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개척단 (민정식)"은 1960년대 "군사정권" 주도한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회 정화 사업단"이며, "거지왕 김춘삼" 씨가 관리자 노릇을 했다는 "대관령 개척단" 역시 강제 노역을 통한 황무지 개간에 동원됐다.
1. 서산 개척단 (민정식)ㆍ대관령 개척단 (거지왕 김춘삼) →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1960년대 "군사정권" 주도,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회 정화 사업단"ㆍ끌려간 이들은 일괄적으로 "군용 작업복"을 입으며, 강제노역에 "최소 5년 이상" 동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업을 통해, "하층민들을 쓸어내 도시를 맑게 하고 쫓겨난 사람들은 인간 개조의 장으로 이끌겠다."고 선전했다. 이런 "사회 정화 사업"은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개척단원"이라고포장된 피해자들 중에는 선량한 시민들이 많았으며, 이들에게는 "인권침해ㆍ가혹행위"가 저질러졌다.
"거지왕 김춘삼" 씨가 관리자 노릇을 했다는 "대관령 개척단" 역시 강제 노역을 통한 황무지 개간에 동원됐다. 절경을 자랑하는 "대관령"에도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이들의 피땀과 눈물이 뿌려졌다.
• 일 시 : 1961~1963년
• 장 소 : 집단수용 - 형설촌 (충남 서산 앞바다 :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일대의 뻘밭 (폐염전 등)
• 피 해 : 119명 사망 (서산 희망공원 무연총 (無緣塚) ) - 굶주림ㆍ영양실조ㆍ갖은 구타로 희생
• 대 상 : 1,700여명 (개척단원의 최대 인원수) ㆍ부랑아ㆍ깡패ㆍ출소자ㆍ윤락녀ㆍ일반 선량한 청소년ㆍ소녀ㆍ여성들ㆍ강제 입소된 15세 이하는 전체 726명 중 187명(25.7% - 1962년도 보고서 기준ㆍ할머니 댁에 가려고 혼자 기차를 탔던 10살 어린이가 끌려올 정도로 군사정권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1961년, "5ㆍ16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사회정화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전국에서 "후리가리" 방식으로, 잡아다가, "형설촌"이라는 곳을 조성하여, 집단수용하였다. 여자들의 경우는 "공장 여공들"에게, "좋은 공장이 있는데, 거기가면 돈도 지금보다 2배는 더 벌수 있다"는 취업사기 방식으로 끌고 갔다.
이곳에 잡혀온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갖은 인권유린을 당하면서, 강제노역ㆍ강제결혼을 하고 1966년까지 "삼청교육대" 보다 더 가혹한 학대를 받으면서, "서산 개척단 농지 조성사업"에 청춘을 바쳤다. "서산 개척단" 수용자들은 산에서 돌을 날라 바다에 둑을 쌓고, "폐염전"을 논으로 만드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새벽 6시에 눈을 뜨면, 종일 매타작과 배고픔을 견뎌가며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수많은 목숨이 억울하게 세상을 등져야 했다. 개척 사업이 길어지면서, 생면부지의 젊은 남녀들은 "강제 결혼"으로 내몰렸다. 심지어 "위안소까지 설치됐었다"는 증언까지 나올 정도로 인권유린은 심각했다.
당시 정부는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지조성이 완성되면, 단원들에게 주택과 농지를 3,000평씩 무상 분배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러한 약속에 "개척단원ㆍ지역 농민들"은 굶주림ㆍ영양실조ㆍ갖은 구타로 맞아 죽어가면서도, 개간한 땅이 내 땅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버티며 생활했다. 그 후, 1968년부터 "농지 분배표"를 분배받고, "가 분배증"도 받았으나, 58년이 지난 지금도 정부는 이것을 도로 빼앗아, "시중 농지가격" 보다도 더 비싼 가격으로 "개척단ㆍ지역농민"에게 팔아먹었다.
2. 배 경
1961년 "5ㆍ16 쿠데타"로 "장면 내각"을 밀어버린 뒤, "박정희 정권"은 정권에 대한 호응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구악일소"라는 명목으로 "깡패 소탕ㆍ정치범"에 대한 재판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업고 부응해, "대한청소년 개척단"도 발족하게 되는데, 이때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사업자(?)로 선정된 것은 "민정식(서울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영)"이었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서 공여 받은 "잉여농산물"을 처리해야할 방법도 고안해야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익명의 "대한민국 육군 대령 1명"을 대리인으로 보내, "민정식"에게 무언가를 제안했고, "민정식" 주도로 거리의 "부랑아ㆍ윤락녀"들을 모아서 서해안의 한 "뻘 밭"을 개간하겠다고 "개척단"을 모집한다. 그렇게 수백 명이 모였고, "개척단"은 "서산군"으로 향했으며, 이러한 "양아치 총각ㆍ창녀 아가씨"들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집단 결혼식"을 올린 뒤, 이들의 활약은 "대한늬우스 국책뉴스"로써 여러 번 선전되기에 이른다.
※ "민정식"의 횡포
그는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기 전, "을지로"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다. 공장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한청소년 기술보도회"라고 해서, 정비공장에 청소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많은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써먹기 시작했다.
그는 동네방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동서다!"라고 거들먹거렸으며, 정부로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을 지원받을 명분으로 "청소년개척단"을 잘 악용했다. 그렇게 지원받은 양곡을 열차로 수송하다가, 경유지인 "홍성역"에서 양곡을 내려서 주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 양곡을 횡령해서 민간업자들에게 팔았다. 또 경찰들을 불러놓고, 돈 가방을 제시하면, 지역 경찰들이 그 돈을 받기에 바빴다. 당시 "서산시"의 지역 공무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냐면, 막말로 "민정식의 개" 수준이었다.
"민정식"이 나타나면, 당시 "군수"에서 "경찰서장"까지 쭉쭉 따라나서기에 바빴다. "경찰서"는 벌벌 떨고, "민정식"은 무슨 "대통령의 사자" 취급을 받았다.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었던 "민정식"은 천수를 누리다가, 2017년 사망했다. "민정식"이 소유했던 건물의 명의가 "민○○"이라는 사람에게 이전된 것을 보고 그를 추적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어렵사리 유가족을 만나 "민정식"에 대해 물었으나 유가족은 취재를 거부하여 더 이상 추적은 불가능했다.
3. 강제 납치
"삼청교육대ㆍ부산 형제복지원"과 비슷한 수법으로, 소시민들은 주로 "통행금지 어겼다"고 잡아 들어가거나, 길 잃은 아이를 유괴한 경우가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소년에서 멀쩡하게 살던 청년들까지 당했으며, 그중에서는 제법 "인텔리"인 이들도 있었다. 이런 불법납치들은 주로 "경찰" 등 공권력에서, 실적을 채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붙잡는 것이었다. 이는 속칭 "후리가리"라 불렸으며, "후리가리"로 피랍당해 노역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4. 강제노역
무식하게 돌을 날라서 바다를 메우는 식의 "강제노동"을 반복시켰다. 당시는 "건설용 중장비"가 매우 드물던 시절이라 건설 공사는 거의 인력으로 이루어졌고, "개척단 단원들"은 인근 야산에서 채굴한 석재를 일일이 바닷가로 날라 "방조제"를 축조해야 했다.
간척 공사는 토목 기술이 발달하고 중장비가 많은 현재에도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는 난공사 중 하나인데, 당시 열악한 조건에서 "개척단원들"은 그야말로 매일같이 중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거기에 가축 사료주기나 허드렛일까지 더해졌다.
5. 열악한 복지
영양실태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밥도 "5홉 짜리 그릇"에 "보리밥"을 대충 퍼주는 식으로 해결했고, 그나마도 반찬이라고는 "소금국"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다른 먹을 것이 있다면, 혈안이 되었는데, 원래 소에게 줄 콩 사료를 빼돌리는 것을 "개척단원들"이 먹다보니 키워야할 소가 굶는 웃지 못할 광경은 기본이었고, 굶주린 이들이 그렇듯 살아 돌아다니는 것들은 생으로 잡아먹기 위해, 어떤 종류든 마다하지 않았다.
캠프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 얼기설기 세운 천막에 여러 명이 콩나물시루처럼 늘어져서 자는데, 비가 오는 날이기 라도 하면, 그 천막 사이로 빗물이 다 튀었다.
6. 폭 력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벗겨놓고 때리는 건 일상이었으며, 겨울에는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심지어 밉보인 이들은 "1주일 진단을 끊어놓아야 한다."는 협박과 함께 폭행이 가해졌으며, 죽일 기세로 폭행을 할 때는 "인간 샌드백 수법"으로 죽을 때까지 때렸다. 한마디로 그들은 "간수"로 였다.
노역자들을 폭행하거나 경비를 서는 이들은 "구호반"이라고 불렸는데, "개척단" 구역 외곽의 철조망을 앞에 두고 경계를, "구호반들"이 소총을 들고 20~50m간격으로 서 있었으며, 순찰을 했다.
7. 삼엄한 경비와 탈출시도
몇몇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서 옷을 벗은 채로 "뻘 밭"을 달리기도 했으나, 총에 맞아 죽거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다른 노역자들이 보는 곁에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시범케이스로 죽을 때까지 "구호반들"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것도 안 되자 스스로 불구가 되어서 "개척단"에서 나가려던 끔찍한 시도까지 있었다, "함정석(5통 노역자)"씨 증언으로는 5통에서 2명이 화장실에서 음경을 스스로 자른 뒤, 간부에게 보여줬다는 사례도 있고, "유재문"씨 목격담으로는 병가 퇴소를 위해 바늘을 쌈지 째로 삼켰지만, 발각되어서 뱃속에 있는 바늘을 토하면서까지, 맞아죽었다.
한편 캠프 바깥에서 "개척단"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서산"에 찾아온 "개척단" 친지가족들도 있는 법인데, "구호단"이 이들을 가로막으면서 "여기는 당신들 찾는 사람들이 없다"라고 우겨서 강제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심지어 이들의 제지는 "군 장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정화자"씨 약혼자는 당시 육군 대위였는데, "서산"에 납치당했다는 걸 알게 된 약혼자가 찾아왔는데, 장교 신분인 사람에게조차 잃어버린 애인을 찾겠다는 기본적인 요구사항에도 "그런 사람 없다"면서 강제로 돌려보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민씨" 이하, "구호단들"은 상당히 초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8. 결혼식 쇼의 실체 : 대한뉴스 "내 고장 소식" 보도
"대한뉴스 보도"에 의하면, "충남 서산군 모월리에 있는 대한 청소년 개척단 광장에서 125쌍의 합동결혼식이 있었는데, 불량 청년들과 윤락녀였던 사람들의 결혼식"이라고 한다. "결혼식"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고, 사실상 "국정방송"에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운동장에다가 우선 남성 노역자들을 세운 뒤, 여자들이 가서 아무렇게나 파트너를 찍으라고 하고 강제로 그 파트너와 결혼해서 살게 하라는 것이다. 설령 그게 싫다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심지어 싫다고 우는 여자에게도 강제로 짝을 지었다. "변호사 박준영"은 "내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조차 박탈해버린 인권 탄압"이라며, 한탄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러한 요식행위로 강제로 짝이 지어진 사람 중, 절반 가까이는 이미 배우자가 있는 채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도 "단체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결혼하기 싫다고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해서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정부에서도 그게 "억지 춘향"인 건 알긴 알았는지, "강제 결혼"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후 "45쌍은 완전파경ㆍ40%는 불안상태"라고 공식발표한 내용이 당시 언론보도에 실렸지만, 무슨 사회적 실험인 것 마냥 건조하게 보도되었다.
9. 암매장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선주민들이 "면산"이라고 부르던 곳 일대에다 아무렇게나 묻혔다. 정말로 아무렇게나 묻혔기에, 우천 시, 암매장된 사체가 노출되는 경우도 있는데, 부패로 인해 백골화가 진행된 사람도 있는가하면, 사체뿐만 아니라 "산송장 상태"로 숨이 붙어있는 사람까지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 "면산"을 공원묘지로 단장하기 위해, 굴삭기로 땅을 파는 과정에서도 뼈가 수백 구가 발굴되었다. 이렇게 나온 뼈들은 한군데로 모아서, 묘지의 높은 한 군데에 6개로 나눠서 일괄 매장했는데, 묘지 측에서는 이를 "무연총(無緣塚)", 말 그대로 "무연고자들의 무덤들"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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