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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24

수용 ② 1961~1963 : 서산 개척단 (민정식)ㆍ대관령 개척단 (김춘삼) "서산 개척단 (민정식)"은 1960년대 "군사정권" 주도한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회 정화 사업단"이며, "거지왕 김춘삼" 씨가 관리자 노릇을 했다는 "대관령 개척단" 역시 강제 노역을 통한 황무지 개간에 동원됐다. 1. 서산 개척단 (민정식)ㆍ대관령 개척단 (거지왕 김춘삼) →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1960년대 "군사정권" 주도,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회 정화 사업단"ㆍ끌려간 이들은 일괄적으로 "군용 작업복"을 입으며, 강제노역에 "최소 5년 이상" 동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업을 통해, "하층민들을 쓸어내 도시를 맑게 하고 쫓겨난 사람들은 인간 개조의 장으로 이끌겠다."고 선전했다. 이런 "사회 정화 사업"은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2022. 9. 11.
수용 ① 1924.10~1982년 : 선감학원ㆍ영흥학원ㆍ목포학원 "조선총독부"는 "선감학원 (仙甘學園)" 운영에 필요한 보조 인원 15가구 70여 명만을 남겨 놓고, "선감도"에 거주하던 주민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선감학원"을 설치했다. 1. 1942.04월 : 선감학원 (仙甘學園) : 조선총독부 직속의 소년 수용소ㆍ소년 감화원 (感化院)ㆍ선감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의 섬) • 변 천 : 1941.10월 "조선총독부" 지시에 의해 세워져, 1942.04월에 200명의 소년을 처음 수용하였고, 해방 이후인 1946.02월 경기도로 관할 기관이 이관 →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되어, 1982년(제5공화국 초기)까지 40년 동안 운영 • 위 치 : 선감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의 섬) 현재 ".. 2022. 9. 11.
살인- 1987.07 : 이한열 (20세ㆍ87.07)ㆍ강경대 (18세ㆍ91.04)ㆍ강기훈 (25세ㆍ91.05) "이한열 (李韓烈ㆍ1966)"은 1987년 "연세대 정문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피격되었고, "강경대 (姜慶大ㆍ1972)"는 1991년 "명지대"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투경찰"의 집단구타로 요절했으며, 1991.05월 "김기설 사회부장 (1965ㆍ전국민족민주연합ㆍ전민련ㆍ한국진보연대의 전신)"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는데, 친구인 "강기훈 (姜基勳ㆍ동 단체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1. 이한열 (李韓烈ㆍ1966 (전남 화순)~ 1987.07.05ㆍ향년 20세)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학생운동가로,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반 전두환운동"에 가담, 1987년 시위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 2022. 9. 11.
살인- 1987.01 : 박종철 (22세ㆍ87.01)-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고문치사) "박종철 (朴鍾哲ㆍ1964)"은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1987년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ㆍ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일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당시 "홍승상 경감"은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6월 항쟁"의 직접적인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1. 박종철 (朴鍾哲ㆍ1964 (부산)~ 1987.01.14ㆍ향년 22세)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01.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선배이자, "민추위"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박종철은 2001.02.2.. 2022. 9. 11.
살인- 1970.11 : 전태일 (22세ㆍ재단사) - 근로기준법 준수요구 (분신) "전태일 (全泰壹ㆍ1948~1970ㆍ22세)"은 초등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 전태일 (全泰壹ㆍ1948~ 1970.11.13ㆍ22세) 봉재 노동자 (평화시장의 의류제조사의 재단사)ㆍ노동운동가ㆍ인권 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ㆍ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재단사 전태일 월급 : 1970년 23,000원 → 2019년 현재 가치 485,000원 (시급 1,237원)) • 1948 : 대구 남산동 출생 • 1960 : 서울 남대문 초등학교 2학년 편입. 가정 사로 곧 중퇴 • 1963 : 대구 .. 2022. 9. 11.
살인- 1960.03 : 김주열 (16세) - 1960.04.19 혁명 도화선 "김주열 (金朱烈ㆍ1943~1960.03.15ㆍ16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ㆍ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죽기 하루 전인 1960.03.14일 "마산상고"에 합격했다. 1. 김주열 (金朱烈ㆍ1943 (전북 남원)~ 1960.03.15(경남 마산)ㆍ향년 16세) 시신은 "남원"에 있고, "마산 국립 3ㆍ15묘역"에는 "가묘"가 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고,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인 1960.04.11일 마산 앞바다(마산 중앙부두 쪽)에서 떠올랐다. 그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 2022. 9. 11.
학살- 1951.02 : 거창 양민 학살사건 (548명)ㆍ 산청/ 함양 (386명) 1950.06.25일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소탕"을 위해, 주둔하였던 국군 "제11사단(최덕신 중장)ㆍ9연대장(오익경 대령)ㆍ3대대장(일명 화랑부대ㆍ한동석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이다.1. 국군 3대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 학살사건 ㆍ 국민방위군 사건 ㆍ 거창(경남) 양민학살사건) • (경남) 거창 양민학살사건 : 1951.02.09.~11일 : 양민 548명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박산"에서 총살 (유족 785명) • (경남) 산청ㆍ함양 양민학살사건 : 1951.02.07일 06~18시까지 : 양민 386명 (산청(292)ㆍ함양(94))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총살   (유족 732명ㆍ산청(551)ㆍ함양(181))2. (경남) 산청ㆍ함양 양민학살.. 2022. 9. 10.
학살- 1951.02 : 신성모 국방부 장관 (국민 방위군 사건 무마ㆍ1891생) "신성모 (申性模)"는 국방부장관 (2대) 출신으로, "신채호ㆍ안희제" 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창식 공병감 대령"을 시켜, "한강 인도교 폭파(06.28일 새벽 2:30분경)" 를 지시하였으며, 1951.02월 "거창 양민학살 사건"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켰다. 1. 신성모 (申性模ㆍ1891~ 1960ㆍ향년 69세) 독립운동가 (신아동제사ㆍ신한청년당 멤버)ㆍ제독(중장)ㆍ정치인 (내무부장관(2대)ㆍ국방부장관 (2대)ㆍ국무총리 서리)ㆍ191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ㆍ안희제" 등과 함께 독립운동 1945년 광복 뒤, 대한청년단장ㆍ내무부장관ㆍ국방부장관 등을 역임ㆍ1950.04~ 1월까지 국무총리 .. 2022. 9. 10.
학살- 1951.01 : 국민 방위군 사건 (12만명 사망) "국민방위군 사건"은 "6ㆍ25 전쟁" 중인 1951.01월 1ㆍ4후퇴 때, "제2 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ㆍ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한 사건이다. 1. 국민방위군 사건 (國民防衛軍 事件) 전쟁 중인 1951.01월 1ㆍ4후퇴 때, "제2 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ㆍ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한 사건으로, 단지 1달여의 행군 끝에, "약 9만~ 12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희대의 사건으로,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게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징집된 .. 2022. 9. 10.
학살- 1950.06 : 국민 보도연맹 사건 (20만 명 사망)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6ㆍ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어, "보도연맹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6ㆍ25한국전쟁" 초기, 후퇴 과정에서, 정부ㆍ경찰은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檢束)ㆍ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6ㆍ25한국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1. 국민보도연맹 (國民保導聯盟ㆍ보도연맹) 1949.06월,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되었던 단체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정부 주도"로 할당제인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07~8월경 "군ㆍ경찰ㆍCIC(방첩대)"에 의해 "경찰서ㆍ각 지서"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되었다. "연맹원"들.. 2022. 9. 10.
학살- 1948.10 : 여수ㆍ순천사건ㆍ여수14연대 반란 (3,400명 사망) "여수ㆍ순천사건"은 "제주도 4ㆍ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위해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1948.10.19.~ 10.27일까지 계속된 "무장봉기군ㆍ진압군" 사이의 전투이다. 1. 여수ㆍ순천사건 (여순사건ㆍ여순반란사건ㆍ여수14연대 반란사건ㆍ여순봉기ㆍ여순항쟁ㆍ여순군란) "제주 4ㆍ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ㆍ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 흔히 "여순 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ㆍ순천사건"이나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소속의 일부 군인들(약 2,000명)이 일으킨 사건. "제주도 4ㆍ3사건.. 2022. 9. 10.
학살- 1948.04 : 제주 4ㆍ3사건 (3만 명 사망ㆍ제주인구 10%) "제주 4ㆍ3 사건"은 1948.04~ 1954.09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ㆍ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이후 1948.10.19일 "여수ㆍ순천사건"을 발생하게 한다. 1. 제주4ㆍ3사건 (제주도 민중항쟁)→ 여수ㆍ순천사건(1948.10.19) 발생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ㆍ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단독 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처형됐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 일 시 : 1948.04.03 ~ 1954.09.21...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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