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의병 • 독립운동 • 의열단 • 김원봉

독립군 ③ 왜 광복군은 국군의 주체가 되지 못했나?

by 당대 제일 2022. 10. 15.
반응형

 

1940.09.17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었고, "김구(임시정부 주석)"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한ㆍ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했다.

 

1.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설립 일시 : 1940.09.17일       설립 장소 : 충칭(중국 임시 수도)의 가릉빈관

광복군 총사령부

1919"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21년 만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1888~1957)장군" 아래, "이범석(1900~1972)"을 참모장으로 모두 4개 지대로 편성했다. 이때 "광복군"은 병력과 부대 편제를 갖추지 못해, "중경"에서 동원 가능한 30여 명으로 총사령부만을 구성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이어 병력을 모집하는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해, "산시쑤이위안 저장안후이성"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거기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00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2. 임정의 광복군 창설계획

"임정"1919"대한민국육군 임시군제"를 제정해,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대의 편제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한 바 있었다"임정"1919년 말, "상하이""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해, 군사 간부를 양성하고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이는 지역적 차이와 재정의 어려움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윤봉길 의거(1932)"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1934"김구""뤄양 군관학" "한인 특별반"을 설치해 군사 간부를 양성했다"중국의 중앙 육군군관학교"에도 우리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임정의 광복군 창설계획은 "중일전쟁(1937)"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이미 세워졌다그러나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 전황에 따라 피난처를 전전하는 상황에서 이는 뜻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중일전쟁" 발발 이래, "임정""창사광저우루저우치장 충칭"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40.09월이었다.

3. 한국광복군 조직계획안을 "중국 장개석 장군"에서 송부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

"김구" "중국"의 중앙 당부 당국자와 교섭해, "한국광복군 조직계획안"을 보냈다"이에 계획서를 작성하여, 광복군(한국군) 결성을 허락해 주는 것이 3천만 한족(韓族)의 총동원 요소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즉시로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에 임명하고, 미주하와이 동포들이 원조한 3~4만 원 등 든 역량을 다하여 중경 가릉빈관에서 중국서양 인사를 초청하고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김구백범일지 하권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중에서>

한편, 1941.11"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요구했다이는 "중국""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는 조처였다준승에 따르면, "광복군""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인사경리훈련공작 등 모든 사항에서 "중국군"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특히 89항은 모욕적인 조항으로 "중국" 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광복군의 작전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 (12)   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 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광복군의 중국 내 군사 훈련은 해당 지역의 중국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39)   중일전쟁 종결 이전에는 설혹 광복군이 한국 내로 진격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한다. (8)    중일전쟁이 끝난 뒤 광복군이 한국 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안에 있을 경우 광복군의 운영 문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정책에 의해 처리한다. (9)

"준승"의 접수 여부를 두고, "임정광복군 간부들"은 의논이 들끓었으나, 불합리한 조건은 뒷날에 시정하기로 하고 우선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이에 따라 "광복군" 편제는 "총사령 지청천참모장/재무과장은 중국인고급참모 최용덕한인 참모장 왕일서(김홍일의 중국식 이름)1지대장 김원봉2지대장 이범석3지대장 김학규로 이뤄졌다.

4.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광복군 편입

1941.12.08,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정"12.10"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다1942.04.20, "임정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광복군"으로 합편하기로 결의했고, 5"약산 김원봉(1898~1958)의 조선의용대""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됐다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에 주력한 "광복군""한국 청년 훈련반한국 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해 모집해온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게 한 뒤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중국 정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던 "광복군"의 재정은 "광복군"을 유지하는데도 부족했다"중국"이 재정 원조의 대가로 "한국 광복군 행동 9개 준승"으로 "광복군" 활동을 규제하자, "임시의정원"에서는 "9개 준승" 폐기 문제가 제기됐다.  이 문제로 "임정중국군사위원회" 사이에 오랜 협상이 전개된 결과, 1945.04.04일 새로운 군사 협정인 "원조 한국 광복군 판법"이 체결됐다. 협정은 "광복군 통수권""임정"에 있으며, 재정 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태평양전쟁"이 무르익어 가면서,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 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5. 일본의 항복국내 진공 작전 수포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를 대상으로 한 "재훈련파견사령부 설치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한편, "광복군""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 훈련을 시행했다그런데 국내에서는 1944"조선인 학도육군지원병제도징병제도"가 시행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일본군"에 편입돼 "남양중국" 전선에 배치됐는데 이들 중 일부가 탈출해 광복군으로 넘어왔다"안후이성 푸양"에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도착한 탈출 학병들 가운데 50명은 1945.01월 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충칭"에 도착했다이들 가운데는 "장준하(1915~1975)김준엽(1920~2011)"도 포함돼 있었다.

"광복군OSS"는 특수훈련 문제를 협의해, "2지대3지대"를 중심으로 특수 공작훈련을 시행했다그 뒤 1945.08.04,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들이 배출됐다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이른바 "국내 진공 작전""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1941.11, "임정""광복군" 창설 이듬해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해, "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고 하는 자주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한 바 있었다. 1기는 "대적혈전기", 2기는 국토 일부를 회복해 "임정"이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는 "국토를 완전탈환하여 "복국"을 완성하는 시기였다강령 실천을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현돼야만 하는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으므로, 전후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임정의 발언권"도 없어진 것이다"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 주석""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백범일지)"이라고 기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43.08, "광복군""인도"에 파견돼, "영국 군대"에 합류해 "임팔(Impal북동 인도 마니푸르주의 주도) 전선버마 탈환" 작전에 참여, 최전선에서 대일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2년 동안 임무를 수행한 이들 "인면(인도미안마)전구 공작대"1945"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 복귀했다. 비록 9명에 불과했지만, "광복군"의 활동이 "인도버마" 전선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점, 광복군이 연합군과 합작해 직접 대일전쟁에 참전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6. 미 군정의 광복군 무장 해제 요구

"일본" 항복 이후, "광복군""중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온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그러나 "미 군정" 당국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임정 요인들""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장 해제 상태로 귀국해야 했던 "광복군""미 군정""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으로 해산했고,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1946.05"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7. "일본군만주군" 인맥이 국군의 주축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백선엽" 등 주로 "일본군만주군" 인맥이 중심인 "남조선 국방경비대"로부터 비롯한 "국군"의 주축이 될 수는 없었다"육군사관학교""미 군정"이 군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가 모태였다.

"군사영어학교""광복군일본군만주군" 경력자 가운데서 각 20명을 뽑을 예정이었으나, "광복군" 계열이 명분이 없다며 지원을 꺼리면서, 대부분 "일본군만주군" 출신으로 채워졌다"광복군""국군 창설"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광복군중국군" 출신의 장성이 23명에 이르지만, "최용덕김신""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것을 빼면, 육군에서는 단 1명의 "참모총장"도 배출하지 못했다그에 비해, "일본군" 출신은 "정일권박정희" "대장(5)육참총장(6)공참총장(4)"을 배출했다.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가 "국군육군사관학교"와 단절된 연유다"육사"는 자신의 모체로 "신흥무관학교"를 언급했고, "이회영(신흥무관학교 설립자)독립군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을 제작해, "육사"에 설치하기도 했다현행 "국군의 날""육군 제3사단""휴전선"을 돌파해 북진한 1950.10.01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당시 "육군참모총장사단장""일본 육사" 출신의 "정일권이종찬"이었다현행 "국군의 날""광복군 창군일(09.17)"로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8. 광복군중국군 출신 국군 장성

< 중장 > 김홍일 (중국 귀주강무당, 중국군 소장, 광복군 참모장, 1군단장)ㆍ최용덕 (청국 육군사관학교, 중국군 상교, 광복군 총무처장중국군, 공군 1, 공군참모총장)ㆍ김 신 (중국 공군군관학교, 중국군 소교, 공군 2, 공군참모총장)ㆍ최덕신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중교, 광복군 정령, 육사 3, 군단장)ㆍ안춘생 (낙양 군관학교, 중국군 소교, 광복군 정령, 육사 8, 군 부사령관)ㆍ이준식 (운남 강무당, 중국군 상교, 광복군 정령, 육사 8, 육군대학 총장)

<장 >  유해준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상위, 광복군 부령, 군사영어학교, 군 부사령관)ㆍ이성가 (남경 군관학교, 중국군 소교, 광복군 정령, 군사영어학교, 사단장, 육군대학 총장)ㆍ권 준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상교, 광복군 정령, 육사 8, 수도경비 부사령관)ㆍ박영준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상위, 광복군 부령, 육사 8, 사단장)ㆍ박시창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상교, 육사 3, 부 군단장)ㆍ장 흥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상교, 육사 7, 관구 부사령관)ㆍ김국주 ( ?, 광복군 참령, 육사 7, 관구 부사령관)ㆍ 김관오 (운남 강무당, 중국군 상교, 육사 7, 관구 부사령관)

<장 >  송호성 (하남 군관강습소, 중국군 상교, 광복군 참장, 경비대 총사령관)ㆍ오광선 (신흥 무관학교, 중국군 상교, 광복군 참장, 육사 8기, 호국군(예비군) 여단장)ㆍ전성호 ( ?, 동북구국의용군 소장, 육사 8기, 연대장)ㆍ김동수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중교, 광복군 정령, 사단장)ㆍ김응조 ( ?, 중국 화북군 참장, 군 정보처장)ㆍ이종국 ( ?, 중국 9집단군 상위, 육사 2기, 합동참모본부 국장)ㆍ고시복 (낙양 무관학교, 중국군 중교, 광복군 정령, 육사 2기, 병사구 사령관)ㆍ박기성 (황포 군관학교, 중국군 중교, 광복군 정령, 육사 3기, 육군 군사감)ㆍ장호강 ( ?, 광복군 참령, 육사 8기, 군수기지 부사령관)ㆍ채원개 ( ?, 중국군 사단 참모장, 광복군 1지대장, 육사 3기, 사단장)ㆍ이범석 (운남 강무당, 중국군 소장, 광복군 부장, 초대 국방부 장관)ㆍ채원개 (일본육사 15기, 일본군 소좌, 임정 초대 참모총장(정장), 미군청 초대 국방부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