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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살인- 1970.11 : 전태일 (22세ㆍ재단사) - 근로기준법 준수요구 (분신)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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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全泰壹1948~197022)"은 초등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  전태일 (全泰壹1948~ 1970.11.1322)

봉재 노동자 (평화시장의 의류제조사의 재단사)노동운동가인권 운동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ㆍ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재단사 전태일 월급 : 197023,0002019년 현재 가치 485,000(시급 1,237))

전태일

•  1948  :  대구 남산동 출생  •  1960  :  서울 남대문 초등학교 2학년 편입. 가정 사로 곧 중퇴  •  1963  :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4학년 중퇴  •  1964  :  식모살이 떠난 어머니를 찾아 상경  •  1965  :  "삼일사(평화시장 안)"에 견습공으로 취직  •  1966 :  "한미사"에서 재단사가 됨  •  1969.06  :  "바보회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 결성  •  1970.09  :  "삼동친목회 (바보회를 발전시킨 것)" 결성. 회장으로 선출  •  1970.10  :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 공장 근로조건 개선요구 및 시위 계획  •  1970.11.13  :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 후 분신   마석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에 안장

초등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 회사에서 "재단사"로 일했다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청서울특별시""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묵살 당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한 후, 분신자살했다. 근로기준법 화형식 :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이었다.

사건 당시, 친구 "김개남 (가명)"에게 자기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했고,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 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이때 "전태일"의 친구였던 "이름 미상의 남자"가 그에게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조영래"1983"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며, 이름을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남성에게 "김개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민종덕"이라는 설도 있다. 그에 의하면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가명인 전태일의 벗의 이름 "김개남(가명)"은 민종덕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그는 전태일을 자신의 고향, "고부"에서 출정한 "동학 전봉준"에 비견하였고, 비슷한 위용을 떨쳤던 "김개남"을 전태일 친구의 가명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명동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였다결국, 당일 밤 10시에 요절했다.

2. 분신 자살

1970.11.13, 경찰자본가들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고, 시위가 무산된 뒤, 점심 식사를 마친 그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화시장" 골목 근처에 있다가 오후 1: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켰고,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왔다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그는 3분가량 방치되었으며,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을 불타고 있는 "전태일"을 향해 던졌다"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한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고 한다.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 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쓰러졌다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의사에게 갔다.

"15,000원짜리 주사 2대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 달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근로감독관" 1명이 전태일을 따라 병원에까지 와 있었다그러나 "근로감독관""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머니가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3~4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명동 성모병원"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엠블런스가 오자,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등과 함께 타고 병원을 떠났다.

차 안에서 "전태일""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 되나, 지켜볼 것이오."라고 마음속으로 분개하였다.

오후 4시경, 그는 구급차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로 다시 후송되었다"서울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그는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그날 저녁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고 하였다.

다시 혼수상태에 있다가, 오후 10"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요절하였다시신은 마석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에 안장되었다.

2. 생 애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는 의류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집에 재봉틀 한두 대를 들여 놓고 삯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그가 6살 때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점을 하던 그의 집은 염색공장에 맡긴 원단이 장마로 상하는 바람에 파산하고,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몇 년간의 고생 끝에 "전상수"는 천막집 1채와 재봉틀 1대를 사들여 삯바느질 일을 하게 되었고, 가세는 점점 나아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인해, 막대한 옷값을 떼먹히고, 다시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대구" 돌아왔다. 전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삼발이 장사"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다그러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에 1년간 가출했다 돌아왔지만, 잠시 학교생활을 하다 재봉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동생 "태삼"과 함께 "서울"로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그의 손에는 작은 이불 1채와 아버지가 만든 어른용 모직 점퍼 8장뿐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그는 동생 걱정 때문에 곧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아버지의 계속되는 술주정과 구타로, 어머니가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자 그도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서울"에서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청계천 평화시장"의 한 의류 공장에 보조로 취업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노동을 하며, 일당으로 당시 차 1잔 값이던 50원을 받았다다음 해,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열악한 환경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되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역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 후 "재단사 보조"로 취직했고, "재단사"가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마침내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그러나 "재단사"가 되었어도 그의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다1967.03.17일의 일기에서는 당시 노동 현실을 엿볼 수 있다"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6,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다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전태일은 종종 어린 보조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밤늦도록 혼자서 보조가 해야 할 일을 해 주곤 했는데, 이것을 여러 번 업주에게 들켜 해고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1969.06"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 설문을 통해, 근로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일은 업주들의 방해로 실패했고, 전태일은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1970.09,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평화시장"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갔다. 좀 더 자료가 많다면 방송을 고려해 보겠다는 방송국 관계자의 말에 그는 노동 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1970.10.06"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이 내용이 다음 날 석간신문인 "경향신문""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로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노동시간노동환경의 개선노동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다"삼동회"를 주축으로 재단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자, 사측과 정부에서는 안절부절 못했다업주들은 "삼동회""사회주의 조직"으로 매도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러나 당시 "신민당 김대중"이 국정 전반에 걸쳐 비판의 소리를 높여가고 있던 시절이라 "박정희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 사회 여론을 살피던 때였다만약 노동자들의 참상이 언론에 계속 보도된다면, "대통령 선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그러다 보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 "노동청"에서는 뒤늦게 실태 조사를 하겠다며, 전태일 등에게 "노동절에 포상하겠다."거나, "모범청년"이라며 회유하려고 들었다.

결국 "노동청"에서 해고된 재단사들의 취직을 모두 보장하고, 1주일 안에 노동 조건을 개선하겠다고 제안했다. 회원들은 모두 취직했고 전태일도 재단사 보조로 취직했다그러나 "근로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결의했다. 결행일은 11.13일이었다

전태일은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다11.13, "평화시장" 일대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업주들은 종업원에게 "오늘 행사에 절대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내렸다.

"삼동회 회원들""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그러나 업주와 경찰들이 현수막을 빼앗는 등 시위를 진압하려 하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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