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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살인- 1987.01 : 박종철 (22세ㆍ87.01)-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고문치사)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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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朴鍾哲1964)""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1987년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일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당시 "홍승상 경감""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6월 항쟁"의 직접적인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1.  박종철 (朴鍾哲ㆍ1964 (부산)~ 1987.01.14ㆍ향년 22세)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01.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선배이자, "민추위"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박종철은 2001.02.26"서울대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전기고문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01.14서울 용산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전두환 정권"에 맞서 "6월 항쟁"촉발되었고, 결국 전두환은 "629선언" 발표함으로써,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임사제 : 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박종철

2.  관련 인물

박종운 : 당시 경찰이 박종철을 고문하여 소재를 밝히려 했던 그는,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여, 논란이 일었다.

박처원 차장(치안본부 5차장대공경찰의 대부):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 고문에 의거한 "대공수사"에서 남다른 활동을 벌인 "이근안(고문기술자)" 총애했다고 한다

"이근안"의 도피를 지시하고,"전낙원(카지노의 대부)로부터 "경찰발전기금"으로 10억 원을 받아내 "이근안"에게 거액의 도피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194720살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으로 물러날 때까지 주변에 이른바 "박처원 사단"을 형성했으며, 대공조직과 의리를 남달리 강조했다.

정호용 :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됨 이부영 :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안상수 검사 : 사건 지휘자(사건 당일 밤 당직자), 담당 검사로, 수사 당시 사건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한나라당 당대표창원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창언 검사 : 수사 지휘자, 이후 민자당(현 새누리당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박상옥 검사 : 담당 검사로,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시 사건이 축소, 은폐된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3.  고문치사 사건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1984,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1986,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04.01"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07.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을 선고 받았으며,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01.14"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01.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01.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4.  폭로

01.14일 밤에 경찰은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 명령"을 내렸다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01.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01.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2명이 "박종철 군"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었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0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박종철은 2001.02.26"서울대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서울대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세운 그의 추모비와 흉상은 학내 "민주화의 길" 가운데 한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다.

 

5. 박종운 (朴鍾雲1961~ 충북 청주) 민주화운동가자유시장 경제학자

1985 -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2001 -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전공) (행정학 석사 2016 - 연세대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5 - 민주화추진위 학생운동담당 지도위원  2000 - 한나라당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  2006 - 경기도 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  2008 - 한나라당 18대 총선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국회의원 후보  2009 - 경기남부도로 상임고문  2012 -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박종운

1981년에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그는 "이정우백태웅" 등과 함께 "81학번 서울대 민주화 학생운동의 지도자"였고, 386세대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1984"민주화 추진위원회"를 만드는데 참여했고, 이로 인해 1985"민주화 추진위 사건"으로 현상 수배되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박종운을 잡기 위해 서울대 "대학문화연구회" 후배인 민주화투사 "박종철"을 참고인으로 연행해갔다경찰 당국은 박종운의 소재를 알려고 박종철에게 물고문을 하였다.

박종철로서는 선배 박종운이 얼마 전 하숙집에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처지였다그러나 고문 경찰들은 이를 비밀을 지키는 것으로 착각하고 참고인인 박종철에게 더욱 세게 고문을 하였고, 이로 인해 박종철은 사망했다박종철의 죽음에 분노한 국민들은 군사독재정권에 거세게 항거했다

1987"2·7","4·3"투쟁이 그 일환이었고, 1987.06.10"박종철 고문치사 진상규명과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시발로 "6월 민주항쟁"은 거세게 불타올랐고, 마침내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승리를 이루었다. 박종운의 투쟁과 박종철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를 하였다.

박종운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를 위한 모색 끝에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정치 민주화처럼 오직 소비자인 국민 대다수가 선택권을 가지는 시장경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1989.11.09일 일어난 "베를린 장벽 붕괴"1991년의 "소련 붕괴"는 그간 학생운동 과정에서 한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을 폐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사회주의 독재체제""민주주의"라고 하는 억지를 버린 것은 "행동하는 민주화운동가"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사회주의"를 그대로 간직하고 "독재체제"를 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었고 화석화된 사고가 오히려 국민에 대한 변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박종운은 1995년 이후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강동구청에서 "김충환 구청장"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김충환 구청장"을 도와 민주적 자치행정으로의 전환에 기여했다.

"민주개혁정치 실천모임"의 회원으로서 영국의 대처와 뉴질랜드의 민영화 분권화 개혁에 대해 연구했다.

박종운은 2000년 대쪽판사 출신의 이회창이 총재로 있던 "한나라당"에 영입되어, 부천 오정구에서 2000, 2004, 2008년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당선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박종운은 2006년부터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일했고, 이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박종운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 자유시장경제로 소비자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고, 북한에는 김정은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신문 등에 발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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