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는 1923.01.03~06.07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운동 계파간의 회의"를 말한다. 독립운동사에 무려 "135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효과적인 투쟁을 못한 이유도 "주도권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국내ㆍ상하이ㆍ만주ㆍ북경ㆍ간도ㆍ노령ㆍ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
1. 국민대표 회의 (임시의장 : 안창호ㆍ의장 : 김동삼ㆍ부의장 : 안창호/윤해)
이 회의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개조파)"의 논쟁 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
2." 임시 정부"를 둘러싼 갈등 : 기호파ㆍ서북파ㆍ수호파ㆍ개조파ㆍ창조파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념ㆍ출신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ㆍ대립을 겪고 있었는데, 단순히 "임시정부 세력"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명분일 뿐이고, "임정 주도권"을 위한 "창조론ㆍ개조론"인 것이다. 1921.0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등도 "최고의 대표가 되겠다는 주도권 쟁탈"로 인해, "독립군단"이 와해되었고, 일본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독립 세력을 각개 격파"하였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파벌 조장 의식이 남다른 민족"이다 보니, 임정 내에서도 "주도권 쟁탈"을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임시정부" 자체의 "대표성" 또한 문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성 정부의 승인ㆍ개조" 문제는 "임시정부"의 분열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1923.01.03.일)"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ㆍ안창호ㆍ이동휘ㆍ박용만ㆍ문창범" 등 각지의 명망가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채호ㆍ김숙ㆍ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 "문창범"은 "한성정부의 승인ㆍ개조" 문제로 "임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세력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장 독립운동"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년 탈퇴하였고, 뒤이어 "안창호ㆍ남형우ㆍ 김규식" 등도 탈퇴하여, "임정"은 사실상 "정부의 역할ㆍ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기호세력"이 지지한 "이승만"은 "이율배반적 활동"으로 독립ㆍ항일 투쟁을 더 어렵게 하였다. 일종의 "지역감정 갈등"으로, 이러한 "기호파ㆍ서북파"의 대립은 인맥을 타고, 암투로 발전하였다. "출신지"도 작용했지만, 사실은 어느 지역 편을 드느냐, 성향이 어떠하냐(주로 보수ㆍ진보갈등)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
① "지역 색"에 따라
• 기호파 : "임정" 주류 - 서울ㆍ경기도ㆍ충청도→ "기독교세력"이 주축→ 여운형→ 이승만 지지
• 서북파 : "임정" 비주류 - 평양ㆍ개성 일대→ "무장투쟁"을 주창하는 "사회주의"세력→ 안창호
• 기 타 : 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 - "기호ㆍ서북지역"에 비해, 내세울 근거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② "이념"에 따라
• 이승만 계 : 외교독립론 • 안창호 계 : 실력양성론 • 박용만 계 : 무장독립론
③ 임정 "주도권"에 따라
• 임정 수호파 : 김구ㆍ이동녕ㆍ조소앙 • 임정 개조파 : 안창호ㆍ여운형ㆍ김동삼ㆍ이동휘 (상하이ㆍ만주 기반)
이동휘→ 종래 "무장 독립론"을 주장했으나, "개조론" 지지ㆍ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ㆍ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 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여, 노선의 일치보다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
• 임정 창조파(해산파) :김규식ㆍ신채호 / 신숙ㆍ문창범ㆍ윤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반 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주창ㆍ"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최고기관)"을 설립하자는 입장
3. 설명 : ①항 "지역 색"에 따라
실제 "윤치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서북파(안창호 중심)"와 "기호파(이승만ㆍ여운형)"을 중심으로 서로 간에 비난이 끊이지 않자, "이런 것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일갈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으며, 여운형 등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자신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윤치호"는 "서북파"가 오랜 세월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ㆍ근대 교육"을 받아들여, 지도자들로 부상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북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기호인들을 더 증오하기에 일본인들에 아첨해 기호파에 대한 비열한 계략을 동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호인들의 결사는 응집력이 없기에 불가능할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신사적으로 대하자."고 하였다.
• 기호파 : 임정의 주류세력, 서울ㆍ경기도ㆍ충청도→ "기독교세력"이 주축→ 여운형→ 이승만 지지
조선시대 "수도(한성)"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보수적 성향
• 서북파 : 임정 비주류 세력, 평양ㆍ개성 일대→ "무장투쟁"을 주창하는 "사회주의"세력→ 안창호
조선시대 내내, 열등한 지역으로 취급되어, 기존 "기호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려 하였으며,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 심지어는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서북지역"은 "고려의 개성ㆍ고구려의 평양" 등 옛 왕조의 고도(古都)가 많이 남아 있어서 문화적 전통 면에서 자부심이 강했다.
• 기타 : "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는 "기호ㆍ서북지역"에 비해, 내세울 근거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전라도"의 경우, 강점기 이전에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ㆍ독립군의 검거" 등으로, 직접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세력들은 사실상 뿌리를 뽑히다시피 한 상태였고, 당시 경제기반이었던 "농업 부분"에서 "부"를 축적한 지주들이 국내의 보수세력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에 소극적이었으며, 이들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고, 후에는 "총독부"와 타협적인 노선을 걷기도 했다. (대표 인물 : "김성수" - 경성방직 주식회사를 설립, 동아일보 창간)
4.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ㆍ"국민대표준비위원회" 위원 명단
1921.02월, "독립운동가 15인(김창숙ㆍ박은식ㆍ원세훈 등)"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격문에는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ㆍ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 패궤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한편 "임정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ㆍ박용만ㆍ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대표들은 1920.0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권성근(하와이 독립단 대표)"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1921.05.06일, "만주"지역의 "김동삼ㆍ이탁ㆍ여준" 등이 "액목현(額穆縣)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임정을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ㆍ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08월 "국민대표회 준비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 준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임시정부 옹호파"의 반대, 대회 경비의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2개 회의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2개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 준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5. 회의 개최 (임시의장 : 안창호ㆍ의장 : 김동삼ㆍ부의장 : 안창호/윤해)
1922.05월 "국민대표회 준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09.0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중국 상하이"에서 1923.01.03일에 개막하였다. 여기에는 "국내ㆍ상하이ㆍ만주ㆍ북경ㆍ간도ㆍ노령ㆍ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 먼저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01.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본회의에서는 먼저 "준비위원장 남형우"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곧이어 회의를 진행할 "의장단 선출"에 들어갔다. "의장단 구성"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단체들의 지역적 기반을 고려하여,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안창호ㆍ윤해" 등을 뽑았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 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ㆍ재무ㆍ외교ㆍ생계ㆍ교육ㆍ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즉 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6. 국민대표회의 갈등 (창조파ㆍ개조파)
1923.03.09일, "본회의"에서 공포된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ㆍ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ㆍ노령"에 기반을 둔 "신숙ㆍ문창범ㆍ윤해" 등의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반 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반면, "노선 일치"보다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여운형ㆍ김동삼ㆍ안창호" 등은 "상하이ㆍ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시정부가 전 민족적 운동인 3ㆍ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종래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는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7. "창조파"의 탈퇴
1923.03.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창조파"는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고, "창조파"의 탈퇴로 본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지자, 03.28일부터는 "창조파ㆍ개조파"가 참여하는 "비공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시국문제 토론을 유보할 것"과 "개조파"인 "안창호ㆍ김철수" 등이 "임시정부ㆍ임시의정원"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도록 설득할 것을 합의하였다.
04.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파ㆍ창조파"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때, "서로군정서 군ㆍ한족회"는 각각 "대표 소환"을 지시하여, 당시 "만주대표"로 활동하던 "개조파"의 "김동삼ㆍ배천택ㆍ김형식ㆍ이진산" 등이 결국 05.15일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
8. 회의 폐회
06.03일, "창조파" 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06.07일, "창조파"는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임시정부"도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0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9. 회의 결렬 이후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ㆍ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 "통일적 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이로써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는 자신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앞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국민대표회의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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