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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사건- 20.06 : 의병 전투- 삼둔자ㆍ봉오동ㆍ청산리

by 당대 제일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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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둔자 전투 (三屯子 戰鬪)"는 1920.06.04~06일까지벌저인 독립군의 첫 "국내 진공 시도"로,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사건이다. 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의 도화선이 됐으며, "일본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이다.

 

1. 독립군 지역지도자

독립군 지역

2. 1920.06 : 삼둔자 전투 (三屯子 戰鬪)

독립군의 첫 "국내 진공 시도",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사건ㆍ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 도화선이 됐으며, "일본군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ㆍ"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이흥수의 신민단" 예하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북간도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예하 1개 중대(지휘- 니히미 지로 중위)를 격파한 소규모 전투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첫 승리는 "만주 독립군들"로 하여금 사기를 올려, 곧이어 벌어진 06.07일의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넓게는 "봉오동 전투"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일 시 : 1920.06.04.(새벽 5)~ 06.06(자정)까지     결 과 : 대한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신민단의 승리

장 소 : 만주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변 삼둔자(三屯子)

지휘관 : 대한북로독군부 - 홍범도최진동이범석(광복군 육군중장국무총리(1))  /  신민단 - 안무(이흥수의 신민단 예하 독립군 1개 중대)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벌들은 국내 진주를 시도 하였고, 이때 "만주지역"에는 크고 작은 독립군이 조직되었고, 동 만주지방의 "대한독립군(홍범도)국민회군(안무)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최진동)" 1920년 초부터 서로 연결연합하여, 활동하였다.

1920.06.04.일 새벽,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에서 출발한 "독립군 홍범도-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신민단 독립군 예하 1개 소대", 당일 새벽 5시 경, "함북 종성군 강양동""일본군 헌병 초소" 선제 습격함으로써 발생하였다06.06, "월강 추격대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불법으로 "중국" 영토인 "삼둔자(三屯子)"에 왔으나 독립군이 보이지 않자, 보복으로 양민을 살육하였다"삼둔자 범진령 고개"에 숨어있던 "독립군 부대"는 매복한 지점 한가운데까지 이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궤멸퇴각시켰다.

3. 1920.06 : 봉오동 전투 (鳳梧洞)

"조선만주"의 국경지역에서 "독립군일본군"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교전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전투로는 첫 전투였다"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이흥수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19사단 월강추격대대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독립군의 선제공격골짜기 유인책험준한 골짜기 지형기후 조건을 이용한 전투였다.

이후, 1920.08월까지 거듭된 소규모 전투습격작전에서 번번이 "북로군"에게 패하거나 기습공격을 당하자, 결국 "일본군" 1920 10월 초, 독립군 소탕을 위한 간도 출병을 결정, 작전을 개시했다"홍범도의 일지"에 의하면, 이 전투에 3명의 "소련 적군(赤軍)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일 시 : 1920.06.06.~ 06.0706.20

 장 소 : 함북 종성군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봉오동(鳳梧洞)안산고려령삼도구

 지휘관 : 대한군북로독군부 - 홍범도최진동(일명 최명록)강상모안무)ㆍ신민단 - 이흥수한경세

 병 력 : 독립군 약 1,280~1,300명  (대한군북로독군부 1220~30신민단 60) /  일본군 약 490~ 500

 피 해 : 독립군- 전사(4)부상(2)민간인 사망(9) / 일본군- 전사(157)부상(300)중상(200)경상 (100)

 결 과 : 연합군(대한군북로독군부신민단) 독립군의 승리)ㆍ독립군 연합부대가 승리를 거두어, 독립군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만주의 의병조직의 확대참가자 증가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중국에 본격 침투를 계획한 일본은 "훈춘 사건(琿春 事件)"을 조작하여 중국 출병의 빌미를 만든다.

훈춘 사건 : 1920년 일본 제국이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ㆍ"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북"에 주둔하는 "나남사단(21사단)"1개 연대를 출동해서, "훈춘"에 입성해, 주변의 한인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만주"에 있는 조선인 3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섰는데, 1920.06.07, "북로 제1군 사령부(간도 국민대) 부장 홍범도" "군무 도독부군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이화일(3소대 소대장)"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쳤고, "일본군"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했다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남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06.07일 오후 1시쯤, "일본군""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 신호탄을 올렸다3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사상자가 늘자,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을 전개해 나간다

4. 1920.10 : 청산리 대첩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10.21~ 26일까지, 1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완루구어랑촌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간도 왕청현~ 백두산 산록" 사이에서 벌어진 10여 회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북로군정서(김좌진)대한독립군(홍범도)군무도독부군(최진동)신민단" 등이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 함께 싸웠으며,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관내 청산리"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간도" 출병한 "일본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연합부대"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특히 눈부셨다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으며,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2연대장 김좌진, 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 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삼둔자 전투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일 시 : 1920.10.21~ 28      장 소 :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 관내 : 허룽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골짜기

 지휘관 : 대한군북로독군부 - 홍범도최진동(일명 최명록)강상모안무 /  북로군정서군(김좌진 서일사령관김규식 대대장나중소 참모장이범석 연성대장) 대한독립군(홍범도)군무도독부군(최진동)국민회군(안무)의민단(허근강창대방위룡김연군)신민단(김준근박승길양정하)

 병 력 : 독립군 약 3,050~ 4,700(북로 군정서군(700~800)대한 독립군(300~1400)신민단(1,100)국민회군(200~250)한민회(200~500)대한광복단(200)의민단(200)의군부(150)군무 도독부) / 일본군 약 30,000~ 35,000

 피 해 : 독립군 - 전사(60)부상(90) / 일본군 - 불명    결 과 : 대한 독립군의 승리경신참변(庚申慘變) 발생의 계기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게 된다"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계기로, "일본""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했으며, "한인 독립군들""러시아"로 일부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벌"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패전 후,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일본군"은 약 2달 간 "독립군 근거지"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 30여 개의 학교가 불에 탔다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간도참변간도학살사건"이다.

"장완린 작가(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다."라고 말했다한편 "이광수(소설가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 "청산리 전투가 오히려 간도 참변을 야기했다" 비평을 하기도 했다.

다만, "청산리 전투" 때는 같은 "화룡현" 관내에서 벌어졌던 "봉오동 전투" 때와는 달리, 기상 이변이 없었고, 지형이나 주변 환경의 악영향이 없었는데도, "일본군 부대"는 실수로 자국 군끼리 교전을 했다그러나 후에 "일본군"은 군복을 바꾸지는 않고, 관계자들을 문책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일본군"이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오인 사격하다가 자멸한 것은 "박은식"의 증언처럼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었다한편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참고하여, 자신들이 마련한 "군 자금" 중 일부로, "일본군 복장계급장일본군이 쏘는 소총" 등을 계속 구입하여, "일본군"으로 위장하여 움직이기도 했다.

5. 이범석의 왜곡 : 광복군 육군중장국무총리 (1)

"청산리 전투""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이며, "김좌진이범석"이 그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게 알려진 것은 전투 참가자인 "이범석"의 회고록"한국의 분노"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후에 그는 "우둥불"이라는 다른 회고록을 다시 발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 변명했지만, 그 변명 또한 왜곡으로 밝혀졌다.

이는 전투 초반,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타 독립군 부대들이 "피전론"으로 전술적 후퇴를 하였으나, "북로군정서"는 물러선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벽오동 전투" 승전 후, 전투를 피하던 "홍범도 부대"와 다른 독립군 부대 역시, "어랑촌 결전"부터 가담하여, 함께 싸웠다.

6. 청산리 대첩  세부 내용 (1920.10.21~ 28)

① 주전론ㆍ피전론ㆍ전투 준비

1920.10.18.일경,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집결하였다. 10.19일, "서일ㆍ김좌진 부대ㆍ홍범도 부대" 등의 회의에서, "만주"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하는 문제를 두고 이견이 나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 19사단" 예하 여러 연대가 온다는 소문이 있어, 소수 병력으로는 상대가 불가함을 들어,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다. 여러 차례 회합 끝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 동지대 37여단ㆍ19사단ㆍ20사단ㆍ포조군 예하사단 병력들"이 부근까지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부대 지도부회의"는 이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뒤로 물러서기를 주저했으며, 물러선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 여러 부대가 몰려옴에 따라, 10.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ㆍ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개 마루ㆍ계곡 양쪽에 매복ㆍ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일부 병력은 주민들을 산악 밖으로 이주ㆍ대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청산리" 안에는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이라는 긴 계곡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가파르고, 나무가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ㆍ포병ㆍ기병ㆍ공병"을 합친 병력이 10,000여 명으로, "일본 파병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ㆍ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ㆍ노인들에게는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가 적어, 몇 명 안 되고, 굶주려 지쳤다고 증언하도록 사전에 지시했다. "소총ㆍ중기관총ㆍ수류탄ㆍ탄환 80만발"로 집결한 뒤, 10.20일 새벽, "김좌진ㆍ이범석" 등은 "우진 이민화ㆍ좌진 한근량ㆍ중우진 김동ㆍ중좌진 이교성"에게 각각 200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청산리 백운평 (白雲坪) 전투

10.20일 오전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이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 선발대"의 선봉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백운평"에 당도한 "김좌진"은 지형조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제1제대"는 후방에,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2제대"는 최전선에 배치하고, "일본군 추격대"가 매복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0.20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또 다른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90여 명의 "일본군 야스가와 부대"의 전위대 전 병력이 "백운평"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경,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ㆍ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일본군"은 표적이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댔지만, 독립군은 이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여 사격을 가했다. 마침내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장병의 시체를 버리고, 도망쳤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야마다 토벌대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ㆍ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ㆍ기병 1개 중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골짜기 아래에서 "일본군"의 사격은 불편했고, 한편 높은 고지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은 유리하였다.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패주했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부대"의 주력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찾지 못했다. 고지대에 오른데다가, 지형ㆍ지물에 은폐한 독립군을 아래에서 찾아서 쏴야 했던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다.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 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ㅡ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고 전하고 있다. "이범석"은 나머지 "일본군 퇴각자"를 추격하였으나,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신호를 보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화룡현 내 갑산촌(甲山村)"으로 퇴각시키게 하였다.

이도구 완루구 (二道溝 完樓溝) 전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김좌진 부대"가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 400여 명과 교전이 거의 끝나가고, 퇴각을 준비할 무렵까지도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만나, 고전하였다.

10.21일 오후, "일본군"이 "완루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독립군은 10.22일 새벽까지, 완강한 항전을 벌였다. "홍범도 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끝내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고,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집중 공격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도구 갑산촌 (二道溝 甲山村) 전투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ㆍ측면을 산포ㆍ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 연대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이도구" 내 다른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10.22일 새벽 2:30분에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갑산촌" 부근으로 이동해, 10.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⑤ 일본군의 실수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ㆍ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ㆍ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에서 "남 완루구ㆍ북 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독립군"은 먼저 "남 완루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본진은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분견대"는 예비로 매복을 시켜,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분견대"의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분견대"가 빠져나가자, 반대편에 서 "홍범도 부대 분견대"를 공격하던 "일본군"을 발견한다. "북 완루구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공식 보고서가 아닌 "독립신문"에서는 논평을 내고, "일본군"의 오인 사격을 조롱하였다.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일자)"는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10.18일에도 "일본군"은 자국 군끼리 "오인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 역시 현장 목격담을 듣고, 10.18일 "일본군"이 자국 군끼리 싸우는 것을 증언하였다. "우리 독립군이 10.16일 삼도구에 도착하자, 10.18일에 일본군 3개 대대가 함경북도 무산으로부터 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청산리로 들어가 요지를 차지하고 숲 속에 잠복하였다.  적이 과연 대대 병력으로 뒤쫓아 왔다. 독립군은 기습적으로 뛰쳐나와 맹렬하게 총을 쏘았다.  적은 450여 명이 즉사하고, 부상자도 60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속 부대 또한 두려워서 퇴각하였다."

"박은식"에 의하면, "아군도 비록 승리는 거두었으나, 병력의 부족으로 대적하기 어려워, 즉각 산골짜기 사이를 통해서 이도구로 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밤중에 길을 잃어, 수십 리를 돌아야 했고, 곧바로 도착하지 못하였다.

"10.18일 밤, "일본군"은 "독립군"이 분명히 "이도구"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서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좌우를 순회하다가, 갑자기 자기네끼리 마주치고는, 이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발포하여 사망자가 180명ㆍ부상자가 70명이나 되었다. "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10.21일 밤부터 10.22일 새벽까지 "이도구"에서 "홍범도 군"과 교전한 일본군 역시 자신들끼리 서로 교전하여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적(일본군)의 구원부대가 도착하여, 아군(독립군 연합부대)이 이미 퇴각한 줄도 모르고 포위하여 불을 놓았다. 남북 양방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대를 잠복시켜 엿보도록 하였지만 아군의 소리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저들 양 방향의 일본 매복 병사들이 서로 알리지도 않고 길을 나누어 수색하다가 또다시 자기네끼리 서로 충돌하여 사상자가 2백 명이나 되었다."

"박은식"은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전사하자,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독립군"이 이들의 무기와 죽은 "일본군"의 손목에서 손목시계까지 노획해갔다고 한다. "아군의 노획물은 속사포 5문ㆍ기관총 30정ㆍ탄알 5천 발ㆍ말 20필ㆍ군도(군용 칼) 20자루ㆍ쌍안경 5대ㆍ손목시계 20개ㆍ군용지도 6매 등이었다."

⑥ 천수평 (泉水坪) 전투 

10.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1ㆍ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천막치고, 숙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동이 트기 전, "김좌진 부대의 제1ㆍ2지대"는 그곳으로 이동해, 주변 고지에 올라, "일본군 기병중대"를 포위ㆍ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는데,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아즈마" 중대원 120여 명 중,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10.22일 아침,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 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또다시 매복 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⑦ 어랑촌 (漁郞村) 협공 작전 

10.22일 오전, "김좌진 북로군정서ㆍ홍범도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10.22일 오전 9시, 3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대대"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 7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야산 고지로 이동시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이 포위 공격을 해왔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가 이를 보고,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홍범도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하여,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그 틈을 타서 "김좌진 부대"는 탈출에 성공한다.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후일 자신의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700여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 명의 "일본군"의 교전 중, 측면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독립군"은 이틈을 이용하여, 소규모 분대로 나누어 이동하였다. 날이 저물자, "북로군정서ㆍ대한군북로독군부"군은 추격하는 "일본군 추격대"를 따돌리고, 신속히 "어랑촌"을 빠져나갔다.

⑧ 만록구 (萬鹿溝) 전투

10.21~ 23일, "화룡현 내 천수동(泉水洞)ㆍ어랑촌(漁郞村)ㆍ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독립군" 전사자는 20여 명이었으나, "일본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10.23일에는 "이범석"이 오래된 "말 똥" 다량을 채취해서, "천수동ㆍ어랑촌ㆍ만록구" 일대에 뿌려 두었다.

"이범석" 일행이 이끄는 부대가 오래된 "말 똥"을 뿌린 뒤, 이 곳을 지나가던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 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ㆍ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평지에서의 교전은 불리하여, 10.23일부터 2일간 "만록구 고지"에서 "백병전"을 펼쳐, 겨우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⑨ 고동하 (古洞河) 전투ㆍ전투 후반

10.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홍범도 부대"의 행방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10.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계곡"의 흔적을 발견하고, 인근에서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이미 공격을 대비해, "고동하 계곡" 사방의 산정에 매복 중이었다. 밤중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전열을 겨우 수습한 뒤, "일본군"과 교전, 신속히 대피하였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고동하 계곡"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은 산중으로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했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0.24일, "북로군정서" 예하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조선주둔 일본군 파견부대"를 습격하였다가 퇴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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