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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사건- 21.06 : 자유시 참변 (흑하사변) → 독립군단 와해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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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自由市) 참변ㆍ흑하사변 (黑河事變)"은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ㆍ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소련 영토인 "스보보드니(이만ㆍ연해주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ㆍ사살한 사건으로,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ㆍ상해 파" 간의 정면 대결로 발생한 것이다.

 

1. 자유시 참변 (自由市慘變)ㆍ흑하사변(黑河事變) → 군권 장악통수권 갈등

"사할린 의용군(이항군)""볼셰비키 군(임시 고려군정회자유대대)"의 포위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상하이 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수많은 부대가 총 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 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한다"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대 중, "자유대대(대한국민의회(문창범) 지지)" "이항군(임표고명수)"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결국 "고려 공산당"내의 파벌인 "이르쿠츠크 파상해 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간도 참변" 이후, "간도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해 온 4,000여 명의 독립군 부대들이 "자유시" 집결하였고,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휘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지도부는 "고려혁명군대한의용군"2개 세력으로 나뉘어, 군권을 놓고 대립하였는데, "고려혁명군"측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소련군"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대한의용군"의 무장 해제를 결정하였다.

"고려혁명군""소련 적색군"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를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가하였다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당시 12개 조직"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2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김좌진""이만 시"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일 시 : 1921.06.27

• 주 체 : 상하이 파 공산당→ 대한의용군(대한독립군단 소속)ㆍ사할린 의용군ㆍ이항군   /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고려혁명군(임시 고려군정회)ㆍ자유대대 + 소련군(볼셰비키 군)

피 해 : "독립군 960"이 전사하였으며,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대한독립군단 총 병력은 3,500여 명ㆍ독립군단 : 12한인의병대 : 8개ㆍ20여개 "대한의용군" 2,000여 명 가운데, 100명이 사망하고, 800여 명이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는 이곳을 탈출하여,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사 유 :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 군대 중, "자유대대이항군"사이에 "독립군 통수권" 둘러싼 갈등으로 일어났다.

결 과 :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연해주 지역" 조선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와해궤멸되었다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적군에 모두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여기서 살아남은 "독립군", 대부분이 "상하이 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자유시 집결 목적 :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 전개하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

극동 공화국 (치타 공화국Far Eastern Republic) : 1920, "소비에트 러시아""시베리아 동부"에 세운 명목상의 독립국. 이 공화국을 설립할 때는 "볼셰비키""바이칼 호" 서쪽의 시베리아를 지배하고, "일본""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소비에트일본" 세력의 완충지대로서, "치타 시"를 수도로 하는 "극동공화국"의 창설을 지시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면서, 이 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통합되었다.

 연해주 자유시 (러시아 스보보드니ㆍ이만시 (Iman) ) 안전지대 위치 :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라는 마을이며, 현재는 "스보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보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2. 공산당 구분 : 상해 파 (이동휘)이르쿠츠크 파 (여운형)M L (김준연)

주로 "이동휘ㆍ여운형"이 주도권 다툼을 하였는데, "이동휘"는 그냥 두고 개조하자고 하였고, "여운형"은 "임시 정부"의 재조직을 주장하였다.

1920,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홍범도1920.06.06.~ 06.0706.20)"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김좌진홍범도1920.10.21.~28)에서 승리 연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러시아 (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 "밀산(密山중국 흑룡강성 계서시(鷄西市)에 위치한 항일 투쟁지))"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소수파(자유대대임시 고려군정회볼셰비키 군)"고려공산당" , "이르쿠츠크 파(노령러시)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한국민의회"를 지지  "코민테른(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이르쿠츠크에 상주)"의 승인 획득 "임시 고려군정회"로 개칭 "자유시 참변" 발생승리 "대한독립군""붉은 군대" 편입 "이르쿠츠크"로 이동

3. 대한독립군단의 조직 (병력 : 3,500여 명)

1920년, "봉오동 전투(1920.06)ㆍ청산리 전투(1920.10)"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1920.10)"을 일으켰다.  이에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세력들은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1920.12월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ㆍ중국 흑룡강성 계서시(鷄西市)에 위치한 항일 투쟁지)"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하나로 통합한 "연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12개)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북로군정서" "서일"이었다. 부총재는 "홍범도ㆍ김좌진ㆍ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ㆍ조동식ㆍ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ㆍ9개 중대ㆍ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통합된 "대한독립군단" 조직(12개)은 다음과 같다.

북로군정서 (서일(사진 참조)ㆍ김좌진) : 1920.10 청산리 전투 대승     대한독립군 (홍범도) : 1920.06 봉오동 전투 대승     대한독립단 (지청천)     간도국민회 (구춘선)     대한신민회 (김성배)      의군부 (이범윤)      광복단 (이범윤)     혈성단 (김국초)      도독부 (최명록)     야단 (野團ㆍ김소래)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군비단 (軍備團ㆍ김백일)

 "간도"지역 "독립 부대"

 총군부 (최진동) : 1920.10 청산리 전투 대승     북로군정서(서일김좌진): 대한독립군단 소속- 1920.10 청산리 전투 대승     독립군 (홍범도): 대한독립군단 소속 - 1920.06 봉오동 전투 대승     국민회군 (안무)

 "러시아" 지역 "한인 의병대"

  (사령관- 김표돌부사령관- 박개서김덕보): 대표적인 무력군    다반군 (최 니콜라이): 대표적인 무력군    독립단군 (박 그리골리)

 이항군 (임표ㆍ고명수→ 박일리아): "상해 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 지지

 기타 부대

 자유 대대 : "이르쿠츠크 파(러시아)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 의회" 지지       이청천 부대 (지청천)

"자유시"에 집결한 부대 (1921.01~03) :  밀산 이만 자유시

 박두희 (북로군정서)      • 이동휘 연계 부대      • 지청천 부대      • 홍범도 부대        • 안 무 부대

 "자유시"에 가지 않은 부대

• 김좌진 (북로군정서) : 밀산→ 이만→ 북만주로 회군    • 기타 부대 (이범석ㆍ김홍일 등) : 밀산에서 철수

 해 체 (1921.06): 1921.06월, "자유시 참변"이후, "대한독립군단"은 여러 부대로 재편되었다.

• 고려혁명군 (오하묵): 1921.08 이르쿠츠크 주 이르쿠츠크→ "적군 제5군"으로 부설     • 대한의용군사회 (이용): 1921.10 연해주 이만 시 (달네레첸스크)→ "적군 특별보병대대"로 재편      대한독립군단 (이범윤ㆍ김좌진) : 1922.08 흑룡강성 동녕현 (東寧縣)→ 잔존병력 재조직      적기단 (최봉설): : 1923.01 연해주 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고려혁명군 (김규식): : 1923.05 길림성 연길현 (延吉縣)      대한독립군정서 (현천묵) : 1924.03 흑룡강성 동빈현 (同賓縣)

서일

※ 서일 (徐一ㆍ서기학(徐夔學)ㆍ1881~1921ㆍ40세ㆍ호- 백포(白圃)) :  북로군정서 총재

1902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 망명했다. 1911년경,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1919, "김좌진"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 "31운동" 이후, "중광단"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 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대한정의단대한군정회"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김좌진이범석"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 "총재"를 맡았다1921,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06.28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2달 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4. 안전지대인 "이만 시(Iman자유시)" 집결 목적

그 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홍범도"의 소개로, "박 일리아 연대장(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 알게 되고, "박 일리아""소련 교관""한국 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밀산(密山중국 흑룡강성 계서시(鷄西市)에 위치한 항일 투쟁지)"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 서일)"1921.0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흑룡강" 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 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 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에 집결하였다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문창범)자유대대(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 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이에 1921.01월 중순~ 0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5. 사건 전개

당시 "러시아""러시아 내전" 중이라,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반 혁명"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여기에 더해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04월에 "일본"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 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군""적군파"에 가담했는데, "일본군"1920.04.04~0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볼셰비키 기관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일반적으로 "한인의병대""이만군대다반군대"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 니콜라이"였다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 흑룡주정부""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6. 군권 장악통수권 갈등

수많은 부대가 총 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 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한다"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대 중, "자유대대(대한국민의회(문창범) 지지)""이항군(임표고명수)"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결국 "고려 공산당"내의 파벌인 "이르쿠츠크 파상해 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자유대대 : "이르쿠츠크 파(러시아)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 국민의회"를 지지  "임시 고려 군정회"로 개칭  승리  "대한독립군" "붉은 군대"로 편입  "이르쿠츠크"로 이동

이항 군 (임표ㆍ고명수  박일리아) : "상해 파(임정)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  "사할린 용대"로 개칭  패배

※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파리): 시베리아에 있는 도시ㆍ러시아 이르쿠츠크 주의 주도ㆍ러시아의 극동지역ㆍ우랄 지역ㆍ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동부 시베리아의 교통 요충지

"이항군"을 이끌던 "박 일리아 연대장(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 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 찾아가, "이항군대""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이동휘 계)" 인물인 "박애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자유대대대한국민의회"측과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총사령관)그레고리예프(참모부장)"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 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 무력세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0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다가 실패하였다.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다시 "그레고리예프(연대장)박일리아(군정위원장)" 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다반군대" "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 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반군대"에 의해 무장 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 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오하묵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코민테른(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갈란다라시월린(총사령관)오하묵(부사령관)군정위원(김하석채성룡)"을 임명하였다 "박 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 섭했으나, 실패하였다.

코민테른(3인터내셔널) : 1919.03, "모스크바"에서 조직한 "공산주의자 국제조직"

1921.06.06,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임시 고려군정회 총사령관자유대대)"06.7"자유시" 전 부대를 소집하였다. 자신이 "고려군정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군정위원장 "박 일리아(할린 의용대이항군)"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 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 일리아""고려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06.27, 오후11"그레고리예프도 연대장(사할린 의용대이항군)""갈란다라시윌린(임시 고려군정회 총사령관자유대대)"에게 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06.28, "자유시 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29연대장"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 의용대""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이항)"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7. 시간별 정리

1918.11.11 : "독일"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 종료.  "일본군""시베리아"에 출동했지만, "붉은 군대"와 싸우던 "미국체코슬로바키아" 등 연합군이 철수하여, "일본 국회""러시아"에서 "일본군"을 철수하기로 결의

1919.03.01 :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일본군 19사단""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1920.06.06 : "봉오동" 전투"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단"과 싸워, 대승

1920.10.21 : "청산리" 전투"김좌진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연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1921.01~03 : "대한독립군단""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 모음.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

1921.06.27 : "소련 붉은 군대""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 공격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내용 :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다른 교과서에서는"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붉은 군대(소련군)와 하얀 군대(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하석 (金夏錫? ~ ?) : 사회주의운동가대한국민의회의 군정부장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의장 

1921.02, "대한국민의회"의 군정부장을 역임하였다. 이로보아 "이르쿠츠크 한인집단"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1921.03,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장)"로 활동하였다 1921.06월부터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전 약 4개월 동안 "상해파(上海派)""이르쿠츠크파""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의 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는데, 당시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 지략가는 "김하석"이었다 .

"김하석""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스미야스키"를 배경으로 시베리아에 진출한 "상해파" 인물들을 체포, 투옥하는 데 민완을 발휘하였다 "자유시참변"을 규탄하는 "간도계(間島系)" 11개 단체의 성토문에 의하면, "김하석"이 간도계 한국독립군을 "러시아 당국""일본밀정"으로 고발하였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모르는 "러시아군대""한국독립군에 총격을 가하게 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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