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춘참변(琿春慘變)ㆍ혼춘 학살사건"은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군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20년,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재만 한인"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1. 혼춘참변 (琿春慘變)→ 간도참변 (間島慘變ㆍ학살)ㆍ경신참변 (庚申慘變)
1920년, 일본 제국이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으로,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북"에 주둔하는 "나남사단(제21사단)"의 1개 연대를 출동해서, "훈춘"에 입성해, 주변의 한인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 일 시 : 1920.10.02. / 청산리 전투(10.21~ 28) 이후 3~ 4개월
• 장 소 : 혼춘 (琿春)ㆍ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
• 관 련 : 중국 마적 장하오(張江好ㆍ창장하오)의 400여 명 마적 / 일본군 병력 - 총 2만 명
• 피 해 : "만주"에 있는 조선인 1~ 3만여 명을 학살ㆍ민가 2,500호ㆍ학교 30여 개가 불에 탔다. 확인된 것으로, 10.09~11.05일까지(27일간)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은 3,693명으로 "혼춘현(242)ㆍ연길현(1,124)ㆍ화룡현(572)ㆍ왕청현(347)ㆍ영안현(17)ㆍ서간도지방 (804)"에 달하였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적어도 3만여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점차 활발해지는 "독립군"의 활동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일본"은 대규모의 정규군을 "만주"로 투입하여,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토벌할,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토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만주"의 중국 군벌을 위협하여,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감행했으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저항ㆍ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또한 "중국" 영토인 "만주 지방"에 "일본 정규군"을 출병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한 구실이 필요하였다. 이에 "일본"은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혼춘"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흉계를 조작하였던 것이다.
1920.10.02일 상오 5시, "일본"에 매수된 "중국 마적 장하오(張江好ㆍ창장하오)"는 400여 명의 "마적"을 인솔하여, 야포 3문을 앞세우고 "혼춘"을 공격하였다. 당시 "혼춘"에는 "일본 총영사관 경찰ㆍ총독부 파견경찰대ㆍ함북경찰대"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마적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혼춘성" 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때 마적들에게 중국인 병사 70여 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하였고, 일본인 9명도 피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리 피신하여 빈집이 된 "일본 총영사관"도 소각되었다.
이와 같은 "혼춘사변"을 야기한 "일본"은 재만 일본인의 생명ㆍ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주둔군 제19/20사단ㆍ시베리아 출병군 제11/13/14사단ㆍ만주파견군ㆍ관동군" 등에서 총 2만 명의 병력을 "만주"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출병군"은 "기림지대(磯林支隊)ㆍ목림지대(木林支隊)ㆍ동지대(東支隊)"의 3개 지대로 편성되어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는데, 당시 "일본군"의 작전은 2단계로 나뉘어 이뤄졌다.
① 1단계는, 작전 개시일로부터 1개월 내에, "독립군"을 섬멸하고, 근거지를 없앨 것이며,
② 2단계는, "1단계 작전" 이후 1개월 내에, 민간에 잠복한 "독립군 잔당ㆍ민간인 독립 운동자"를 철저히 색출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0.16일, "중국정부"가 거세게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에 대한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독립군소탕작전은 실패가 예상된 것이었다. "청산리 전투" 패전 후,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2. 경신 참변 (庚申慘變)ㆍ간도 참변 (間島慘變)ㆍ간도 학살 사건
그러나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안전지대(산속ㆍ중소 국경지대)로 피신하였고, 이에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20.10.21.~ 28일까지,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서 한국독립군에게 완패하였으며, 그 뒤 "독립군"들은 "소만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 한국인"에 대하여, 무차별 학살을 단행하였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ㆍ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일본군"은 약 2달 간 "독립군 근거지"로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ㆍ간도참변ㆍ간도학살사건"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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