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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김대지 (1891)ㆍ의열단 간부ㆍ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

by 당대 제일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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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 (金大池ㆍ1891~1942ㆍ향년 51세)"와 같이 일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독립 운동가들로, "의열단"을 함께 조직한 "김원봉(1898~1958)"ㆍ상하이 임시정부수립에 함께한 "신채호(1880~1936)"ㆍ무장 투쟁에 함께한 "지청천 장군(1888~1957)ㆍ김좌진 장군(1889~1930)ㆍ김동삼(1878~1937)" 등이다.

 

1. 김대지 (金大池1891~1942향년 51)

독립운동가 (의열단 간부조선공화정부 내무총장)ㆍ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

•  출 생 : 경남 밀양군 밀양읍      •  사 망 : 만주국 빈강성 파언현        •   : 일봉(一峰)   

•  사 인 : 병사 (폐병기관지염)오랜 병마로 고생     •  별 칭 : 대지(大地)치환인식(仁埴)정창(丁昌)

•  : 박선이      •  자 녀 : 42(철수정숙철준철중화숙철우)      •  수 상 : 건국훈장 독립장(1980)

김대지

본명은 "대지(大池)"인데, 사료에 따라서는 "大地大智"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부모가 천한 이름을 지으면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돼지"라는 음에다가, 큰 못이라는 뜻으로 "大池"라고 지었다고 한다.

"3ㆍ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재산을 처분하여 비축한 자금과 일부 친지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아직 어린 두 남매, 임신 중인 부인, 그동안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의 따뜻한 전송도 받지 못한 채, 야밤에 고향을 떠나 해외 망명길에 올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갔다.  이곳의 독립투사들과 의논하여, "길림성(吉林省)ㆍ영고탑(寧古塔ㆍ현, 흑룡강성 영안현)에 국내에서 마련해온 대부분의 자금을 투입, 수십만 평을 구입하여 농장을 건설하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평소에 경험을 통해, 군대 조직은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황상규"와 비밀결사단체 창단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무렵, 한 청년이 "길림군 정사"를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차후에 "김대지" 추천으로 "의열단 단장"이 된 "황상규의 처조카"인 "김원봉(1898~1958ㆍ60세)"이었다. "김원봉"을 처음 대면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다. 담대하고 침착한 "김원봉"이 마음에 들어, 그를 지도하면서 차후 결성될 비밀결사조직의 일선에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1929.05월경, 기대를 걸고 있었던 "김동삼(1878~1937ㆍ59세ㆍ서로군정서 참모장)"이 "하르빈"에서 밀정의 고발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12월경에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쏜 총에 피살되었다. 이 소식은 "만주지역 민족유일당" 결성에 온 정열을 쏟고 있었던 그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이 충격은 지병인 "폐병ㆍ기관지염"을 악화시켰다. 이후 그의 정신적ㆍ육체적 기력은 쇠잔해버렸고, 술ㆍ담배로 분통을 삭히면서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시 일어나려는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궁핍한 그의 가정 형편이었다.

1920년 중반, "영고탑"에서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는, 동지들의 도움과 밀양 처가의 지원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나, 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재정 확보가 막혀 병든 자식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을 정도로 빈궁하였다. 그는 "유상툰ㆍ빈현ㆍ하르빈" 난민소 등지를 전전하다가, "아성현"에 정착하여 어린 시절에 조금 익혀 두었던 "한의학"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아내와 자녀 2명"을 잃는 암담한 상황을 겪었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본격적인 해외 망명길에 올라 당도한 곳은 중국의 동"삼성(東三省)"이었다. 그는 이곳의 독립투사들과 의논하여, "길림성(吉林省)영고탑(寧古塔현, 흑룡강성 영안현)"에 토지 수십만 평을 구입하여 농장을 건설하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그가 국내에서 마련해온 대부분의 자금도 여기에 투입되었다그러던 중 그는 1919.03월 하순경, "중국 동삼성"의 독립운동자 대표의 일원으로 "김동삼조소앙ㆍ이회영ㆍ이시영" 등의 지사들과 임시정부수립 준비를 위해 "상해"로 갔다이 무렵 "상해"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김규식ㆍ이시영"30여 명이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이를 계기로 "프랑스 조계지역"에서 "현순"을 총무로 한, 임시사무소가 개설되면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마침내 1919.04.10, 29명의 애국지사가 "프랑스 조계지역"에서 회합하여 "임시의정원"을 발족시켰다"의정원"에서는 "의장 이동영ㆍ부의장 손정도"를 각각 선출하였으며, 11일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하고,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 통과시켜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아울러 "이승만""국무총리"로 선임하는 등 각료 명단도 발표하였다이와 비슷한 무렵에 국내 3, 해외 2개 모두 5개의 "임시정부"의 공포가 있었다김대지는 이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임정" 인연을 맺게 된다.

1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는 410, 11일 양일간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출석한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내 "31독립운동"을 추진한 49인이 보낸 "현순손정도", 시베리아 만주등지에서 "근업회ㆍ경학사ㆍ한족회ㆍ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해외 독립군 기지를 구축했던 "김대지이동녕이회영이시영조완구김동삼신채호",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온 "이광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운홍",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여운형" 등 당시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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