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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강우규 (1855)ㆍ한의사ㆍ조선총독 저격 (실패)

by 당대 제일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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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姜宇奎ㆍ1855~1920ㆍ65세ㆍ호: 왈우(日愚)): 한의사ㆍ독립운동가ㆍ1919.09.02일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1. 강우규 (姜宇奎1855~1920향년 65)

일제 강점기 한의사독립 운동가 (서울역 앞 광장에 동상이 있음)한인촌 "신흥촌(新興村)"건설ㆍ1919.09, "5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64세 때대한노인단 소속)ㆍ "사이토 마코토" "남대문 역(, 서울역)"에서 내리다가 "강우규" 등의 폭탄습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1858~193678일본 해군관료정치가  : 해군병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유학한 자수성가형 인물로, 해군 대장해군 대신을 지냈다. 1919~1927년까지 제3, 1929~1931년까지 "5대 조선총독부 총"으로 근무했다.

 출 생 : 조선 평안도 덕천     •  사 망 : 일제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사 인 : 사형 (교수형)        : 왈우(日愚)

  유 해 : 처음에는 공동묘지(은평구 신사동 소재) 1954년 수유리로 이장1967년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

   종 교 : 유교(성리학) 개신교(장로교)      자 녀 : 4명의 자녀 / 장남- 강중근(~2015) / 장손녀- 강영재(~1985)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 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로 잠입했다.

1919.09.02,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남대문 역(, 서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폭탄은 터졌으나 빗나갔고, 빗나간 폭탄으로 인해, 수명의 구경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강우규가 던진 폭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신임 "총독 사이토"를 환영 나온 "일제 관헌추종자들 37"에게 중경상을 입혔다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으며,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임승화" 등의 집에 숨어 다녔다도피 중,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은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09.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민간인 사상 혐의""사형" 구형, 1920.11.29."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받고, "교수형" 당하기까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다"독립기념관""어록비"가 제작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가 적혀 있다"단두대상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단두대상 유재춘풍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유신무국 기무감상 (有身無國 豈無感想)"

"지바(경기도 경찰부장)는 "미운 마음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강우규는 우국지사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강우규 의거""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으로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의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특히 그의 의거는 물론 재찬과정수형생활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과정 자체가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후, 당시 "경성(서울)"에 남아있던 유가족은 "장남 강중근ㆍ손녀 강영재"가 있었으나, 1985.12 "강영재"가 별세한 후, 후손은 절손되었다.

< 연 보 >

1859 : 평남 덕천에서 출생  1883 : 함남 홍원으로 이주, 한약방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아 교육 계몽운동을 펼침   1911 : 북간도로 망명   1914 :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애국지사 "계봉우"와 교류   1915 : "지린성 라오허 현"으로 이주, 한인 동포들과 마을을 이루고 "신흥동"이라 명명

1919 : 31운동 소식을 듣고, "신흥동"에서 "독립선포식"을 거행,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승교김치보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민국 노인동맹"에 가입, "라오허 현 지부장"으로 활동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 잠입.

• 1919.09.02: "남대문 역(, 서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5대 조선총독부 총독)"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 이후 체포됨   1920.11.29 :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

2. 교육 계몽 활동

"조선 평안도 덕천"에서 출생했다지난날 한때, "경상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경상도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그는 "평안도 덕천" 귀향 후,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였다1884년부터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푸는 한편, 아이들에게는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다전언에 의하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 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으로 이주한 그는 농사를 하지 않고, 읍내에 자리를 잡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특히 그는 "홍원"으로 이주 시, "상당액의 거금을 갔고 왔다"고 알려지고 있다"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강중건"을 앞세워 잡화상을 운영하였다상점에서는 주로 물감담뱃대면사포목 등을 팔았다고 한다아울러 그는 장사꾼들에게 장사 밑천도 되어주고, 돈을 저리로 빌려주기도 하였다.

1905,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라오허 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1910,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그는 이에 크게 분개하였다당시 그는 50이 넘은 "중노인"이었다.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하자, 국권으로 회복하기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1910년 가을, 그는 망명을 결심하고, 우선 큰 아들 중건부부와 자녀 3명을 "노령"으로 이주시켰다1911년 봄, "함남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사하였다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1915, "요동 라오허 현"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이 마을은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룩된 것이며, 후에 "노령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1917, "지린 성 동화 현""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그 뒤, "신흥촌광동중학교" 다른 한인 교포에게 넘긴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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