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申乭石ㆍ본명 : 신태호(申泰浩)ㆍ1878~1908ㆍ30세)"은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최초의 평민 의병장ㆍ주로 강원도/ 경북의 태백산ㆍ소백산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초기 의병 운동이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1. 신돌석 (申乭石ㆍ본명 : 신태호(申泰浩)ㆍ1878~ 1908ㆍ향년 30세)
• 출 생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 사 망 : 경북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訥谷) • 종 교 : 유교 (성리학)
• 사 인 : 암살 (도끼에 의한 타살) • 계 급 : 13도 창의군 교남창의 대장 (13도 창의군 지휘 의병장)
• 별 명 : 태백산 호랑이 • 별 칭 : 신돌석(申乭石ㆍ申乭錫)ㆍ신태을(申泰乙)ㆍ신태홍(申泰洪)ㆍ신대호(申大浩)
• 처 : 한재여 (청주 한씨ㆍ1878~1952) • 자 녀 : 신만이(아들)ㆍ신병욱(양자ㆍ조카)
• 경 력 : 1895~1908 : 대한제국 조선 항일 의병 • 참 전 : 조선 을미사변 항거 봉기, 대한제국 을사늑약 항거 봉기
1908년부터는 "유시연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의병 항쟁을 펼치다가, 그해 겨울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암살되었다. 그를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살해범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부하이며, 외사촌 또는 이종사촌들로 가까운 친척인 "김상렬 3형제"라는 것이다. "신돌석"에게 걸려있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린 외가 친척인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ㆍ김상호"와 함께 "신돌석"에게 독이 든 술을 만들어서 먹인 뒤, 그가 깊은 잠에 빠지자, 도끼로 살해하였다고 한다.
"신돌석"의 시체를 일본군에 바쳐 많은 상금을 타려는 속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고종사촌인 "김자성(金自聖)"이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3형제가 도끼로 쳐 죽였다고 한다.
2. 18세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1878년,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을미사변"으로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날 때, 18세 나이에 "영덕"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켰다. "경북"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에 "경북"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하락 부대"에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의 의병연합 부대가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투신자살하면서, 그의 의병대도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 이후,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군"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 척 격침시키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북 내륙 지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들도 만들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와 순흥(영주시)을 공격하는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계속되는 전과를 올리면서 경북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부상하여, "이인영"의 연합의병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출신의 유학자 의병대장들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 (근 • 현대사) > 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건- 20.06 : 의병 전투- 삼둔자ㆍ봉오동ㆍ청산리 (0) | 2022.10.24 |
---|---|
사건- 20.01 : 철혈광복단 사건(간도 15만 원 사건)ㆍ일본 밀정 (0) | 2022.10.24 |
사건- 1919 : 임시 정부ㆍ상해(19~32)ㆍ이동(32~40)ㆍ충칭(40~45) (0) | 2022.10.23 |
사건- 1907 : 의병ㆍ13도 창의군 (十三道 倡義軍) (0) | 2022.10.23 |
사건- 1895 : 의병ㆍ을미의병ㆍ을사의병ㆍ정미의병ㆍ13도 창의군 (0) | 2022.10.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