진 전쟁으로, "인조ㆍ조정"은 "남한산성"에서 항전
"임진왜란" 기간 동안,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의병이 참여한 유명한 전투로는 "행주대첩(권율 장군ㆍ1593.03.14)ㆍ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공방전ㆍ김시민 장군ㆍ1592.11.09)" 등이 있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ㆍ사림ㆍ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예로부터 "향촌 공동체"가 "향토방위"를 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거병한 곳은 "영남지역"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문천회맹(蚊川會盟ㆍ임란 영남 의병장들의 맹약)"이 "군민합동작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충돌보다는 매복ㆍ기습ㆍ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지형지물을 이용한 작전 등 "관군"의 전투 능력을 강화시켜, 의병들은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5. 대한제국 시기
1895~ 1896년 : 1차 의병전쟁 (1895년 을미의병) / 1905~ 1910년 : 2차 의병전쟁 (1905년 이후 "을사의병ㆍ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각지의 "민병" 역시 "의병"이라 불린다. 이들은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국권회복"에 성공하지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진압ㆍ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당수는 "독립군ㆍ광복군"에 참여하여, 이후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특히 1907~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여, 의병 15만여 명의 봉기ㆍ2,851회 충돌하였다. (총 53,000여 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ㆍ사망(16,700명)ㆍ부상(36,770명))
"의병 투쟁"이 가장 활발한 지역은 "전남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일본인 지주"가 의병 활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09년,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의 강력한 요구로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국내 의병들"과 결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 활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근거지를 "만주" 등지로 옮기게 되었고, 이들은 "독립군의 주축"으로 성장하였다.
① 시기별 의병 : 을미의병ㆍ을사의병ㆍ정미의병ㆍ13도 창의군
• 1895년 (을미의병): 이소응ㆍ노응규ㆍ기우만ㆍ이강년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을 중심으로, "단발령ㆍ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다. 초기 의병은 "양반 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쇄국정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이항로의 문하생"이 많았으며, "위정척사"의 명분에 의해 봉기하였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퇴조하자, "을미의병"은 대부분 해산하였다.
• 1905년 (을사의병): 최익현(태인)ㆍ민종식(홍주)ㆍ신돌석(경상도)ㆍ정환직(영천)
원주(원용팔)ㆍ죽산/안성(박석여)ㆍ양근/여주(이범주)ㆍ경상도(이유인/이하현/정환직/최성집/김현규)ㆍ전라도(기우만/백낙구/양한규/고광순/김동신)ㆍ충북(노병대)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 시기 의병 역시, 초기에는 "최익현"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투쟁 대열에서 곧 탈락되었다. "최익현"은 "관군"이 진압하자, "국왕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봉건 윤리"에 의해 스스로 투항하였고, 대신하여 "무명의 유생ㆍ농민"이 의병의 주축이 되었다.
• 1907년 (정미의병): 홍범도ㆍ차도선ㆍ김수민ㆍ민긍호
1907.07.24일, "정미7조약"을 체결, "군대 해산" 이후,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당시 의병장은 "안규홍"과 같은 "몰락 양반"이거나, "신돌석"과 같은 "평민"이었다. 이들의 요구 역시 "을미의병의 위정척사"라는 명분보다는, 공평한 토지의 분배와 같은 "봉건 수탈의 해체"를 포함한 것이었다.
• 1908년 (13도 창의군): 이인영(창의대장)ㆍ허위(군사장)ㆍ권중희(황해도)ㆍ이강년(충청도)ㆍ민긍호/이구재/이은찬(강원도)ㆍ박정빈/신돌석(경상도)ㆍ문태수(전라도)ㆍ방인관(평안도)ㆍ정봉준(함경도)
1907.08월, "일본"에 의한 군대해산을 계기로 9월에 "이은찬" 등이 "이인영"을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적인 의병조직을 만들었다.
② 의병 봉기 인원ㆍ충돌 건수ㆍ피해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 上, P366~367)
1907년 : 약 50,000명ㆍ 304여 건 → 1908년 : 약 70,000명ㆍ 1,450여 건 → 1909년 : 약 28,000명ㆍ 950여 건 → 1910년 : 약 1,900명ㆍ 147여 건
• 피해 (1907~1910년까지) : 의 병 : 사망(16,700명)ㆍ부상(36,770명)ㆍ민간인 사망(1,250명) / 일본군 : 사망( 130명)ㆍ부상 (270명)ㆍ민간인 사망 (120명)ㆍ가옥 소실 (68,800호)
③ 1895~1896 : 1차 의병전쟁 (1895년 을미의병)
1894년(고종31), "청일전쟁ㆍ갑오경장"으로 "일제 침략이 노골화된 시기"에 일어났다. 전쟁을 구실로 "서울"을 강점한 "일제"는 "친일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근대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적인 "갑오경장"을 가로채서, 그들이 침략하는데, 편리한 방향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개혁해갔다. "일제 침략"의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을미사변ㆍ단발령"으로 실체가 드러났다. 그리하여 "제1차 의병전쟁"은 "단발령"이 선포되어, 강제로 상투를 잘리는 1895년 말에 일어났다.
1896.01월 하순, "유생 이소응"이 "춘천"에서 봉기하여,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민용호)ㆍ제천(유인석/이춘영/안승우)ㆍ홍주(김복한/이설)ㆍ남한산성-안성(김하락)ㆍ문경(이강년)ㆍ안동(권세연/김도화)ㆍ영양(김도현)ㆍ진주(노응규)ㆍ금산(허위/이은찬)ㆍ장성(기우만) 등이 일어났다. 초기에서 가장 유력했던 의병진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한 "이춘영ㆍ안승우ㆍ이강년" 등의 "충북 진영"이었다. 이들은 "남부ㆍ중부"를 잇는 요충지인 "충주"를 점령하여, 8도를 호령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의병"이 주로 중ㆍ남부지방에서 일어난 사실은, 이 지방이 "유생의 본고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1894년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와 지역적으로 일치하고 있어,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뒤에 "황해ㆍ평안ㆍ함경" 등 북부 지역으로 번져간 것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 특기할만한 사실은 "의병의 공격 목표"가 "서울ㆍ부산ㆍ원산" 등 "일본인"이 많이 진출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강릉"을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를 장악한 "민용호"가 "원산항 공격"을 시도한 일이나, "진주ㆍ김해"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한 "노응규"가 "동래 공격"을 시도한 것이 그 좋은 사례이다. "경기도" 일대의 의병 역시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였다.
• 또한 "의병"이 일어난 지, 1달 만에 "김홍집 친일 내각"이 붕괴되어, "단발령"이 철회되고, "왕"이 의병을 선유(宣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일제"는 침략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그러나 "의병전쟁"이 중앙의 정변ㆍ정책 변경을 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의병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같은 해 10월까지, "북부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더욱이 의병은 그 뒤에도 이름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다. "서학당(西學堂)ㆍ영학당(英學堂)", 1900년 이후 5년간 전국에 미친 "활빈당(活貧黨)" 등이 그것이다.
•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제1차 의병전쟁"은 단순한 "단발령 반대 운동"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토적복구(討賊復舊)"라는 "봉건적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지방 유생들의 단순한 불만 표시만도 아니었다. "의병"이 "활빈당"으로 전성(轉成)한 것만 보더라도, "의병"은 "봉건적 지배 체제"와 결탁한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농민적 항쟁"이라는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
④ 1905~1910 : 2차 의병전쟁 (1905년 을사의병ㆍ1907년 정미의병)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할 때에 일어났다. 즉, 1905.09월, "러ㆍ일" 간의 휴전이 성립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역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1907년 이후, 전국의 유생ㆍ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일어난 의병의 중심 세력은 "지방의 가난한 유생(寒士)ㆍ포군(砲軍)ㆍ빈농(破落戶)"들이었으며, 평균 40~ 5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이 많았다.
1905년 "을사의병" 시기의 "유생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최익현(태인)ㆍ민종식(홍주)ㆍ신돌석(경상도)ㆍ정환직(영천)" 등이다. 이 시기에 봉기한 주요 의병장들을 보면, "원주(원용팔)ㆍ죽산/안성(박석여)ㆍ양근/여주(이범주)ㆍ경상도(이유인/이하현/정환직/최성집/김현규)ㆍ전라도(기우만/백낙구/양한규/고광순/김동신)ㆍ충북(노병대)" 등을 들 수 있다.
• 1906.05월, "충남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 부대" 1,000여 명은 여러 차례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06.0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ㆍ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봉기, 남북이 상응하여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자진 해산한 "최익현"은 관군에 체포되고 말았고, 서울에 압송된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하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 크게 주목을 받은 부대는 "영해"의 "신돌석 부대"였다. 그는 "제1차 의병 때"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상민 출신"으로서 "활빈당"이나 농민을 규합하여, "을사의병" 중에 유일하게 "농민의병부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경상도ㆍ강원도" 일대에,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 놓았다.
1907년 여름에 이르자, "의병전쟁"은 전국에 확산되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1907.08.0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ㆍ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 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항전은 먼저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ㆍ강화" 등 "지방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홍주 진위대"는 집단 탈영을 했고, "진주 진위대"도 봉기 계획을 짰다. 이들 "조선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원주 진위대"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의 지휘 아래, "강원도ㆍ충북" 일대에서 활약했고, "서울 진격 작전"의 주축을 이루기도 하였다.
"강원도ㆍ충북ㆍ경북ㆍ경기도"에서 일어난 의병도 곧 나머지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농촌"이 "의병 천하"로 되었고, 각처에서 "일본인"이 살해되고, "군아(郡衙)ㆍ면사무소ㆍ경찰 분파소ㆍ우체국ㆍ전당포"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이 "의병 토벌"에 나서자, 민중은 문자 그대로 "선전(宣戰)없는 한일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북부수비관구(함흥)ㆍ남부수비관구(대구)"를 두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군" 해산에 대비하여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했고,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본국의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방화ㆍ살인ㆍ강간을 자행하였는데, "의병"을 체포하여, "열탕"에 삶아 죽이고, "의병장"의 부인을 잡아, 음문에 숯불을 넣어 태워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1908년 이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의병들"은 마침내 전국 의병군인 "13도 창의군"을 "경기도 양주"에 집결시켜, "서울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1908년 음력 정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군"은 모두 10,000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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