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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맹장 : 김동삼 (1878)ㆍ서로군정서 참모장ㆍ정의부 참모장

by 당대 제일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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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金東三ㆍ1878~1937ㆍ59세)"은 "김좌진(金佐鎭ㆍ1889~1930ㆍ41세)ㆍ오동진(吳東振ㆍ1889~1944?ㆍ55세)"과 함께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린다. 유교적 학식과 함께 "만주의 호랑이ㆍ남만의 맹호"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기질을 겸비했다.

 

1. 김동삼 (金東三1878~1937향년 59)

독립운동가서로군정서 참모장대한통의부 위원장정의부 참모장무오독립선언 39인 대표

•  출 생 : 경북 안동      •  사 망 : 서울 서대문형무소    •  사 인 : 옥사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  : 일송 (一松)       •  별 칭 : 만주의 호랑이남만의 맹호

김동삼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다음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 있고, 고향 안동에는 생가도 복원되어 있다"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2.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독립투사의 양성

1907, 고향 "안동"에서 "유인식김후병"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만주"로 건너가, "통화현 삼원보(通化縣 三源堡)"에서, "이상룡이시영이동녕윤기섭김창환"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1911년 말, "경학사"는 재정이 극히 열악해지며, 사업을 추진하기 힘든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1912, "여준이탁"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 교육과 군사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여 온 "신흥강습소"를 통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신흥학우단"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14"이탁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독립운동기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였다.

1919.04, "이상룡이탁"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켰으며, 서무 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1920"지청천"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1, 일제의 대병력이 "간도"를 침략하여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이란 명목으로 서북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을 자행하던 당시, "북로군정서군홍범도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1922, "연해주"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 "북경"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고, 의장으로 선임되어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창조파"로 갈려 대립을 보이자, 이를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 위원에 취임하여, "화순유하" 등지를 돌며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2차례나 "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1928,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 "김좌진지청천현정경이규동" 등과 2차례나 만나,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등과 "삼부통합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해 12,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인 계파간의 갈등을 없애고, "유일당"을 결성하는데 주력하였다1931, "만주사변" , "하얼빈 정인호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03월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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