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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암살 • 학살 • 수용 • 살인

학살- 1951.02 : 신성모 국방부 장관 (국민 방위군 사건 무마ㆍ1891생)

by 당대 제일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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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 (申性模)"는 국방부장관 (2대) 출신으로, "신채호ㆍ안희제" 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창식 공병감 대령"을 시켜, "한강 인도교 폭파(06.28일 새벽 2:30분경)" 를 지시하였으며, 1951.02월  "거창 양민학살 사건"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켰다.

 

1. 신성모 (申性模ㆍ1891~ 1960향년 69세)

독립운동가 (신아동제사신한청년당 멤버)ㆍ제독(중장)정치인 (내무부장관(2)국방부장관 (2)국무총리 서리)1910,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안희제" 등과 함께 독립운동

1945년 광복 뒤, 대한청년단장내무부장관국방부장관 등을 역임1950.04~ 1월까지 국무총리 서리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장관1930년부터 영국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화객선 선장제독(중장)ㆍ"이승만"은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우대하였는데, "신성모""런던 유학"으로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ㆍ"한국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06.28일 새벽 2:30분경) 지시자"이며, 1951.02"거창 양민학살 사"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켰다. 1951.01"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을 무마하려다가,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신성모

•  출 생 : 경남 의령군   •  사 망 : 경남 의령군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 •  사 인 : 뇌출혈

•  : 소창 (小滄 •  별 칭 : 항해대왕 (이극로에 의해)

•  학 력 : 1910-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  1914- 오송상선학교 항해과남경해군사관학교해군소위 / 1929- 런던 항해대학에서 수학 1등 항해사자격 취득

•  경 력 : 1910-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신채호안희제" 등과 독립운동  •  1919- "상하이 임시정부" 임정 군사위원  •  1940- 09"한국광복군"이 설치되자, "임시정부"에서 "임정 군사위원직" 특별 임명  •  1945- "대한청년단장내무부장관국방부장관" 등을 역임  •  1950- "국무총리 서리"(04.21~11.22)ㆍ"이범석""국무총리"를 사퇴하고, "이윤영""국무총리 서리" 인준이 부결되면서, 그는 1950.04.21"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1122일까지 근무하였다.

1910.08,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신채호"와 고향선배인 "안희제"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1912, "동제사"에 가입하고, "동제사"에서 "신규식" 등이 개설한 "박달학원"에 다니며 수학하였다

1913, "상하이"로 가서, "오송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항해과"에 들어갔다"오송상선학교"에서 1년간 배운 뒤, 학교장 추천으로 "남경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였다.  "남경해군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군 해군소위"에 임명되어, "중국군 해군본부"에서 "해군원수 살진빙(薩鎭氷) 사령관"의 전속부관 장교로 근무하였고,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서면 제출한 데 분개하여, "박용만신숙"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 발송하였으며, 이후 "신채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

1948.11월에야, 배편으로 환국하였고, 귀국 즉시 그에게 "제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당시 "영국 상선 선장인도 상선회사 고문, 이사 등을 지냈지만, 중국에서의 군사 훈련을 받은 점중화민국 해군제독 살진빙(薩鎭氷)의 부관으로 있었다는 점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는 점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해군 중장"의 계급이 부여되었고, 그는 "신성모 제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2. "국방부 장관" 재직 시

1949.07.17,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지만, "이범석지청천김홍일" 등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환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 업무통신 관련통역 관련"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군사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정일권""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발령을 받은 얼마 후였다개전 초기인 1950.06.27,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성모 국방부장관"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발언했다게다가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창식 공병감 대령"을 시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게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포로가 발생하자, "신성모"는 모든 책임을 그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뿐인 "최창식 대령"에게 뒤집어씌우고, 면피용으로 "최창식 대령""작전비행죄(作戰非行罪) 혐의"로 총살시켰다.

1951년 발생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여, 국회가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한 결과,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이때 신성모는 이를 무마하려다가,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51, "주일본 수석공사(5)"로 근무하였다이때 그의 "일본공사관" 부임을 놓고, "조병옥 내무장관 장면 총리" 등이 반대했고, "윤보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역시, "국민 방위군사건거창 사건"을 두고 그의 도덕성을 언급하며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 이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신성모""일본공사 직"을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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