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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학살- 1951.02 : 거창 양민 학살사건 (548명)ㆍ 산청/ 함양 (386명)

by 당대 제일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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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6.25"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소탕"을 위해, 주둔하였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중장)9연대장(오익경 대령)3대대장(일명 화랑부대한동석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이다.

1. 국군 3대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경남) 양민학살사건)

(경남) 거창 양민학살사건 : 1951.02.09.~11: 양민 548명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박산"에서 총살 (유족 785)

(경남)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 : 1951.02.0706~18시까지 : 양민 386(산청(292)함양(94))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총살   (유족 732산청(551)함양(181))

거창 양민

2. (경남)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 (山清咸陽)

1951.02.0706~18시까지 "경남 산청군함양군" 양민 386(유족회는 705명 주장)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

장소 : 2개군 3개면 4개 마을

(산청군 : 금서면 가현마을방곡마을 / 함양군 :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625 당시, 지리산일대 공비토벌작전 (작전명령 제 207,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4대 국회 35회 임시회 : 산청함양거창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 2: 1,818명 인명 피해)

사망자 및 유족 등록 사항 (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결정)

  사망자 : 386(산청(292)함양( 94)) 유족회 주장 : 705명 / 유족 : 732(산청(551)함양(181))

 

11사단 9연대 3대대 (일명, 화랑부대)의 작전 행로

1950.06.25"한국전쟁" 이후, 09.25"빨치산 소탕"을 목적으로 육군 11사단이 창설되고, 사단(최덕신 중장)9연대장(오익경 대령)3대대장(한동석 소령) 등이 임명되고, 9군단장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특히 "11사단 9연대"가 적개심이 촉발된 계기는 11.29"남원"의 사단본부 참모회의에 참석하려고 "리산 고동재"를 넘던 미 군사고문단의 리 대령장교 2사병 28명이 적에게 공격당하여 사망한 것이다. 남원 지휘관 회의에서 어떤 사항이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더욱 강경한 초토화 작전이 수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청함양지역, 대토벌 작전과 양민 대학살

1951.02.05, "오익경 대령(9연대장)한동석 소령(3대대장)"은 경찰을 포함한 "청년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700여 명을 이끌고, "거창군 신원면"으로 진격하였다3대대 주력부대는 "신원면"에서 빨치산의 흔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젊은 여성을 무차별로 성폭행하고, 노약자들에게는 강제로 군수물자 등을 이동하게 하였고, "이종대 (정보장교)"는 노인 부녀자 등을 총살하는 등, "수복"이라는 미명아래 아주 난폭하게 행동하였다02.07, "대토벌 작전"을 위해 "산청"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1진은 "산청" 방면에서, 2진은 "함양군 유림" 방면에서, 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위하여, "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가현방곡화계주상자혜리)함양군 휴천면(촌리)유림면(손곡지곡서주리)"등에 모든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미친 듯이 무차별적으로 남녀노소, 어린이를 막론하고 처참한 학살을 감행하였다"산청함양"의 대학살은 02.07일 동이 틀 무렵, "산청군 금서면"에 소재한 "지리산 고동재"를 넘어온 (신가재부락) 3대대 2중대 등의 병력은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무조건 "가현부락(당시는 가재)"에 들이 닥쳐, 주민들을 동네 앞 논들에 모이게 하고, 가옥에 무차별적으로 불을 지르고, 주민가축을 강제로 내몰고, 무고한 양민을 집단 총살을 감행하였다이후 "방곡리"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무고한 주민을 정 조준하여 양민을 학살하고(국회 속기록, 35 임시회), 시체에다가 불을 지르고, 총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다음은 "점촌 부락" 마을 앞 하천 변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비무장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1.5km 정도 아래 위치한 "산청군 금서면 자혜주상화계리" 마을에 들이닥쳐, 호각을 불며 집집마다 돌면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경호강변"에서 주민좌담회를 한다며, 빨리 집결하라는 국군의 독촉으로 설 명절을 맞은 주민들은 놀란 마음으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마을" 앞에 얼음이 얼은 경호강 빙판위를 집결하게 한 후, 미리 구덩이를 파고, 주민들을 정렬시켜, 눈을 감게 하고, 경 가족들은 대열에서 나오도록 선별한 후, 앞서 "가현방곡점촌" 등에서 행한 양민학살과는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였다("서주리"의 학살은 11사단 9연대 휘하의 "화랑부대"라고 하는 3대대 부대가 시국 강연회 한다고 유림면의 손곡지곡서주, 금서면의 자혜주상화계리 등 6개 마을양민들을 아침 일찍부터 집결시켜 오후 늦게까지 눈감고 줄을 세운 후, 기관총소총으로 정조준, 또는 수류탄으로 눈을 감고 줄서있는 양400여명을 처참히 학살하였다.(국회속기록35회 참고)

그리고는 시체 위에다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르고, 다음날 피해를 당한 친지와 가족들은 시체를 간할 수가 없어 입은 옷의 바느질 형태 등으로 자기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증언))

이리하여 소위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의 양민 대학살은 장장 10여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산청함양"을 경유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일명 화랑부대)" 병력의 다음 이동지역은 "거창군"이었고, "거창군 신원면 청연마을"에 진입한 날은 1951.02.09일이었다.(김동춘 교수 논문집 참조)

이날부터 3일 동안,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처참히 자행되었다.

3. (경남) 거창 양민학살사건 (居昌)

1951.02.09~11,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이다양민 548명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유족 785)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김종원 대령(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3(내무법무국방)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 오익경 대령(9연대장)한동석 소령(3대대장)이종배 소위(학살 실제 집행)" 등 사건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후에 1960"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 끌어다가 생화장(生火葬) 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건개요

1950.06.25"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소탕"을 위해, 주둔하였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중장)9연대장(오익경 대령)3대대장(일명 화랑부대한동석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이다.

1951.03.29, 군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보고로 공개되었다02.11, "3대대장(한동석 소령)"의 직접지휘로 부락민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공무원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48명을 공비소탕 명목으로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한동석 소령은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1951, 당시 "국군 11사단""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동원되어 있었다.토벌을 위해, "최덕신 중장(11사단장)"이 휘하 부대에 보낸 방침은 "견벽청야(堅壁淸野빨치산들이 머물 지역 자체를 없애버린다)"였는데, 방침에는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제거대상으로 본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 출동한 "한동석 소령(3대대장)"이러한 방침을 그대로 이행, 민간인들을 안전지역으로 피난시킨다는 명목으로, 인근 초등학교로 사람들을 전부 모은 후, 군경가족 등을 추려내고는 주민들을 전부 인근 "박산(朴山)"으로 끌고 갔다"국군이 지켜주는 피난길을 간다"는 말을 믿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따라간 이들에게 쏟아진 건 국군의 총알이었다. "3대대 병력"은 시체에 휘발유로 불을 붙이고 매장하는 등 증거인멸에도 나섰다.

하지만 그런 지옥 속에서도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고, "박산"으로 끌려가기 직전 선별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억울함을 참지 못한 살아남은 이들이, 당시 "신중목 (거창지역 국회의원)"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신중목"은 당시 악명 높던 헌병대특무대의 협박추격을 피해, "부산극장"에서 열린 제54회 임시국회에서 사건을 공개하면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거창지역"으로 파견되었고, 당시 지역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이 국회조사단을 "빨치산"으로 위장한 국군병력으로 방해하는 짓을 저지르고, 국군에서는 죽은 자들은 전부 빨갱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국에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이 실제 벌어졌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전원 군사재판에 넘겨져, "최덕신 중장(11사단장)"은 직위 해제"오익경 대령(연대장)"은 무기징역"한동석 소령(대대장)" 징역 10"이종배 소위(학살 실제 집행)"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게릴라로 위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의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 대령(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은 징역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김종원"을 제외하면, 저지른 죄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는 판결임에도, 판결 얼마 후 관련자들은 전부 특사로 풀려나 현역에 복귀했다. 다만 "최덕신"의 경우, "적성마을 토벌"이 주민소개 등으로도 해석 가능하여 학살로만 해석되지는 않는 점이 적용되어, 부하 관리소홀 혐의만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60419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2공화국" 시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와 생존가족이 당시 학살에 협력했던 "면장 박영보"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면서, 사건은 다시한번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거창" 생존자들은 명확한 진상 규명과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1960"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을 전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넣고 말았다"박정희 정권"에서 2인자인 "정일권"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최덕신 중장" "박정희 정권"에서 밖으로 쫓겨나기 전까지는 호의호식하였다. 직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종원"도 권력은 잃었지만 조사방해는 중죄도 아니고, 학살가담자가 아니라며, 더 이상 처벌하지 않았다. 한"오익경한동석"의 경우, 1년도 안되어 사면되어 현역으로 복직했다는 것이 1960년 뒤늦게 밝혀졌고, 이후 다시 재조사를 받았다이후 "11사단"은 전방으로 보내졌고, 대신 다른 사단부대가 토벌에 투입되었다.

여담으로, "한동석 부대"1차적으로 집결했을 당시, 1명의 빨치산도 잡지 못하자, 화가 난 "오익경 대령"에게 심한 문책을 당했고, 그로 인해 열 받은 "한동석"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참고로 이러한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태백산맥 8(조정래 소설)2공화국(드라마)에 다뤄져 있다.

4. 또 다른 학살 발견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양민학살사건

이곳 집단학살 터가 처음 알려진 것은 "김석창 PD (마산 MBC)"의 보도에 의해서였다

지금까지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유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발굴 작업을 통해 "인상(仁商)금중(金中)"등 학교명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진 단추가 발견됨으로써 학살자들의 신원을 밝히려는 작업도 다시 활기를 띨 전망이다.

우선 이것은 "625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인 "거창산청함양" 사건과 전혀 별개의 사건이다.

유골이 발굴된 "시천면 학살"의 경우, 피 학살자가 지역주민들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며, 생존자나 유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그들의 신원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다만, 그동안 발견된 기록자료목격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아이와 아녀자가 다수 포함된 민간인들이 이불이나 냄비 등 세간살이를 든 채 11대의 버스에 실려와 이곳에서 모두 총살됐다"는 것이다이로 미뤄보면,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적어도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이거나 보도연맹원은 아닌 순수 양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60419 직후, "부산일보(60.05.17)한국일보(60.05.19)" 보도기사에 나타나 있다.

"부산일보"의 경우, 당시 이 작전에 참여했던 "김남준(시천면 특공대장)"의 증언을 인용해 "냄비까지 소지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500명으로 피란민을 이민시켜 준다며, 끌고와 학살했다"고 전하고 있다"한국일보""세간살이까지 가지고 아이들과 부인들이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산 주변 주민들로 보인다"고 보도했다당시 양민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통주" 씨 등 현재 마을주민들의 증언도 이 같은 신문보도와 일치하고 있다이들 주민은 "부녀자와 어린아이가 주로 많았으며, 모두들 이불과 냄비까지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총살현장을 직접 목격한 시아버지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는 한 주민은 "당시 군인들이 한사람씩 세워놓고 차례로 총을 쏘아 죽였으며, 이 때문에 다른 학살사건과 달리 생존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가해자에 대해 두 신문은 "1~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3대의 트럭에 타고 온 군인들"이라고 보도했다.

학살에 동원된 군부대 소속에 대해서도 "한국일보"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보도했으나, "부산일보""거창사건"을 일으킨 "11사단 9연대(화랑부대)"로 인솔자는 "김종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그러나 당시 "김종원"은 이 부대소속이 아닌 "계엄 민사부장"이었던 점으로 미뤄, "부산일보" 보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사건날짜도 두 신문은 약간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한국일보""함양산청" 사건이 있은 지 보름 후인 1951.02.21일이라고 전한 반면, "부산일보"03.12일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어쨌든 이상의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면, 무려 500여 명의 양민이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됐으며, 생존자가 없고, 대부분 일가족이 모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 최덕신 (崔德新ㆍ1914~1989ㆍ향년 75세)

군인(육군 중장)천도교 교령"지리산 토벌군"으로 "거창양민 학살사건" 현장 최고 책임자(625전쟁 때, 8사단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남한 출신 월북자로서는 최고위급 정치인 (외무부장관(9)1961~1963)"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으로 월북하여, "북한"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 10대 소년 시절, 부친인 "최동오(독립운동가)" 만주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녔고, 사망시 "김일성"이 직접 조문했다고 한다. ( 출 생 : 평북 피현군 용흥리  /  묘 소 : 애국열사릉 (북한판 현충원))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旿)"의 아들로 태어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을 맡았다. "국민혁명군"에서는 주로 미군과 국민혁명군 간의 군사외교협력 업무를 맡았고 이러한 경력은 후일 "휴전협정"에서 한국 대표를 맡거나, "혁명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맡게된 계기가 되었다해방 이후,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625 전쟁 때, 8사단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막바지에는 "휴전회담 대표"를 역임하였다. "1군단장"을 지낸 뒤 1956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초대 남베트남 대사ㆍ태국 대사" 등 외교관을 역임하다가,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1961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08월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1967.07 "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의 수습이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박정희"는 그를 해임해 버렸다1967년부터 6년간 "천도교 교령"을 지냈고, 1976.02월 미국으로 이주했다이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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