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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사건- 21.04 : 북경군사통일회의→ 국민대표 회의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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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군사통일회의 (北京軍事統一會議)"는 각지의 "무장 독립단체들"을 통일하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회의였다.

 

1. 북경군사통일회의 (北京軍事統一會議) 국민대표 회의

"독립군 부대의 지휘통솔권"에 대해서는 기존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솔권"을 부인하고, "국민대표대"를 소집해, 새로운 "정부 수립"을 모색하기로 결의했다독립투쟁 지휘권을 "임정 군무부군사통일회의" 어느 쪽에 두느냐의 "지휘권 문제""이승만" 위임통치문제"임정의정원"을 부인하는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자기들만이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광범위하게 토의할 문제라고 여기고, "국민대표대회 준비위원"으로 "박용만신숙박건병남공선배천택"  5명을 선출하고, 이를 선전하기 위해 "신채호" 주간으로 주간지 "대동(大同)"을 발행했다.

 일 시 : 1921.04.21        장 소 : 중국 베이징(北京)시외, 삼패자 화원(三牌子 花園)

 주 도 : 상해 임시정부 결성 참여자 (박용만신채호신숙 등 9명)

 참 석 : 만주노령중국미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자들 - 조선국민회간도국민회서간도군정서국내 노동회국내 통일당노령국민회의하와이 독립단 등

 결 의 : "러시아"로 퇴각한 무장부대들이 후일 국내로 진출할 때 행동을 같이 할 것. "만주"에 산재해 있는 "독립군 부대"들을 "게릴라 부대"로 재편하여, 국경지대에서 "무장유격투쟁"을 전개할 것 등

 결 과 : "북경군사통일회의"의 결성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발하던 각지의 독립단체들의 호응을 얻어, "상하이"에서는 "박은식안창호" 등이, "만주"에서는 "김동삼여준"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2. 국민대표 회의 (임시의장 : 안창호의장 : 김동삼의장 : 안창호/윤해)

1923.01.03~06.07,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운동 계파간의 회의"를 말한다. 독립운동사에 무려 "86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효과적인 투쟁을 못한 이유도 "주도권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국내상하이만주북경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체들은 "청산리 전투(1920.10)봉오동 전투(1920.06)"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간도출병경신참변(1920.10.02)"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큰 시련에 부딪히면서,  "무장독립단체들"의 공동대처와 통일이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명목상 통괄한다." "상해 임시정부" "외교 독립노선"을 지향하여 "만주의 무장독립군 단체들"에 대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여기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파쟁도 대두되었다.

1921.04.27, "임시정부의정원의 불신임 결의문"을 채택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또한 "이승만 성토문"을 채택하여, 해외 동포에게 발송하기도 했다05.30, "임시 정부" "내무부령"에 의거하여, "북경군사통일회의"를 비난하였다그 뒤 "북경군사통일회"는 얼마 가지 않아 유회되었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에 대한 반대와 "임시정부의 파쟁성"을 지적하고, "국민대표대회"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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