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李韓烈ㆍ1966)"은 1987년 "연세대 정문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피격되었고, "강경대 (姜慶大ㆍ1972)"는 1991년 "명지대"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투경찰"의 집단구타로 요절했으며, 1991.05월 "김기설 사회부장 (1965ㆍ전국민족민주연합ㆍ전민련ㆍ한국진보연대의 전신)"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는데, 친구인 "강기훈 (姜基勳ㆍ동 단체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1. 이한열 (李韓烈ㆍ1966 (전남 화순)~ 1987.07.05ㆍ향년 20세)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학생운동가로,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반 전두환운동"에 가담, 1987년 시위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과 "6ㆍ29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국민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벌어진 1980년의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됐으며,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였다. 그 뒤 1년간 종로학원에서 재수 후, 19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였다.
< 6월 항쟁 >
1987.06.0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1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07.05일 20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해, "중앙일보ㆍ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1987.07.09일,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 본관→ 신촌로터리→ 서울시청 앞→ 광주 5ㆍ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조된 학생운동의 분위기는 "6ㆍ10항쟁"과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ㆍ29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2. 강경대 (姜慶大ㆍ1972(서울)~ 1991.04.26ㆍ향년 18세) 명지대 민중가요패 "땅의 사람들"에서 활동
04.26일 "명지대"에서 "백골단(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쇠파이프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면서 시위 진압을 시작하자, 정찰조 (시위대의 퇴로ㆍ비상 탈출로를 확보) 역할을 맡은 그는 학교 쪽으로 후퇴하고자, 높이 1.5m 담을 넘으려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혔고, 쇠파이프로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고서 방치되었다.
두부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었고, 이 광경은 다른 학생들에게 즉시 목격되어, 학생들에 의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시간 만에 죽었고, 사후 "망월동 5ㆍ18 묘역"에 안장되었다.
04.29일, "전남대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05.01일 "안동대 김영균", 05.03일 "가천대 천세용", 05.0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05.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 정국"이 조성되었다.
197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90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1년 "명지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서, 민중가요패 "땅의 사람들" 에 가입해 활동했다. 1991년 이전, "호헌 철폐ㆍ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1987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그 이후에도 공안정국과 노태우정권의 수구적 작태로 인하여 사회분위기의 보수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ㆍ보수 세력"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정권의 대응에 대해 운동권이 다시 폭력시위로 대응하면서, 학생운동권이 원하는 언론의 관심, 운동권 내부결속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당국은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을 이용해 진압하는 수위가 높았고, 학생운동을 공안 정국으로 몰아가 탄압한 작태가 학생운동이 급진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학생운동의 급진성"으로, "등록금 인상 반대"를 위시해 학내 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학교 밖으로 진출해 가두를 점거하고서 투쟁하고, 투석전을 벌이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도로를 점거해 교통을 방해하는 저항하는 방식이 계속되었다
1991.04.24일, "박광철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면서, 연세대 집회에 참석한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관에게 불법으로 연행 당했고, 2일 뒤인 04.26일 "명지대" 앞에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해 구출 대회가 진행되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관들이 진압을 시도했다.
사건 다음날인 04.27일,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안응모"를 교체했다. 학생들은 대통령 "노태우의 사과ㆍ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연세대" 앞에서 시위했다
3.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 (김기설)
① 김기설 : 1965 (경기도 파주)~ 1991.05.08ㆍ향년 25세ㆍ고졸ㆍ성남 민청련ㆍ전민련 사회부장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들였다는 걸 알면서도 새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1982년 "인천 수도전기통신고"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83년 중퇴하고, 1984년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이 되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1988.09월 "성남 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의 강연을 듣고 즉시 "성남 민청련"에 가입하고, 열렬한 운동권 활동하였다.
"민청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운동권 활동을 계속한 그는 1991.01월 "전민련"에 가입해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1991.04.25일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과의 대치 중, 경찰의 구타로 숨지자 수많은 운동권들이 항의로 분신자살을 했는데, "김기설" 역시 1991.05.08일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ㆍ경찰의 사과"를 요구하고, 분신 후 투신해 숨졌다.
② 강기훈 (단국대 화학과 재학중) : 유서대필 조작사건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잇따르는 가운데, 1991.05.08.일, "김기설(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의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검찰이 "김기설의 친구인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처벌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형법상 "자살 관여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실제로 죄로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으며, "강기훈"은 법원으로부터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국과수의 필적 감정결과"와 정황에 따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08.17일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11.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회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2년 대법원의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2014년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으며,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ㆍ무죄로 재판결하였다. 이에 검찰이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2015년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재심에서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심 공판이 열린 2014년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강기훈"은 최후진술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서, 이 사건의 책임자들이라고 하면서 "김기춘ㆍ곽상도ㆍ남기춘ㆍ강신욱ㆍ신상규ㆍ송명석ㆍ안종택ㆍ임철ㆍ윤석만ㆍ박경순ㆍ노원욱ㆍ임대화ㆍ부구욱ㆍ박만호ㆍ전재기ㆍ정구영"의 이름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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