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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사건- 23.03 : 황옥 경부 폭탄사건 (의열단)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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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옥 경부 폭탄사건"은 1923년 3월 22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였던 "황옥 (黃鈺ㆍ1885~ ? )"이 "김시현및 다른 의열단 단원들과 협력해서, 국내 폭탄 밀반입 시도에 관여한 사건을 말한다.

 

1. 황옥 경부 폭탄사건 (黃鈺 警部 爆彈事件)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황옥"이 자신의 재가를 받은 작전에 따라 활동한 것이라고 증언했. 하지만 "김원봉김시현""황옥이 의열단원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호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에, 그가 "의열단원"이었는지, 일본 경찰의 "프락치"였는지, 또는 양자에 모두 발을 걸친 "이중간첩"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황옥"이 친일파였는지, 독립투사였는지, 의견이 엇갈린다그가 "위장 친일파"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과 "의열단"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정보를 빼내기 위한 일제 "밀정(스파이)"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 대립된다.

밀정

 영화  밀정 (密偵The Age of Shadows2016 제작)

감독 : 김지운출연 : 송강호공유한지민 / "황옥 경부폭탄사건"을 베이스로 한 픽션영화이며,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1983.11.08, 민주화 시위 도중, "서울대 도서관 건물"에서 추락해 숨진, "황정하(서울대 도시공학과 4학년 재학1960~1983)" "황옥"의 손자이다.

2. 황옥 (黃鈺ㆍ1885~ ? ㆍ별칭 : 황만동 (黃晩東)서울 출신)

"경기도 경찰부 경부 (경감급중간간부 직위)""의열단 (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1920,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근무할 때, 의열단 단원인 "김시현(金始顯)"과 접선한 뒤,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1923, "김상옥"이 일으킨 "종로경찰서 투폭사건" 이후, 사건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자, "단둥(安東)"을 경유하여, "톈진(天津)"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전해진다(이때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김시현" 등과 함께, "의열단"의 비밀 계획에 동참했는데, 폭동 유발과 요인 암살 공작용 폭탄의 밀반입을 시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1923.03.03, "중국 천진"에서 "김원봉"으로부터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통치기관의 파괴일제요인과 친일파 암살의 밀령을 받고, 폭탄(36)권총(5)을 수령하였다이를 "김시현김재진(金在震)권동산(權東山)" 등과 함께, 단둥(安東)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반입하기로 했다"의열단""황옥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다.

1923.03.22일 새벽, 열차로 폭탄권총전단을 몰래 옮기기 위해, "신의주"를 출발하는 "경성행" 기차를 탔으나, 의열단원 "김재진"이 일본 경찰에 밀고함으로써 거사계획은 실패로 끝났으며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이 과정에서 "김원봉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김시현김진기조동근홍종우홍종무 유석현" 9명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황옥"은 재판정에서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 형에 처해졌다. (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 "김지섭""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0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되었고,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조선 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김시현"은 해방 후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2대 민의원"을 지냈고, 당시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을 일으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60"419혁명"으로 풀려난 후에, "민의원"에 재차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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