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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이동녕 (1869)ㆍ임시정부주석ㆍ국무령ㆍ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by 당대 제일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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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李東寧ㆍ1869~1940ㆍ향년 70세)"은 "임시정부 창립 멤버"로 임시정부주석(초대ㆍ2대ㆍ5~7대), 임시정부 국무령(3ㆍ5ㆍ9ㆍ10ㆍ13ㆍ14대), 임시의정원 의장(1ㆍ12ㆍ15대) 등을 지내, "임시정부 중반기" 바람잘날 없던 상황에도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탱한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1. 이동녕 (李東寧1869~1940향년 70)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개화사상가언론인독립운동가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ㆍ"윤봉길 의사 의거" "김구"와 상의로 결행했다. 1918년 말,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한 39명 중의 한 사람이다.

"민권운동자강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지원의 우익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1903, "이상재전덕기"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1905,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한 뒤, 매국노 응징과 일제의 철수를 주장하고, 그들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1910년 식민지가 되자 망명하여, "신흥강습소"에서 청년을 육성했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  출 생 : 조선 충청도 천안     •   사 망 : 중국 사천성 기강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    •  사 인 : 과로에 의한 급성폐렴

•  유 해 : 광복 후인 1948.09.22, "김구"의 주선으로 "쓰촨성 치장 현" 있던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  : 석오 (石吾)암산 (巖山)    •  종 교 : 대종교 (나철 창시)      •  수 상 :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  자 녀 : 아들- 이의식 (의사) / 손자- 이철희 (서울교대 총장)이석희 (대우그룹 부회장)

•  경 력 : 신흥무관학교 설립(초대 교장)서로군정서(한국인 자치기관) 설립신민회 조직ㆍ서전의숙(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 설립 상동학교의 교사 재직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시, 조력

이동녕

2. 민권운동ㆍ자강운동

1892, "응제 진사시"에 합격했다. 1896,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개화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국가의 비정(秕政)을 규탄, 성토하며, 이권침탈에 반대하고 자체개발을 강조했다

1897, "독립협회" 회원들이 다수 가담하면서 각계각층을 포섭하여, "민권민생 투쟁"을 전개했던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부국강병"을 위한 각종 상소문을 제작하다가 "이승만" 등과 옥고를 치렀고,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1903, "이상재전덕기"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상동교회"에서 하와이 거주자인 "강천명"이 보낸 돈을 기초로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을 육성했으며,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로서 직접 운영했다.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1906"북간도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이상설" 등과 최초의 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육에 전념했다. 1907, "이상설""이회영"의 건의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고종 특사"로 파견되자, 그도 "여준(呂準)" 등에게 학교를 맡기고 귀국했다.

1907.04, "양기탁이회영이동휘이갑안창호전덕기김구이종일" 20여 명과 서울에서 비밀 항일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가 결성되기 1년 전, "이회영이동녕" 등은 "지금 국내에서 일고 있는 각종 항일투쟁을 볼 때, 곧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니,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서, 보다 원대한 계획 하에 장기적으로 독립운동를 꾀해야 승산이 있겠다",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통한 "무장독립 전쟁론"을 폈고, 이에 호응 참여하는 인사가 많았다"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정책 수립방략을 실시하는 일을 맡았다.

1910, 식민지가 되자, "원산"에 계신 부모님께 하직서를 띄우고,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했다동지들과 교민의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뒤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었다. 뒷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성장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그곳 토착민의 냉대로 곤경을 겪었으나, "이회영""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하여 빈 창고를 빌려 개설할 수 있었다그는 신흥강습소장군사교관사환까지 겸하면서 유능한 청년을 육성하여 1920.08월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인재를 육성실전에 배출했다. "경학사" 이후, "부민단(扶民團)권업단(勸業團)"을 잇달아 조직하고, 1915"이상설" 등과 같이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 최초의 "민주정부"를 조직했다한편 "대동신문(大東新聞)해조신문(海潮新聞)" 발행했으며, "대종교도"가 되었다.

3. 임시의정원 (입법기관) 활동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上海)"갔다"신규식"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寶昌路) 329""국립 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했다정부를 수립함에 앞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410~11"김신부로(金神父路)"의 회의실에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이시영조소앙" 등과 서로 연구 검토해서 제정하고, 04.13일 이를 내외에 선포했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체제의 순수 민간정부로 수립되었고, 3(국무원의정원사법부)을 분립했다당시 "상해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노령)한성임시정부(서울)"가 있었고, "대한민간정부(기호)신한민국정부(평양)조선민국임시정부" 등이 설립될 단계에 있었다그는 대표 "임시정부"는 하나만 있어야 되겠다고 보고, 5개월에 걸쳐, "상해노령한성"의 임시정부대표와 타협 끝에 "1차 개헌"을 통하여 "단일통합정부"를 구성한 후, "내무총장"으로 실질적인 운영을 전담했다.

"이승만(대통령)이동휘(국무총리)"가 부재하거나, 알력으로 국무가 원만히 처리되지 않아서, 그가 정을 주관하다시피 했다. 이어 "대통령 직무"를 대행했으며, "국무령국무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정의 위기를 구했다. 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김구" 등과 조직, 이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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