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李會榮ㆍ1867~1932ㆍ64세)"는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헤이그밀사 사건"의 설계자이며, "신흥무관학교(서간도)"의 설립자이다. 7형제 중에 6형제 (50여 일가족)가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서간도)로 망명했다. 당시 6형제들이 정리한 땅은 8,821,000 m2 로 여의도 면적 (2,900,000 m2)의 3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1. 이회영 (李會榮ㆍ1867~1932ㆍ향년 64세)
사상가ㆍ교육인ㆍ독립협회 활동ㆍ헤이그밀사 사건의 설계자ㆍ신흥무관학교(서간도) 설립자ㆍ신흥 무관학교(독립군의 메카(학비ㆍ숙식 무료)ㆍ신흥강습소→신흥중학교) ㆍ1911~1920까지 3,000명 졸업생(지청천 장군ㆍ약산 김원봉 등 배출) ㆍ의열단(김원봉)을 후원ㆍ신흥 무관학교 이후 20여 개의 학교 설립
• 출 생 : 조선 한성부 저동(苧洞) • 사 망 : 중국 다롄시→ 서울현충원에 안장ㆍ우당기념관(서울 종로구 신교동)
• 사 인 : 옥사 (고문 후유증ㆍ자결 소문은 조작)ㆍ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조카)"가 일본 경찰에 밀고→ 체포
• 호 : 우당 (友堂) • 종 교 : 유교(양명학)→ 기독교(감리교)
• 부 모 : 부- 이유승(이조판서,1835~1907)ㆍ모- 동래 정씨ㆍ7형제 중 4째 아들
• 처 : 달성 서씨( ? ~1907) 2남 1녀ㆍ후처 : 이은숙(1889~1979) 3남 4녀 • 자 녀 : 5남 5녀
• 서씨 2남 : 이규학ㆍ자부- 조계진(1897~1996)ㆍ조정구의 딸ㆍ흥선대원군의 외손녀 / 손자- 4남 이종찬(李鍾贊ㆍ1936~ ) 육사16기ㆍ정치인ㆍ공무원ㆍ외교관ㆍ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1980)ㆍ민주정의당(1980)과 민주자유당(1990)창당 주역ㆍ안기부장(1998)ㆍ초대 국정원장ㆍ4선 국회의원(11~14대)ㆍ김영삼과 경쟁하여, 패배한 뒤 탈당→ 김대중 진영 합류
• 후처 2녀 : 이규숙ㆍ사위- 장기준(1905~1965ㆍ타명 장해평)ㆍ독립운동가 / 5남- 이규동ㆍ손자- 장남 이종걸(1957~ ) 국회의원
• 가 족 : 동생-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 손자- 이종찬(정치인)ㆍ이종걸(국회의원) / 친족- 이상설ㆍ족숙- 이유원
• 사 돈 : 신익희ㆍ김홍집ㆍ흥선대원군ㆍ흥친왕ㆍ이준용
"독립운동가ㆍ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ㆍ혁명가"로 기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는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 손으로,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으며,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장훈학교ㆍ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으며,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ㆍ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다.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1931.09월, "흑색 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ㆍ암살을 지휘하였다. "상하이 북역사건ㆍ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ㆍ톈진항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폭파사건ㆍ톈진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 등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는 사명감 속에 계속 실행됐다.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속에 이듬해,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실현된 것이다.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었다. 1932.11월, "상하이" 항구에서,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 연보 >
1898 :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 → 1905 :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 → 1906 : "안창호ㆍ전덕기ㆍ양기탁ㆍ이동녕ㆍ신채호ㆍ노백린"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 → 1907 : 중국 동삼성(만주)에 "이상설ㆍ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 → 1908 : 서울 상동교회의 "상동 청년학원" 개설 → 1911 :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 → 1912 :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 1924 : 재 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조직ㆍ항일구국연맹 조직(1931) 등 → 1928 : 재 중국 "조선 무정부 공산주의자 연맹" 창설 주도 → 1931 : "항일구국연맹" 창설 주도 → 1932.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ㆍ옥사
2. 가문 :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 손으로,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
9대가 정승ㆍ판서ㆍ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손ㆍ"양반가 출신"으로 "익재 이제현(고려시대 재상)"과, "오성 이항복(조선 선조 때 정승)의 10대 후손이었다. 부친 "이유승(李裕承)"은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7번의 "병조판서", 좌의정ㆍ우의정ㆍ영의정을 1번씩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다. "이항복" 이래, 부친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ㆍ판서ㆍ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3.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
"이상룡ㆍ허위"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온 가족이 독립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다.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서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가족 망명" 역시 "이회영"이 주창하여, "명문 양반가문"에서 "회영"을 비롯하여, 형 "건영ㆍ석영ㆍ철영"과 동생인 "시영ㆍ호영"등 7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명 일가족이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이석영(2째)"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재산은 "40만원"이었는데,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 원 (소 값으로 환산)~ 2,000억 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형 "석영"도 "말보다는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으로, "양부 이유원(고종 때 영의정)"으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주ㆍ상해" 등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ㆍ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석영ㆍ회영ㆍ호영" 3형제가 "만주ㆍ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가며, 장렬하게 순국했다. 1945.08월 해방이 되자, 5째 동생인 "이시영" 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11월에 귀국했다. "이현숙(3째 딸)"은 해방을 보았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28세에 "만주 창춘"에서 사망했다. 해방 후, 5째 동생인 "이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이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4. 7형제 중 6형제의 망명 (만주 서간도)
7형제 중에 6형제 (50여 일가족)가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서간도)로 망명 → 항일투쟁한 후, 20여 명만 생존ㆍ당시 6형제들이 정리한 땅은 8,821,000 m2 로 여의도 면적 (2,900,000 m2)의 3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① 건영 (健榮ㆍ1853~1940ㆍ87세) : 상해에서 독립운동 → 병사 / 조카 : 이규훈(1896~1950) 만주에서 독립운동 뒤 귀국ㆍ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
② 석영 (石榮ㆍ1855~1934ㆍ79세) : 상해 빈민가에서 아사ㆍ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로 받은 재산인 양주의 땅을 600억 원(시가 1,000~1,500억 원)의 헐값에 팔아서 군자금 형성 (서울 명동의 땅은 팔지도 못함)ㆍ일본이 나라를 빼앗자,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 생활비를 마련하여, 형제들하고 같이 만주로 망명, "경학사ㆍ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으로 헌신ㆍ독립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상하이에서 사망 / 조카 : 이규준(1899~1927) 독립운동가ㆍ일제 밀정인 "김달하" 등을 암살ㆍ"박용만(독립운동가)"의 암살자 중 한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잘못된 서술 / 조카 : 이규서(1912~1933), 숙부인 "이회영"을 일본경찰에 밀고하여, 체포당하게 함
③ 철영 (哲榮) : 신흥무관학교 교장 → 병사
④ 회영 (會榮) : 모진 고문 → 옥중 순국
⑤ 시영 (始榮ㆍ1868~1953ㆍ85세) : 유일한 생존자 → 초대 부통령ㆍ"김홍집"의 사위ㆍ초대 부통령(1948.07~1951.05)ㆍ제수 : 경주 김씨(1867~ ?) 대한제국 총리대신 "김홍집"의 딸ㆍ매제 : 신재희(1891~1943) 독립운동가ㆍ언론인ㆍ독립운동가ㆍ"신익희"의 6째 친형
⑥ 소영 (韶榮)
⑦ 호영 (頀榮) : 독립운동 → 행방불명ㆍ가족 전부가 일본군에게 몰살
※ 이석영 (李石榮ㆍ1855~1934ㆍ향년 79세)
1855년,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2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로 받은 재산인 "양주"의 땅을 600억 원(시가 1,000~1,500억 원)의 헐값에 팔아서 군자금 형성했다. 서울 명동의 땅은 팔지도 못했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자, 그는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 생활비를 마련하여, 형제들하고 같이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경학사(耕學社ㆍ독립운동단체)ㆍ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으로 헌신하였다. 장남인 "이규준(1899~1927)"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일제의 밀정인 "김달하" 등을 암살하고 "한커우(漢口)"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28세 나이로 병사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그는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1934년,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아사했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 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만여 석의 대자산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한 것은 망국 직후인 1910.12월이었다. 이때 그는 50대 후반 초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석영"의 6형제들은 4째 "이회영(1867~1932)"의 건의에 따라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을 단행했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혈성으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이들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간도에서 일구어 낸 것이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경학사ㆍ신흥무관학교"였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한인들의 자치 조직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는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 멸망 후, "독립전쟁"이라는 새로운 방략을 실천한 첫 시도였다. "이석영"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그런 "경학사ㆍ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5. 사망 원인
보통 그의 사망 원인은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64세에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32년 초, "중국 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하여, 자금ㆍ무기 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1월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려고 하던 차였다.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4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서곡인,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다. "일본 경찰"은 고문 행위를 숨기려고, "쇠창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낭설을 퍼트렸다.
1932.11월, 당시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대련수상서유치중 괴! 액사한 노인 (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이상한 로인)"이라는 기사가 "중앙일보"로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가 삼노끈(삼으로 만든 노끈)으로 목을 매서 자결했다"고도 보도되었다. 이 같은 기사의 실체는 즉각 확인되지는 않았는데,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하고, "그 노인이 이회영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그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김소묵(중국 항일운동가)"의 보고서에 의하면, "1932.11.17일에 일제가 뤼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밀정"들의 밀고 외에, 조선인 제보자들, 그리고 "임정 인사"의 일족들인 이들의 사상의 차이 역시 그를 밀고하여, 옥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일경의 이회영 체포 과정"에서, "4등 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 만난 인물인 "이규서(이회영의 조카)ㆍ연충렬"을 의심하였고, 증거를 가지고 그들을 추궁하여, "일경"에 밀정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
1932.10월, "이규서(이회영의 조카)ㆍ연충렬"은 다른 2명과 함께, "백정기"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조카 "이규서"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삼촌을 신고한 것 이외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충렬"은 "연병호(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2째 아들이자, "연미당"의 친정오빠이고, "엄항섭(독립운동가)"의 처남이었다.
6. 인 품
① 봉건적 인습ㆍ사상을 타파,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
여동생이 "청상과부"가 되자, 관습을 깨고, 과감하게 재혼시켰다. "대가족 망명" 역시 그가 주창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는 20살이 지나면서,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댓말을 사용함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긴 그의 품성이었다.
혁명가적 기질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나타난다. 당시 정서로, "이조판서 집 딸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집으로부터 데리고 온 뒤, "이 판서 집 딸 아무개가 급환(急患)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訃告)"를 냈다. 그런 후, 간단하게 장사를 치르고, 새 혼처를 찾아, 개가(改嫁)를 시켰다.
이 같은 풍모와 대인(大人)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이승을 떠날 때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반상(班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고치고,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지하고, 개가 재혼을 장려하는 등 혁명적인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실로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② 명예ㆍ지위는 초월
1898년(21세),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ㆍ이상설ㆍ이범세ㆍ서만순ㆍ조한평ㆍ여규형ㆍ이강연"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ㆍ신진 정치가들의 협력ㆍ내치(內治)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가는 나라 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이 같은 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선산(先山)인 "풍덕(豊德)"에 인삼 밭을 경작ㆍ경영했는데, 1901년 "채삼기(採蔘期)"에 이르러, 일인(日人)들이 작당, 착취ㆍ노략질해가는 것을 일경에 엄중 항의하는 한편, 당시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진언케 했다.
이를 전해들은 "고종"은 그를 "실로 백사(白沙ㆍ이항복)의 후예"라고 칭찬하고,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를 제수했으나, 강직한 그는 벼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예ㆍ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평생을 "독립운동가ㆍ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ㆍ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그는 동생 "이시영"의 그늘에 가려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ㆍ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이회영"의 6형제들이 50여 명 가족들을 데리고, "솔가망명(率家亡命)"한 저력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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