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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사건- 35.02 : 동흥 습격사건ㆍ이홍광ㆍ동북인민혁명군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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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東興)  습격사건"은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전신)" 1군 1사장(師長) "이홍광"이 부대원 200여명을 이끌고,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

 

1. 동흥 (東興)  습격사건 

당시, "동흥 경찰서"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동흥"은 소도시로 산골 마을인 "보천보"보다, "경찰"도 훨씬 더 많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지만 "일본" 측 피해규모는 더 컸고, 따라서 파장도 더 컸다.

일 시 : 1935.02.13. 새벽     결 과 :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줬음

장 소 : 평북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 김형직군(金亨稷郡) 후주고읍(厚州古邑) "동흥읍"은 약 500여 호에, 주민 2,500여 명이 살던 "경찰서학교우체국" 등이 있는 "평북 최북단" 국경도시이다.

병 력 : 동북인민혁명군- 200여 명/ 일본경찰- 47

피 해 : 동북인민혁명군- 전사 3중상 7부상 10여 명  /  대원 양상오(27)진농화(38)가 경찰에 체포  /  일본 경찰- 일본인 6명 살해부상 3(경관 2가족 1)   /  납치 12(일인 2친일분자/부자로 지목된 한인 10 친일 주구배 집 1채 불사름  /  재산가ㆍ친일파 집 16채 습격상당량의 금품 취득  /  무고한 주민 2명 사망5명 부상

 교 전 :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전신) 1

 지 휘 : 1사장(師長) 이홍광(李紅光ㆍ1910~1935ㆍ25세)  당시 이홍광은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 소문은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이라 한다 그는 사건 3개월여 후인 1935.05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이홍광

"이홍광 부대""동흥 습격전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동아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경성일보조선중앙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었고, "중국 동북"에서 발간되는 "대동보(大同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으며, "일제 당국"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 전투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년 후에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매일신보동아일보"는 이를 "2동흥사건"이라 칭하였을 정도로,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다하지만, "김일성 집권" 후로, "동흥 사건"고의적으로 은폐되고, "보천보 사건""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항일 공적"으로 엄청나게 부풀려져,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있다심지어는 "보천보 사건"이 최초의 "국내 진공사건"이라며, 근거 없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다.

북한에서는 "이홍광""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동흥 사건""경찰관 5"이 상주하는 "주재소" 밖에 없는 국경의 "면 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도 더 컸고, 2년 먼저 일어났는데도 일반에는 "보천보 사건"만 알려져 있을 뿐, 거의 잊혀져 있다.

2. 개 요

"장세윤""이홍광 연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935.02.13일 새벽 1시경, 이홍광은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넜다남 세 방면으로 분산된 1()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동흥 시가로 진입했다이 때 대원들은 장총과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되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고 있는 경찰서를 향해,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부대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에게는 미리 지목한 대상에 따라, 동흥 제일의 재산가이며, 재목상(材木商)인 "장영록"의 집을 습격케 하고, 기타 친일 주구배로 알려진 한인, 일본인 등을 습격케 했다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 때 1()는 만주국 측의 전신전화 기관은 파괴했지만, 동흥 읍에 있는 일제 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하지 못한 까닭에, 적의 응원대가 올 것을 우려해서 조기에 철수했던 것이다이 작전에서 이홍광 부대는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으며, 친일 주구배 집 한 채를 불살라 버렸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그러나 이 때, 이홍광 부대도 전사자 3, 중상자 7, 부상자 10여명을 냈고, 대원 "양상오(27)ㆍ진농화(38)"가 경찰에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또 교전 와중에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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