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병ㆍ독립운동ㆍ의열단ㆍ김원봉

맹장 : 김좌진 (1889ㆍ백야)ㆍ북로군정서 사단장ㆍ청산리 전투ㆍ서일

by 당대 제일 2022. 10. 25.
반응형

 

"김좌진(金佐鎭ㆍ1889~1930ㆍ41세)"은 "김동삼 (金東三ㆍ1878~1937ㆍ59세)ㆍ오동진(吳東振ㆍ1889~1944?ㆍ55세)"과 함께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린다. "잇폰(입폰) 김두한 (金斗漢ㆍ1918~ 1972ㆍ53세)"의 부친이며, "청산리 전투 (1920.10.21~28)"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다.

 

1. 김좌진 (金佐鎭1889~1930향년 41 183cm)

군인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아나키스트 (민족주의 성향)ㆍ "빈주 사건(1927.11.18)"을 비롯하여, 동포들을 학대한 도덕적 문제점을 남기기도 했다ㆍ죽음에 대해서는 동료 독립 운동가들의 ""을 상습적으로 가로채어 원한을 샀다는 설도 있다.

 출 생 : 충남 홍성군 갈산면        명문 양반가(안동 김씨)의 3남 중 2남 

  사 망 : 만주국 길림 성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     묘 소 : 충남도 보령시 청소면 김좌진 로 200

  사 인 : 피살 (공산주의자 "박상실(공도진 or 이복림)"에게 피살)

  : 백야 (白冶)          학 력 :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졸업         종 교 : 대종교

  부 인 : 본처- 오숙근후처- 나혜국- 김계월

  자 녀 : 21- 김석출(장녀/ 오숙근)김철한(1/ 나혜국) / 서자 - 김두한(2/ 김계월)김을동(19대 국회의원)

공산 진영에서는 "김좌진이 친일로 변질했다"며 비판하나, 이는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립으로, 김좌진을 깎아내리기 위해 나온 말이며, 실제로 김좌진은 좌우가 협력해, 독립 운동을 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자였다.

1905, 나이 14세에 집안의 "가노"를 해방하고,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호명학교 설립),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11년 친척뻘 되는 인물에게 자금을 받으러 갔다가, 변절한 친척뻘의 뒤통수로, 미리 잠입한 일본제국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26개월 수감되었다.

김좌진

※ 서일 (徐一ㆍ서기학(徐夔學)ㆍ1881~1921ㆍ40세ㆍ호- 백포(白圃)) :  북로군정서 총재

1902"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 망명했다. 1911년경,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1919, "김좌진"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31운동" 이후, "중광단""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 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대한정의단대한군정회""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김좌진이범석""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총재"를 맡았다1921,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06.28"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2달 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2. 인 물

일본군의 기밀자료에 의하면, "김좌진의 키는 183cm,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빛이 형형하고 사람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인상이며, 총명함이 출중하고, 좌담에 능하고, 특히 해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라는 상세한 내용이 남아있다.

김좌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독립군 극비자료를 "일본군"에 넘겨준 사람은 "이정 (李楨김좌진의 최측근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연대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었던 걸로 밝혀졌다"이정" "청산리 전투" 이후 4년 뒤인 1924, "일본"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의 기밀자료들을 밀고한 걸로 드러났다"이정" "진중일지"라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 독립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일들을 자세히 서술해서 오늘날 만주 독립군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3.  최 후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짐)

1930.01.24일 주중청년협회 회원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1933,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한 뒤, 1957 "김두한"에 의해,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4. 김좌진은 왜 암살되었나?

지금까지 "김좌진의 암살"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암살"로 여겨졌으나, 암살 사건을 연구한 학자들은 뒤에 꽤 복잡한 배경이 있다고 보고 있다

"박상실""김좌진"이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일하던 일꾼이었는데, "김좌진"을 암살한 뒤에 도망쳤다."김좌진의 장례식"에서 밝혀진 바로는 "박상실""고려 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알려졌다. "김좌진"의 측근들은 "박상실"이 혼자서 암살했을 리가 없고, 그 뒤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배후로 지목된 인물은 "김봉환"으로, 그는 한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던 탓에 "북한의 김일성""김좌진 암살의 배후"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김봉환김일성"은 다른 인물임이 밝혀졌다. "북한 김일성""김좌진" 사망할 당시 겨우 18(1912년 생)여서 암살 배후일 가능성은 희박했다중국 자료가 공개되면서, "박상실"의 정체도 드러났는데, "박상실"은 가명이며 진짜 이름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이라고 한다. "이복림박상실"이 동일인물인지를 밝히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김동화(연변대 교수)"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김좌진"을 암살한데 대해서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면서, "만주" 내 한인들에게 영향력을 높여가자, "공산주의" 전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계 생존자 일각에서는 "김좌진"이 일본과 내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겼고 이 때문에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희겸(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ML" 일원)""김좌진이 마츠시다(하얼빈 총영사관 경찰국장)과 밀담을 나눈 후, 공산당원들을 많이 잡아 가둬죽였기 때문에 암살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의 배경은 "일본"이 조작한 "김좌진 귀순설 날조"였다"일본제국"1923~1924년에 "김좌진 장군이 귀순했다""귀순설"을 조작하여 선전하였고, "김좌진" 한 때 억울하게 "친일반역자"로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이런 선전과 달리, 실제 "일제"가 작성한 내부문서를 보면 "김좌진"은 절대 친일반역자가 아니었다.

1924.04.09., "일본" 내부문서 따르면, "김좌진은 죽어도 일본에 귀순할 마음이 없고, 의지가 확고하며 일본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면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그래서 "공산주의계 생존자"들의 주장들도 잘못된 소문에 근거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다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실제로는 "김봉환이 일본과 밀통했다"고 보고 있다

, "지희겸"이 주장한 "김좌진과 마츠시다의 밀담" 운운은 실제로는 "김좌진"이 아니라, "김봉환" 그랬다는 것. 학자들은 "김봉환이 일본과 밀통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김봉환"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긴 걸 "김좌진"에게 떠넘겼고, "김봉환"의 주장을 그대로 믿은 "조선공산당""박상실(공도진)"을 보내, "김좌진"의 방앗간에서 일하게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문제는 있다.

한편 "동료 독립 운동가들"의 공을 상습적으로 가로채어 원한을 샀다는 설도 있다현재도 "연변 조선족" 자치구 거주 조선족들은 "김좌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사실 "일본" 내무보고서와 "공산당" 측 주장에 일치하는 주장이 있다"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5. 평 가

1947, "김구""김좌진 장군 추도사" 중에서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1930.02.13.일자, 동아일보

"그이(김좌진)는 몸이 뚱뚱하면서도 후리후리한 키가 7척 장신인 거인인 만큼 힘도 큰 장사이었습니다 날 우리 집에 "놋두멍"은 얼마나 무거웠든지 빈 것이라도 7~ 8명 장정이 들어야 땅김이라도 하는 것을 그이는 혼자서 힘들이지 않고 물이 반독이나 들어 있는 것을 능큼능큼 들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먹는 것도 대음(大飮) 대식(大食)이었습니다 술도 그랬거니와 밥 한 두 그릇은 맛이나 보고, 고기 근이란 양에 차지도 아니하였답니다."

"이범석 회고록" 중에서

"김좌진 장군은 7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장완린 (중국 작가)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6. 어 록

독립기념관, "단장지통" 어록 비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1913, "서대문 형무소"를 출소하며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1918, "만주"로 망명하며

칼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1920, "간도참변" 이후, "김좌진의 군정서" 격고문

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들어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람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질만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 도다 우리 군정서는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 4, 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2백 명의 병졸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

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버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