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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사건- 37.06 : 보천보 습격사건ㆍ갑산파 (보천보 동지)ㆍ김일성(25세)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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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습격사건 (普天堡 襲擊事件ㆍ제2 동흥사건 (東興事件))"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ㆍ최현 부대"와 "조국광복회"의 "박달ㆍ박금철 부대" 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습격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한국의 일부 지역이 "일제"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1. 보천보 습격사건 (普天堡 襲擊事件2 동흥사건 (東興事件) )

일 시 : 1937.06.04.~05 (김일성 25)

장 소 :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보천보,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

결 과 : "조국광복회"의 조직 궤멸 위기혜산사건(惠山事件) :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교 전 :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김일성최현 부대)조국광복회(박달박금철 부대)

지 휘 : 김일성최현 (동북항일연군) / 박달박금철 (조국광복회)

병 력 : 동북항일연군조국광복회- 200여명 / 일본- 06.04일 (경찰 5명)ㆍ06.05일 (경찰추격대 30명)

피 해 동북항일연군조국광복회 - 25명 사망30명 부상 / 일본 경찰 - 경찰추격대 7명 사망14명 부상 / 06.04, 민간인 2명 사망 (요릿집 주인2 여아(순사부장의 딸)) / 06.05, 경찰추격대 7명 사망14명 부상 / 전소한 총 피해액- 50,000 (경찰주재소면사무소체국산림보호구)

보천보

"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 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 국경"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 졌고,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난 후,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1935.02.13, "이홍광(李紅光, 1910~1935)""평북 후창군 동흥읍(, 양강도 김형직군 후주고읍)에서 일으킨 "동흥(東興) 습격사건""보천보 습격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동아일보" "보천보 습격사건" "2 동흥사건(第二 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2. 갑산파 (甲山派) :   갑산파 : 박금철리효순김도만허석선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던 정치 파벌로, "보천보 전투" 등에서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싸우다가 조선으로 잠복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갑산파"의 명칭은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났던 "함경남도 갑산군"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산군은 현재는 량강도에 속해 있다)

"북한"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박금철" 등 숙청당한 인물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르고 있으며, "조국광복회 조직ㆍ혜산 사건"을 서술할 때도, 당시 체포되어 사형당한 "리제순(이효순의 동생)"이나, 옥중 고문으로 건강을 잃은 "박달" 등 해방 후, 북한 건국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① 해방 후, 1950년대까지

해방 후, 1950년대까지의 권력 투쟁을 논할 때는 "빨치산 파ㆍ김일성 파"와 같은 개념으로 쓰인다. 이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으로서, 광복 이후 "남로당파ㆍ소련파ㆍ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1930년대, "조국광복회 사건(혜산 사건)" 때, 국내에서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 무장조직" 출신으로서 "김일성"과 손을 잡아 집권했으나, "경제적 수정주의"를 내세우다가, 1967년 숙청당한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빨치산 파ㆍ김일성 파ㆍ만주 파ㆍ88여단 파" 등 "김일성 친위그룹"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② 1967년, 기존 권력층의 일부 숙청

그러나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기 전, "후계 구도" 확립 문제ㆍ경제 정책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인해, 1967년 기존 권력층의 일부가 숙청되는데, 이때 실각한 "박금철ㆍ리효순ㆍ김도만ㆍ허석선" 등을 따로 묶어, "갑산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김일성 유일사상"이 만연하기 전, "실학"과 같은 "민족전통의 혁명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967년 "노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 간부들에게 "목민심서"를 읽게 하고, "실학"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등, "부르주아 사상ㆍ수정주의ㆍ봉건유교 사상"을 퍼뜨렸다고 비난을 받고, 숙청당했다.

"갑산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기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고,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제체"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ㆍ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었다.

3. 김일성 (金日成ㆍ1912~1994ㆍ향년 82세)

1937.06.0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14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36년 이래,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무장독립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전해져,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조선의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000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0,000엔으로 오르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군정"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ㆍ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인 김일성)"으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상조(독립운동가ㆍ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은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

개요

"김일성ㆍ최현"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 부대"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ㆍ박금철"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경찰주재소ㆍ면사무소ㆍ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

1937.06.0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06.0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ㆍ일본 2세 여아(순사부장의 딸))이 사망했으며, 06.0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 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 때문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구성원들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처벌받는 소위 "혜산사건(惠山事件)"으로 지하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11.13일에 사살되었다"는 1937.11.18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있으며, 같은 날 "동아일보ㆍ매일신보ㆍ경성일보" 등도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9개월간의 "장기 정간" 끝에, 1937.06.03.일에 복간하여, 흩어진 독자들을 다시 모집해야 할 상황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달리, 유독 "동아일보"만 06.05일에 전날 밤 일어난 "보천보 사건"으로 2차례나 호외를 간행한 것은 그 사건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겨서라기보다, "복간을 홍보하기 위한 전단지"로 배포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1938.02.23일자, "매일신보ㆍ조선일보"는 "최현도 전사했다"고 보도하였다. "보천보 사건" 당시, "동아일보"는 "최현"은 나이 50살이 넘었으며, "비적활동"을 수 십 년간 했다고 보도했으므로, "북한의 최현(崔賢, 1907~1982)"과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상당하지만, "김일성"의 경우와 달리,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논란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東北抗日聯軍 第一路軍 二軍 六師長)"으로, 1937.11.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이 근래에 발굴된 당시 일제시기 기록과 신문기사에서 확인된다.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1937.06.04일 "보천보 사건" 이전에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는데, "매일신보(1936.11.27일자)"에는 "김일성의 나이가 37~8세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했다. "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의 1937.05월호에는 "김일성"이 30세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과 "소련군 88여단" 관계자들의 후일 증언을 참고하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은 자신이 한 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남의 공적을 가로챈 "가짜"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름이 1919년 "3ㆍ1운동" 무렵, 늦어도 1920년대 초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동아일보"가 1937년 "보천보 사건" 당시, 2차례 호외를 발행한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비로소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북한 김일성"이 그 당사자가 맞으므로, "가짜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다. "동아일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일도 없었으며, "북한 김일성"은 그 사건의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도 아니면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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