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군사통일회의 (北京軍事統一會議)"는 각지의 "무장 독립단체들"을 통일하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회의였다.
1. 북경군사통일회의 (北京軍事統一會議)→ 국민대표 회의
"독립군 부대의 지휘통솔권"에 대해서는 기존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솔권"을 부인하고,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해, 새로운 "정부 수립"을 모색하기로 결의했다. 독립투쟁 지휘권을 "임정 군무부ㆍ군사통일회의" 어느 쪽에 두느냐의 "지휘권 문제"ㆍ"이승만"의 위임통치문제ㆍ"임정ㆍ의정원"을 부인하는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자기들만이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광범위하게 토의할 문제라고 여기고, "국민대표대회 준비위원"으로 "박용만ㆍ신숙ㆍ박건병ㆍ남공선ㆍ배천택" 등 5명을 선출하고, 이를 선전하기 위해 "신채호"를 주간으로 주간지 "대동(大同)"을 발행했다.
• 일 시 : 1921.04.21 • 장 소 : 중국 베이징(北京)시외, 삼패자 화원(三牌子 花園)
• 주 도 : 상해 임시정부 결성 참여자 (박용만ㆍ신채호ㆍ신숙 등 9명)
• 참 석 : 만주ㆍ노령ㆍ중국ㆍ미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자들 - 조선국민회ㆍ간도국민회ㆍ서간도군정서ㆍ국내 노동회ㆍ국내 통일당ㆍ노령국민회의ㆍ하와이 독립단 등
• 결 의 : "러시아"로 퇴각한 무장부대들이 후일 국내로 진출할 때 행동을 같이 할 것. "만주"에 산재해 있는 "독립군 부대"들을 "게릴라 부대"로 재편하여, 국경지대에서 "무장유격투쟁"을 전개할 것 등
• 결 과 : "북경군사통일회의"의 결성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발하던 각지의 독립단체들의 호응을 얻어, "상하이"에서는 "박은식ㆍ안창호" 등이, "만주"에서는 "김동삼ㆍ여준"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2. 국민대표 회의 (임시의장 : 안창호ㆍ의장 : 김동삼ㆍ부의장 : 안창호/윤해)
1923.01.03~06.07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운동 계파간의 회의"를 말한다. 독립운동사에 무려 "86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효과적인 투쟁을 못한 이유도 "주도권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국내ㆍ상하이ㆍ만주ㆍ북경ㆍ간도ㆍ노령ㆍ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
"3ㆍ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체들은 "청산리 전투(1920.10)ㆍ봉오동 전투(1920.06)"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간도출병ㆍ경신참변(1920.10.02)"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큰 시련에 부딪히면서, 각 "무장독립단체들"의 공동대처와 통일이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명목상 통괄한다."는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 독립노선"을 지향하여 "만주의 무장독립군 단체들"에 대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여기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파쟁도 대두되었다.
1921.04.27일, "임시정부ㆍ의정원의 불신임 결의문"을 채택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또한 "이승만 성토문"을 채택하여, 해외 동포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05.30일, "임시 정부"는 "내무부령"에 의거하여, "북경군사통일회의"를 비난하였다. 그 뒤 "북경군사통일회"는 얼마 가지 않아 유회되었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에 대한 반대와 "임시정부의 파쟁성"을 지적하고, "국민대표대회"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근 • 현대사) > 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건- 23.01 : 국민대표회의→ 주도권 싸움→ 김구 해산명령 (0) | 2022.10.24 |
---|---|
사건- 21.06 : 자유시 참변 (흑하사변) → 독립군단 와해 (0) | 2022.10.24 |
사건- 20.12 : 대한 독립군단→ 자유시 참변 후, 분할 재편 (0) | 2022.10.24 |
사건- 20.10 : 간도참변ㆍ경신참변 (학살) ← 혼춘참변 (2) | 2022.10.24 |
사건- 20.06 : 의병 전투- 삼둔자ㆍ봉오동ㆍ청산리 (0) | 2022.10.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