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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살인- 1960.03 : 김주열 (16세) - 1960.04.19 혁명 도화선

by 당대 제일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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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金朱烈ㆍ1943~1960.03.15ㆍ16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ㆍ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죽기 하루 전인 1960.03.14 "마산상고"에 합격했다. 

 

1.  김주열 (金朱烈1943 (전북 남원)~ 1960.03.15(경남 마산)향년 16)

시신은 "남원"에 있고, "마산 국립 315묘역"에는 "가묘"가 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고,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인 1960.04.11일 마산 앞바다(마산 중앙부두 쪽)에서 떠올랐다. 그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시체를 검시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 17cm 3cm)이 안부에 박힌 것"라고 진술했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3일동안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마산시(馬山市) : 1949~ 2010년까지 존재했던 시ㆍ2010.07.01일(이명박 정권), 인근 도시의 "창원시ㆍ진해시"와 통합하여, "창원시 마산합포구ㆍ마산회원구"에 속하는 지역

김주열

시신은 04.13일 밤 11"마산"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용정리" 도착하여, 마을 "선산(우비산)"에 묻혔다1960.03.15일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로 이루어진 평화적 시위대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마산 데모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는 남성파출소북마산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사상자(7명 사망)가 발생했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2. 김덕모 증언  :  "숨진 김주열 열사 시신, 바다에 버릴 때, 내가 운전했다" (2016.03.13)

김덕모

1960.03.16일 새벽, 경찰이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지프차에 실어 마산항 부두 쪽으로 옮겼을 때, 그가 바로 운전수였다. "김덕모"는 부산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마산에 살고 있었다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아는 사람에게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당시 그는 20살이 되기 전에는 "운전면허증"을 정식으로 받을 수 없어, "가짜 면허증"으로 운전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식 운전면허증을 받은 김 씨는 마산에 사는 한 사업가의 "지프차"를 운전했다당시 경찰은 차량이 많이 없어 이 사업가의 지프차를 간혹 빌려 쓰기도 했다당시 "반공청년단" 소속이던 김 씨는 지프차를 운전하며 경찰을 돕기도 했다.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03.15일 김 씨가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다녔고, 김 씨는 온종일 "박종표"와 지냈던 것이다.경찰은 다음 날인 16일 새벽, 김 씨가 운전하던 지프차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실어 옮겼다.

당시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의 명령을 받고,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 지프차에 시신을 실어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다교통 주임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1960.03.15일 밤10시경 마산 남전(지금의 한전, 현 무릎병원 앞) 앞에서 발견해, "손석래 마산경찰서장"한테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유기한 것이다그런데 김 씨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지프차에 실었던 장소가, 지금까지 알려진 "마산 남전" 앞이 아니라 마산세무서(현 마산합포구청 앞) 옆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세무서 울타리는 탱자나무였고 그 옆에 작은 도랑이 있었다.", "거기서 시신을 지프차에 실었다"고 말했다.

김영만 전 회장은 "마산 남전과 마산세무서 거리는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시신을 유기한 시간이 16일 오전 5시경으로 추정되는데, 15일 오후 10시경 발견된 뒤부터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시신을 옮긴 지프차에는 "운전수(김덕모)""박종표 경비주임", "2명의 경관(한대근·황재만)"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김 씨는 "한 명이 더 있었고, 그 사람은 민간인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지프차에는 모두 5명이 타고 있었다. 반공청년단 활동을 했던 민간인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그 뒤 어떤 일을 했는지도 안다.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김 씨는 그 민간인 이름을 거명했지만 "후손이 있기에 밝히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지금까지는 시신을 옮기기 위해 지프차의 뒷부분 "시트"를 뜯어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 씨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그는 "지프 차 운전을 했기에 시트를 뜯어냈다고 하면 운전수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김영만 전 회장은 "지난해 10월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지프 차 시트는 뜯어내지 않았고,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시신을 가운데 앉힌 상태에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김덕모씨는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해서 시신을 싣고 간다는 생각에 겁이 많이 났다. 처음에 시신 상태를 한번 보았는데, 최루탄이 눈에 박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경찰서장은 "시신을 감쪽같이 없애라"거나 "알아서 없애라"고 명령했다"박종표" 등 경찰은 처음에 시 외곽으로 가서 시신을 야산에 묻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삽 등 장비가 준비되지 않았고, 아침에 시골에서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주민에 의해 발각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김씨는 "일부 기록에 보면 군용 헌병차가 지프 차를 추격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고, 따라오는 헌병차는 없었다.", "당시 지프 차 유리가 없는 상태에서 운전해 가다 보니 새벽이고 해서 굉장히 추웠고, 그래서 시 외곽이 아니라 바닷가 쪽으로 가기로 했다."고 증언했다.

또 어떤 기록에는 "시신을 실은 지프차가 옛 마산경찰서(현 마산중부경찰서) 앞까지 갔다가 돌아와 해안도로를 통해 마산 중앙부두로 갔다"고 되어 있다그런데 김씨는 "경찰서까지 가지 않았고, 세무서와 경찰서 사이에 있는 옛 소방서 앞 도로를 나와 바로 바닷가 쪽으로 갔다"고 말했다시신을 바다에 던질 때, 상황도 이야기했다.

김씨는 "당시 마산 제1부두(현 가고파국화축제장) 쪽에는 공사를 위해 철사로 돌을 묶어 놓은 게 있었고, 시신을 돌에 매달기 위해 철사를 작은 돌로 끊어서 사용했다"고 말했다.

김영만 전 회장은 "시신을 어떻게 바다에 유기했는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새로운 증언이 나온 것"이라며, "아무런 도구도 없이 철사를 사용해 완전하게 고정하지 않았으니까 한참 뒤에 철사가 풀려 시신이 물 위로 떠올랐던 것"이라 풀이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인 04.11일 마산 앞바다(마산 중앙부두 쪽)에서 떠올랐다.

그 뒤 김씨는 한동안 숨어 지냈고, 경찰과 진술을 짜 맞추는 과정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그는 "진주와 부산의 호텔, 여관에서 경찰과 지내기도 했고, 부산에 있는 경찰 간부의 집에 가기도 했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진술하지 않았고, 경찰과 짜 맞추기를 했다"고 말했다

김덕모 씨가 김주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과 관련해 처벌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그는 단지 경찰의 지시에 의해 지프차를 운전한 게 전부였다그는 당시 검찰에서 진술서를 써주고 풀려났고, 곧바로 군대 입대했다.

김씨는 "경찰과 짜 맞추기를 어느 정도 한 뒤 자수하라고 해서 스스로 찾아가 진술서를 썼다. 그랬더니 입대하라고 해서 군대 갔다"고 말했다김영만 전 회장은 "04.11일 이후 국회 진상조사단이 꾸려지고 난리가 났다. 경찰이 그 뒤에도 짜 맞추기를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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