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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① 의열단 단장ㆍ조선의용대 총대장

by 당대 제일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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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ㆍ163cm)"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액 현상금(현상금 100만원( 320억 원))이 걸렸던 인물이며, "김구"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인물로, "의열단장(1919년 의열단 조직)ㆍ조선의용대장ㆍ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1930년대 후반)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1.  김원봉 (金元鳳1898~1958.11(?)60)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

혁명가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의백)조선의용대 총대장)군인(중화민국 육군 소위(1927~1930))ㆍ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1941~1945)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1대의원노동상국가검열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ㆍ일제 시기, 최고액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당시 현상금 100만원(333억 원)김구 60만원(200억 원))

해방 당시, 무장 항일투쟁으로 독립운동사에 큰 획 남겨,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은 웅이었다. 해방 후, 그가 고향 "밀양"을 방문했을 때, 이 작은 소도시에 무려 10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살았으나, 남ㆍ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무장독립투쟁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활약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  출 생 : 경남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     •  사 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 인 : 자살설 (대동강 투신, 감옥에서 청산가리 자살)총살설 (김일성 일파의 숙청을 피해 탈북 시도, 실패하고 처형당한 것)

•  : 약산 (若山)     •  종 교 : 무신론자    •  학 력 : 신흥무관학교 자퇴 황푸군관학교 졸업

•  별 칭 : 김약산김약삼진국빈김국빈최림이충김세량왕세덕암일왕석운봉김국빈진충천세덕

•  가 족 : - 김주익 / - 이경념(2)계모- 천연이(41)서모- 박순남(31)

•  : 최씨 (화류병으로 단명?평안도 출신)ㆍ2- 박차정(朴次貞1910~1944의열단원조선의용군 간부부녀복무대 단장독립운동가)ㆍ3- 최동선(崔東仙조선의용대독립운동가)    •  자 녀 : 2(김철근김중근)

•  장 인 : 최석순 (최동선의 부, 임시정부 국무위원,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 역임)ㆍ김두봉(金枓捧한글학자정치가)- 처 외당숙장모(김명년)의 사촌오빠

•  친 구 : 김약수 (金若水국회부의장국회프락치사건(반민특위))- 죽마고우박차정의 외가쪽 친척 / 윤세주 (석정ㆍ1901~1942) 밀양출신ㆍ평생 김원봉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

• 수 상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노동훈장 (1958)

김원봉

1911 : 밀양공립보통학교 자퇴 (일장기를 변소에 버린 사건이 문제)ㆍ동화학교 편입학 1912 : 표충사에서 수도하면서 독학ㆍ1913 : 서울 중앙학교 편입학  1916 :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ㆍ1918 : 남경 금릉대학 입학  1919 :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입학했다가 자퇴ㆍ길림에서 의열단 창단  1923 : 단재 신채호에게 "조선혁명선언" 집필 부탁  1926 : 나석주(의열단원) 식산은행ㆍ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1927 : 중국공산당 남창 봉기 참가  1931 : 박차정 (후처의열단원)과 결혼  1938 : 조선의용대 창설ㆍ대장 취임  1942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1944 :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ㆍ아내 박차정 사망  1945 : 최동선과 재혼(3)ㆍ건준 임시내각 군사부장 취임  1947 :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게 체포ㆍ고문당함 (고문 고통보다 심리적 치욕을 느낌)  1948 : 월북ㆍ남북연석회의 축사 및 사회ㆍ협상종료 후 남한으로 귀환 거부ㆍ내각 국가검열상 취임 (전국적 명성을 지닌 그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지만, 김일성과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1952 : 내각 노동상 취임  1958 : 회갑을 맞아 훈장을 받고, 10월에 숙청당함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 두목"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다가 "국제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는데,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해 월남하는 데 성공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41.06, "조선민족혁명당""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다그는 1942"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고, 1944"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는 "군무부장"에 올랐다해방 후, "미군정체제"의 남한으로 귀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1946"대구 10월 항쟁" 관련 혐의로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던 "노덕술(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게 검거돼, 모욕을 당했고, 남북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한 정치적 동지였던 "여운형의 암살"을 목격하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북협상에 참석했다가 북한에 눌러앉았다남한에서 설 땅이 없었던 그는 1948"남북협상" 때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올랐지만, 1958"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다현재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은 초라하게 놓여있는 생가터 표석뿐이다김원봉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또 다른 밀양의 독립운동가 윤세주의 생가터에는 표석, 표지판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은 "김원봉"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동생 4명은 "625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고, 막내 여동생 "김학봉"도 죽음 직전까지 갔다1960"419혁명" 이후, 즉석에서 "밀양군 피학살자 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 513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밀양유족회 및 경남유족회 간부"를 맡고, 사회단체 주요간부를 맡은 이는 "김봉철(김원봉 동생)"이었다"김봉철"은 고향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자동차 조수로 1년간 일했다. 귀국해서는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의 조카 "김태영(1957)"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철"은 해방 전후로 염색업을 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해방 후 "김봉철""김원봉"이 조직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했고, 1949.06.24"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미군정 포고령2호 위반"으로 벌금 3,000원을 언도받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 "김원봉"이 월북하고, 4명이 학살되었다이런 아픔을 딛고, 그는 1956년 치러진 "2대 밀양읍 의원"에 당선되었다그러다가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이틀 후인 1960.05.18"밀양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되었다연행된 "김봉철"은 소위 "혁명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이후 "특별사면"을 받아, 1965.12.24.일 석방되었다.

2. 노덕술(일경찰 출신수도경찰청 수사국장) 독립투쟁 조롱ㆍ얼굴 침뱉기

해방이후 1947.02월, 독립투사 중 최고 거물이었던 "김원봉"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친일경찰 출신인 수도경찰서 수사국장 "노덕술 (盧德述ㆍ1899~1968ㆍ69세))"에게 체포돼, 갖은 수모를 당한다. 일제시기,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숱한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하게 고문했었던 그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면서,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독립 투쟁한 것을 조롱하면서, 그에게 치욕을 안겼다. "김원봉"은 풀려 난 후, 침식도 물리친 채, 3일 동안 대성통곡을 하였고, 1948년 월북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김원봉"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 울분을 삼켰다고 한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3. 최후에 대한 의혹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하여,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그는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어 자살했다는 설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이렇게 숙청당한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히지 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민중들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잊혀지게 됐다그의 최후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은 있다

일본인 학자 가지무라 히데키는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고 했다소정자(간첩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전향)등은 "강등되어, 지방에 배치되었다"고 했다1958.11월 임정 파벌과 중국계열, 소련파 숙청의 틈바구니에서 "국제간첩"혐의로 투옥, 후에 총살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다조선의용대원 출신 김학철은 자살설을 제기했는데, "김원봉에게 국제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며, 혹자는 약산이 대동강에 투신하였다고도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체포된 뒤, 감옥에서 자살하였다"고 한다일설에는 김일성이 "장개석의 국민당 사주를 받은 간첩, 종파주의자"라고 몰아 붙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김원봉은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4. 이승만과의 만남

이승만의 "돈암장"을 찾았을 때, 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은 직접 간을 봐서 식사를 차려왔다. "김원봉"은 윤치영이 만들어 온 식사를 단숨에 해치웠지만, "박헌영"은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면서 끝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뒤에도 김원봉은 무사하였다1946.02월초까지 줄곧 "돈암장ㆍ마포장"의 이승만을 찾아갔으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 그는 더 이상 이승만을 찾아가지 않았다.

5.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비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내리기도 했다그는 반탁운동에 대해서도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와 신미양요(1871)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저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6. 성격ㆍ인물평

냉정한 성격이었고, 개인주의적이었으며, 대단한 호주가였다고 한다그는 언제나 조용히 지냈고, 운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혼자 사색하였다1946.02월에 그를 만난 인사의 회고에 의하면 "축지법을 쓰고, 변장술에 달인이며, 왜놈을 응징하는 데는 도난마(快刀亂麻)하는 항우나 관운장 같은 장군의 모습 정도로 연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처음 만난 약산의 모습은 165~170cm 정도의 키에 눈에서 광채가 느껴지는 흠잡을 곳 없이 잘 생긴 얼굴,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한다"김산김성숙" 등에 의하면, "그는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주로 독서를 하거나 홀로 사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는 미남형에 깔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여러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정화암"은 그가 화류계에 출입했고, 이때 얻은 병 때문에 본처 최씨와 2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정화암에 의하면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본부인)이 완전히 화류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증언하였다장준하는 "그가 젊은이들에게 술을 사서 먹이거나,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고 하였다.

아리랑의 김산에 의하면,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청년기 이후의 그는 "김약수김두봉이여성"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의열단의 동지였던 "김성숙"과 조선의용대원 "김학철최재" 등의 증언에 의하면"그는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고 동지들에 대해서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할 때 목청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였으며,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에게 와 닿는 말을 하였고, 담담한 가운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을 느끼게 했다김성숙은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었다.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다.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다."

김규식은 "약산은 혁명가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자 지도자이지만, 정치적인 인물로는 입지를 못 잡아 아쉬운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그는 안전에 대한 염려가 강하였는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귀국 이후에나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두고, 암살테러를 피해 비밀리에 움직였다또한 사진 촬영 뒤에는 원판과 필름을 회수해갈 만큼 주변 관리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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