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광복단 (鐵血光復團) 사건"은 1920.01.04일, 북간도의 "윤준희ㆍ임국정ㆍ한상호ㆍ박웅세ㆍ김준ㆍ최봉설" 등 "철혈광복단" 6명이 일제가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용정촌지점"으로 운송중이던 "일본화폐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으로,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엄인섭"이 "일제의 밀정"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진 계기이다.
1. 철혈광복단 (鐵血光復團) 사건ㆍ간도 15만 원(150억) 사건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은 1919년 "윤준희ㆍ임국정ㆍ한상호" 등이 "중국 젠다오(間島)"에서 조직한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1920년 대부분의 단원이 당시 "남만주"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하면서 이 단체 역시 이곳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말, "김하석(金河錫)"의 제안으로 "김하석"의 집에서 군자금 확보계획을 세우고, "조선은행원 전홍섭"을 포섭했으며,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용정촌지점"으로 송금하는 현금 15만 원을 습격ㆍ탈취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기로 계획했다.
"전홍섭(全弘燮ㆍ조선은행 회령지점 은행원)"으로부터 1920.01.04.~ 05일경 현금을 "용정"으로 송금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오자, 1920.01.04일 매복했다가 "허룽 현(和龍縣) 동양리"에서 호송일경을 사살하고 현금호송차를 습격해, 현금 15만 원을 탈취했다. 권총 10여 발을 발사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현금 5원권 10만 원과 10원권 5만 원 등 모두 15만 원을 탈취하였다.
"김하석"과 함께, 01.09일 탈취한 현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다량으로 구입해, "북로군정서"에 제공함으로써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이바지했다.
1921.01.31일, 일제 밀정으로 암약하던 "엄인섭"의 밀고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21.08월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살아남은 자는 "최봉설"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엄인섭"이 "일제 밀정"이라는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뒤 "용정 일본영사"는 이 사건을 구실로 "중국 경찰"과 합동하여, 대대적으로 수색ㆍ체포를 자행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엄인섭"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봉설"이 1956년 "북간도 연길"을 여행할 때 "훈춘의 정포수 영감"으로부터 "엄인섭의 말로"를 들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엄인섭"은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할 때, 함께 "함경북도 경흥"으로 도망쳤지만 일본어를 몰라 밀정직에서 해직되었고, 이후 "훈춘"으로 왔으나, 가는 곳마다 "15만원 사건" 당시의 "일본 정탐놈"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면서 비난받았다고 한다. 결국 1936년 여름, "훈춘"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한다. 죽을 때, "내가 김하석의 말을 듣다가 천추만대에 왜놈 정탐배로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윤준희 (尹俊熙ㆍ함북 회령ㆍ1892~1921.08.25ㆍ29세) 북로군정서 특파대장
• 임국정 (林國貞ㆍ함남 함흥ㆍ1894~1921.08.25ㆍ27세) 북로군정서 특파원
• 한상호 (韓相浩ㆍ함북 경성ㆍ1899~1921.08.25ㆍ22세) 북로군정서
• 최봉설 (韓相浩ㆍ연길시 소관향 민흥촌ㆍ1897~1973ㆍ76세) 간도청년회원ㆍ적기단 단장
• 박웅세 (朴雄世ㆍ? ~ ?) • 김 준 (金 俊ㆍ? ~ ?)
2. 김하석 (金夏錫ㆍ? ~ ?)
사회주의운동가ㆍ대한국민의회의 군정부장ㆍ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의장
1921.02월, "대한국민의회"의 군정부장을 역임하였다. 이로보아 "이르쿠츠크 한인집단"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1921.03월,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장)"로 활동하였다. 1921.06월부터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전 약 4개월 동안 "상해파(上海派)"와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의 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는데, 당시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 지략가는 "김하석"이었다.
"김하석"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스미야스키"를 배경으로 시베리아에 진출한 "상해파" 인물들을 체포, 투옥하는 데 민완을 발휘하였다. "자유시참변"을 규탄하는 "간도계(間島系)" 11개 단체의 성토문에 의하면, "김하석"이 간도계 한국독립군을 "러시아 당국"에 "일본밀정"으로 고발하였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모르는 "러시아군대"가 "한국독립군에 총격을 가하게 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다.
3. 엄인섭 (嚴仁燮ㆍ함북 경흥ㆍ1875~1936ㆍ61세)
안중근의 전우ㆍ연해주 독립운동에 숨통을 끊은 최악의 밀정ㆍ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조카
"철혈광복단"이 훔친 15만원(현, 150억)으로 무기를 사기 위해, "엄인섭"을 찾아갔다. 그래서 독립 운동가들은 믿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150억 원을 거의 일본에게 뺏겼다. 또한 500여 명의 독립군이 체포됐다. 이후 그는 "일본"에게 팽 당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거물이 최장기 "일제 밀정"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일제 밀정"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때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어,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구 한말기에 의병 활동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 밀정"으로 변절했다. 대표적인 밀정행위는 1920년 "간도 15만원 사건"을 들을 수 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침략할 때, "남만주" 지방에 주둔한 "러시아 군대"에서 종군했다. 이때의 공훈을 인정받아 "러시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러ㆍ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군 통역"으로 복무했다.

1907년 겨울, "안중근ㆍ김기룡"과의 의형제를 맺은 뒤, 항일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순방하며 뜻있는 청년 87명을 결집하고, 총기와 자금을 모았다. 1908.04월, 이른바 "87 형제"들이 "연추"의 "최재형" 집에 총집결하여 "동의회"를 조직했다. 1908년 여름, 국내로 진공할 의병부대의 지휘부에서 "좌영장"의 직책을 맡았다. "우영장"은 "안중근"이었다.
"동의회" 소속 의병 360명은 "러시아"에 조성된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에서 3주 가량 훈련을 마치고 7월 국내로 진입하여, "함북 신아산"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첫 승리를 거뒀다. "안중근 부대" 등이 8월 초까지 1개월간 악전고투하다가 연추로 귀환한 것과는 달리 일찍 후퇴를 결정한 "엄인섭 부대"는 "러시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서수라"를 습격하여 일본인 어부 10여명을 살해한 뒤, "웅기 마을"로 쳐들어가 한 무리의 일본 상인들을 공격한 뒤 철수하면서, 두만강 연안의 일본군 초병들과 전투를 벌였다.
"엄인섭"이 1909.04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서 단지(斷指)했다는 일본관헌 기록도 있다. 1909년 "이범진ㆍ이범윤"의 사자(使者)인 "김영선"과 함께 한성에서 "고종 황제"를 은밀히 배알하고 밀서를 봉정(奉呈)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시기에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했는데, 1911.04월경부터 일본 측에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일본총영사관의 기토 통역관"이 "엄인섭"을 관리했다. (인간 사냥꾼 "기토 가쓰미"가 통역관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통역관은 허울이었고, "러시아" 내 독립 운동가들을 감시하려고 온 것이다. "기토 가쓰미"는 돈으로 밀정을 포섭해, 독립 운동가들을 잡았다. "가토 가쓰미"는 "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독 립운동가들을 고문했다. "기토 가쓰미"는 살해 위협을 당하다가, "베이징"으로 떠났다.)
"일본총영사관"은 1911.06월 "유진율"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한글신문 "대양보"의 발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엄인섭"에게 "대양보"의 인쇄활자를 절취하도록 했다. 9월 "엄인섭"은 "대양보"의 활자 1만 5000개를 절취하여, "기토 통역관"에게 건네주었다. "대양보"는 이후,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정간되고 만다.
"일제 밀정"으로 활동하면서도 항일애국자로 알려졌던 "엄인섭"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체포된 "일본 밀정"들을 탈출시키기도 했다. 1910년대 전반, 그는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으로,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받았던 "권업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911.06월 "권업회" 발기회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2월에 열린 "권업회" 창립총회에서도 "홍범도"가 부장으로 있는 "사찰부(경찰부)"의 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14.02월에 개최된 "권업회" 총회에서도 "의사원" 후보 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3월 "권업회와 신한촌민회의 통합총회"가 열렸을 때, "최재형"의 후임을 뽑는 회장선거에서 최다득표인 31표를 얻었으나 사퇴함으로써, 26표를 얻은 "김도여"가 회장에 선임되었다. 회장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한인지도자로 인정 받을 만큼 그는 자신이 "일제 밀정"이라는 신분을 철저히 속이고 위장에 철저하고 노련했다.
또 비밀결사에도 관여하여, 1912.01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홍범도ㆍ이범석ㆍ유상돈"을 비롯한 20여명과 "21 의형제"를, 같은 달 "김립ㆍ박동원ㆍ최의수ㆍ고명호ㆍ오봉화"등과 "6 형제"를 결의했다. 1912.08월, "중국ㆍ러시아"와 중국 국경의 "훈춘"에서 한국ㆍ중국의 항일운동가 33명이 결집하여 조직한 "둔전영"의 참립총회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표"로 참석하고 관련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ㆍ일본"이 동맹국 관계로 발전하게 되자,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는 "러시아 정부"에 "불령선인의 퇴거" 처분 등을 요구했는데, 당시 요구한 퇴거 대상은 1급 22명, 2급 18명 3급 10명 등 총 40명이었는데, "엄인섭"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그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러시아ㆍ중국"의 한인들이 조직한 "애국저금단ㆍ북빈의용단"에 관한 정보를 일본 총영사관 "스나가" 통역생에게 제공했다. 이 정보는 후에 "이동휘"를 체포하고 구금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밀정행위는 끊이지 않고 계속 했다. 1917.05월, "치타의 이강ㆍ백원보ㆍ박영갑",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응순ㆍ최병숙ㆍ김학만ㆍ서상구"등이 "을사늑약" 체결 당시 주한공사였다가, 주중공사로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하야시 곤스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을때, 그는 의형제를 맺은 "조응순"이 자신에게 보낸 서한 등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에 전달하였고, 직접 "조응순"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총영사관"의 지휘를 받아, 밀정행위를 계속했다. "3ㆍ1 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ㆍ선언서 선포ㆍ의병 국내진입 등과 같은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있던 그의 집은 "최재형" 등 주요 인물들의 집결장소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엄인섭이 일제의 밀정"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20년 간도 15만 원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일제 밀정"이라는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사건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러시아 혁명" 영향으로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하리노토프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서장"은 "신한촌 민회"를 방문해, "장도정ㆍ김진ㆍ전일ㆍ강양오ㆍ김미하일" 등 한인들에게 "일본 밀정의 명부"를 제출할 것을 요청하자, "장도정" 등은 1920.02월 50명의 "일본 밀정 혐의자"를 지목하고, 이 가운데 혐의가 중한 20명을 추렸는데, 여기에 "엄인섭"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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