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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사건- 1919 : 임시 정부ㆍ상해(19~32)ㆍ이동(32~40)ㆍ충칭(40~45)

by 당대 제일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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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 (臨時政府)"는 1932.04.29일, "홍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尹奉吉ㆍ1908~1932ㆍ24세ㆍ총살형) 의거"를 계기로 포악해진 일제를 피해, 1932.05~1940년까지 8년 동안, "항저우(杭州)ㆍ난징(南京)ㆍ창사(長沙)ㆍ광저우"  10여 곳을 전전하며 남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 임시 정부 (臨時政府) : 1919.04.11~ 1945.11 (27년간)

임정 27: 기 상해시대 (1919~32)기 이동시대 (1932~40)기 충칭시대 (1940~45)

1919.04.11,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선포 (국호헌장 제정반포)

이후 1945.11,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치했던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

1919"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76개 지역 이상)"가 준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04.11ㆍ상하이)대한 국민의회정부(1919.03.17ㆍ러시아령)ㆍ대한 민간정부(1919.04.01ㆍ서울ㆍ천도교 중심)조선민국 임시정부(1919.04.09ㆍ서울ㆍ천도교 중심)ㆍ신한민국 임시정부(1919.04.17ㆍ평안도)한성 임시정부(1919.04.23ㆍ서울-인천)ㆍ려 임시공화국(동삼성(東三省ㆍ만주일대))

가운데 "상하이러시아령서울"3개 지역에서 성립된 "임시정부""헌법의회서고문(告文)정강강령" 등을 갖추었고, 나머지 정부는 전단적(傳單的)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개의 실질적인 정부는 "상하이"에 집결, 1919.09.15"통합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45년까지 각종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임시정부 : 종전의 정부가 무너진 후,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임시로 구성된 정부ㆍ다른 나라의 침략 등으로 해외에 세워진 망명 정부를 임시 정부라고도 한다.

조선민국 임시정부 : 1919.04, 천도교도들이 국내에서 조직하려 했던 임시정부"전단 정부"로서, 실체가 구성되지 못한 채, 다만 "문서"로서 끝났다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간부들은 1910년대 말에 이미 "민간정부" 형태의 국민국가 구성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으나, 이들이 1919"31운동"을 계기로 체포투옥되자, 04.19일 나머지 "천도교도"들이 "조선자주당연합회조선국민대회"의 명의로 된 "조선민국 임시정부 포고문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을 서울 시내에 배포했다 "포고문"1919.04.10일자로 작성된 것으로, 전문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의 필연성을 천명했다.

"임시정부"의 구체적 내용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조선민국 임시정부 창립 장정"에 의하면, 다른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민주적 정부형태(도령부와 내각의 양원체제)"로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근대적 정치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2. 수립민주공화제광복정책

1919"31운동" 이후, 2,000만 민중의 욕구분출로 가능해졌다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임정""신규식"의 터 잡기와 "이동녕이시영"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3권 분립""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1919.04.11,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여기서 "국호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행정부(6)국무원"을 구성했다이어 "의정원사법부의 3권 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임정"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제통할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자주독립"을 최대의 목표로 내걸었다이때 "임정" 독립운동은 단순한 "소 집단적 항쟁차원"이 아닌, 이념을 동반한 "광복 정책적" 측면에서 국가적정부적 기능으로서의 면모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임정

3. 1919.04~ 1932.04 : 기 상해시대

"쑨원(孫文)"의 심복인 "두웨성(杜月笙)"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청사" 정한 뒤, 1919.04.11"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1932.01.08, "김구"가 직접 조직하고 주도해온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에 의한 "도쿄(東京)"에서의 "일왕폭살의거"가 미수로 끝나자, 04.29"윤봉길"로 하여금 "상하이의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축하1·28 상해사변전승축하식장"에서 투탄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이에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요시노리(白川義則)"20여 명이 살상되자, 극악해진 일제의 보복을 피하여, 1932.05"상하이"를 떠난 "임정""2기 이동시대"를 맞게 되었다.

임정의 재정 : 초기에는 "인구세자진헌금지원금" 등으로 충당되었으나, 계속되는 재정적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독립공채군자금 모집원의 활용파견원/조사원의 지원금 조달" 등 활발한 대외적 활동을 했다 초기에는 "하와이미주 동포"의 성금이 활용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원조금"으로 임정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었다.

우선 "내정교통" 면에서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교통국""교통부" 소관의 통신기관으로 정보의 "수집검토교환연락" 등 통신 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비밀독립운동 자금의 수집업무"도 겸했다 "교통국"1919.05, 국내로 진입하는 요로인 "평북 신의주" 건너편, "동삼성 안동현 단동시""교통부 안동지부"를 설치했다. 이곳은 "일본 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다.

"교통국""자금조달독립운동에 헌신할 의식 있는 인물 발굴"을 주요 임무로 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   국내의 정보를 수집검토교환비교하여, 정부에 보고   정부의 지령각종 기밀문서기관지 "독립신문" 등 서류를 국내에 전달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소개무기의 수송전달을 담당

"연통제""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를 연결해 시행한 "지방 행정제도"인 동시에, 국내를 지휘감독하기 위한 기본조직으로 기능했다 "임정"의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하이에 도착한 뒤, 1919.07.10"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임시연통제령"을 공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개시되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공문의 전포군인/군속의 징모군수품의 조사/수령시위운동의 계획 애국성금의 갹출운동통신연락정보수집 등 다양했다.

교육문화면 : "상하이의 박달학원인성학교3·1중학남화학원" 등 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제로 우리 동포들의 자제를 교육했다. 중국의 각 대학에 진학시켰다.

군사면 : 처음부터 "무장독립전쟁론"을 광복정책으로 채택했다(무장독립운동).  "상하이""신흥무관학교"의 인재육성 정신을 살린 "육군무관학교"를 설치하여, 청년장교를 100여 명 배출하고, "동삼성" 지역에 파견, "일제 군경"과 대결하게 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임정 직할부대"로 편입하여 활용하고자, "김좌진김동삼" 등 장군들을 "임정 국무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육군 주만참의부서로군정서" 등을 직할부대로 편입했다.

독립신문 창간 : 임정의 기관신문으로, "이동녕"의 지휘하에 "조동호이광수" 등이 창간하여, "연통제"를 통해, 국내외에 배포하였고, 1925년까지 재정난과 "상하이 일본영사관"의 폐간압력에도 불구하고, 200여 호의 신문을 간행배부했다.

외교정책을 전개하기 위한 기구로, 1919.04"김규식""외무총장"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파리 주재위원"으로 임명하여, "주 파리 위원부"를 설치하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걸었던 기대는 무산되었다 특히 큰 성과를 거둔 것은 "2차 인터내셔널 회의""만국 사회당대회"에 참석 활동한 것으로 "조소앙이관용"이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주 파리 위원부"1919.09, "미국 필라델피아 외교통신부"와 함께, "구미(歐美)위원부"에 흡수되었는데. "구미위원부""이승만""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한국위원회"를 개편한 것이었다 이는 구미 각지에서 시행할 "정부행정을 대행"하는 기관으로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외교통신부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유럽미주"에서의 외교업무를 장악했다 "이승만김규식" 등은 "미국무부 당국자"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구미위원부"는 외교사무뿐만 아니라, 특히 "미주지역"에서 출납되는 정부재정을 관리했으므로,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의 중추가 되었으며, 이는 1928년까지 유지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임시정부구미위원부"1921.11.11일부터 "워싱턴"에서 개막되는 "태평양회의"에 기대를 걸고, "이승만서재필" 5명의 한국 대표단을 "워싱턴"에 파견해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4. 1932.05~ 1940.08 : 기 이동시대

1938.05.06일, "남목청 사건" 발생ㆍ"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본부 : 김구 피습사건 (밀정 이운한)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보복미행수색압거 등을 피하여 임정은 1932.05~ 1940.09월까지 8년 동안, "자싱(嘉興)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전장(鎭江)(南京)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구이린(桂林)치장(F)" 10여 곳을 전전하며 남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장제스 국민정부"로부터 물심양면으로의 실질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중국"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환기시킬 수 있었다.

1933.05, "김구장제스""난징 정상회담"에서 "중국 낙양군관학교""한인 훈련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여, 11.05일부터 "한인 특별반"을 설치운영했다 당시 "임정요인들"은 하루 1끼로 겨우 연명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하루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내린 일이 없었으며, "중국 국민정부"를 따라 이동해가면서도 "수반 이동녕김구조소앙" 등의 30여 명은 "5·7당 통합"의 열의를 보였으며, "좌우익 진영의 통일"에 대한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1932, "항저우"로 이동한 "임정"1935"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32, "전장"으로 간 "임정"1937"중일전쟁" ,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중일전쟁"을 호재로 인식하여, "직할군대의 양성"을 준비하다가, "창사광저우"를 지나, 1939"류저우"에서 200명 내외 규모의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939.03.10, "이동녕 주석" 중심으로, "치장"으로 이동하였다. "충칭(重慶)"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1940.05, "한국광복 진영의 3""임정"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기도 했다. 이는 1940.03.13, "치장 현 타만 임정 청사 2"에서 72세로 서거한 "주석 이동녕"의 유언에 따라 "대동단결의 평생의거"를 실현시킨 것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5. 1940.09~ 1945 : 기 충칭시대

1940.09, "충칭"에 정착함으로써, 27년 중 마지막 5년의 광복정책을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5년간의 "충칭 시대""임정"4번이나 청사를 이동하면서, "좌우익 연합정권(내각)"을 구성하여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적극적인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았다.

숙원사업인 "국군"으로서, "광복군"을 창설하여, 내외에 선포했다 "주석 김구"의 진두지휘 하에, "총사령 지청천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1945.11월 귀국할 때까지 "직할 무장부대"로서 활용했다.

이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군사 특파단"을 폐지하고, 건군공작의 착수유격전을 수행하며 "광복군 제123 지대"를 재차 편성했다 1942.02, "광복군징모 제6분처 주임 김학규" 7명의 "특파단""부양"에 파견하여, 적 후방의 "징모선전공작"을 담당케 하는 한편,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면서 "김원봉""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4.03, "국내공작특파위원회군사위원단"을 설치했고, 1945.07"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 지휘부"를 설립하여, 국내탈환작전을 결정했다 "연합군"과 더불어 "OSS 작전직접 국토수복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임정"은 외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1941.11"주미외교위원부""워싱턴"에 설치하고, 구미방면의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위원장에는 "이승만"을 임명하여, "대 구미(對 歐美) 외교정책"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1944"재미한인사회의 분열"로 인해, 임정의 직접 지휘감독을 받는 "주미외교위원회"설치하여, "이승만"을 비롯한 9명의 위원을 임명함으로써, "구 미주 방면"의 외교활동은 "주미외교위원회"가 맡았다.

이 같은 외교활동으로, 1943"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정식으로 승인되었고, 1945 "포츠담 선언"에서 이것이 재차 확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945, "장준하김준엽" 등 학병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사병 수백 명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합류했고, "이봉학백진규박동대" 90여 명은 "비호대"를 조직하여, 특무공작을 펴다가, "광복군의 김경화"가 파견되자, 현지에서 편입되기도 했다.

※ 1944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ㆍ김준엽" 등 50명이 "노하구"에 도착하자, 이 정보를 입수한 "김원봉"은 "장준하" 일행을 "광복군 제1지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김원봉"은 사람을 보내, "장준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탈영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으로 떠나려 하자, "1지대"의 한 중대장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설득 내용은 "노하구에 계속 머물러서, 1지대를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준하" 등은 거절했다. "장준하"는 이를 두고, "청년동지 50명을 결속시켜, 노하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겠다는 야심인데, 이것은 실상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라고 했다.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했던 "장준하"는 그가 "충칭"까지 비행기 편을 주선해준다는 약속조차 의심했다. "우리에게 애호와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헛된 약속으로 비행기 편까지 알선해주겠다는 허풍은 전부 그들의 수작"이라 했다. 뒷날 "장준하""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이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김원봉"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일행들과 함께 걸어서, "안후이 성 임천"에 도착,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1944.08,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12"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그 뒤,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01.31"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6. 1938.05.06남목청 사건ㆍ김구 피습사건ㆍ밀정 이운한

1937.07,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난징"에서 활동하던 "임정"급하게 활동무대를 "창사"로 옮겼다1938.05.06, "김구""중국 후난성 남목청"이라는 건물에서, 독립운동 세력 중 우파 대표들과 논의를 하던 중, "밀정 이운한(선혁명당원)" 쏜 총탄에 맞았다"김구""백범일지"에서, "술 한 잔하고 있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자, 병원이었다." 당시를 회상했다.

"남목청 사건"이라 불리는 "피습사건", 근처 병원에 의사로 보이는 두 사람 앞으로 "김구" 상에 앉아 있다. "심장" 바로 아래쪽에 "총상흔"이 선명하다"장제스"가 매일 사람을 보내서 (병세를) 물었고, "장제스"병원비 전액을 부담하였다.

김구

 

※ 이운한 (李雲漢ㆍ일제 밀정ㆍ조선혁명당원ㆍ생몰년도 미상)

1938.05.06, "임정"이 있던 "중국 창사"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3당 합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에 대한 통합을 의논하던 독립 운동가들을 저격한 "남목청 사건"을 일으켰이 자리에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권총을 난사해, "조선혁명당" "현익철"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유동열"은 중상,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김구"는 심장 부근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죽은 줄 알고 방치되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이다.

"3당 대표- 한국국민당(김구조완구)조선혁명당(이청천현익철유동열)(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홍진)" 등이 통합회의를 열었다"이운한"은 당시 "조선혁명당" 당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임정 주석 김구""3당 합당 통합"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자마자 이에 반대하더니, 모임에서 주요 요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후, "창사" 교외의 작은 정거장에서 체포가 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강창제박창세"가 의심 받아 "이운한"과 같이 잡혔으나, "강창제박창세"는 석방되었다하지만 감옥에 갇힌 "이운한"은 탈옥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후 "이운한"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다만, 탈옥 이후에 임정 요원들이 임무수행 중, 목격했다는 보고는 있었다임무수행 중, 담배를 피려는데, 곁에 서있던 남자가 다가와, 담뱃불 좀 빌려달라는 말에 얼굴을 보니 "이운한"이었다고 한다.

"남목청 사건"은 전쟁을 수행하던 "일제가 독립운동 조직의 통합으로, 위협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했던 "일제의 공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일부 "뉴라이트 친일파" 계열들은 독립운동 내부의 갈등을 확대하여, 내부세력의 소행이라고 포장하거나, 특히 "김구"를 격하하기 위해, 그런 짓을 많이 벌인다이 사건을 두고도 "이운한"이 그런 동기로 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노선 갈등"이라면 "이운한"이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수행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당시 "일제의 밀정"에 의한 "독립운동가 유괴암살 공작"이 성행하였다당시 "유괴암살 공작"에 관련되었던 대부분의 "일제 공작"에 대해 "임정" 수사권이 없었고, "중국 현지 정부"는 무능부패하여,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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