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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3공 저항 : 장준하 (1918)ㆍ김구 비서ㆍ의문 추락사 (약사봉)ㆍ사상계

by 당대 제일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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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張俊河ㆍ1918~1975ㆍ57세)"는 김구 비서ㆍ한국광복군 출신으로,  3공화국 시절,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됐으며, 1975년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의문의 등산 사고(약사봉(경기도 포천군)에서 의문 추락사)로 사망했다..

 

1. 장준하 (張俊河1918~1975향년 57)

김구 비서한국광복군민족청년단(이범석)활동국회의원(7)언론인(월간 사상계잡지 등불)교사(정주군 신안소학교)족주의자1공화국 공무원 (서기관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2공화국 공무원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국토건설단 기획부장국토건설단장)통일당 최고위원

•  출 생 : 평북 의주군     •  사 망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 추락사)    •  가 명 : 김신철(金信鐵)

•  학 력 : 숭실전문학교도요대학교 문학부 철학과 중퇴 한국신학대학 신학학사     •  경 력 : 통일당 최고위원

•   : 김희숙 (하숙집 딸17세에 결혼정신대에 끌려가는 것 막기 위함 •  자 녀 : 3 2

•  부 모 : 목사 장석인     •  종 교 : 개신교     •  저 서 : 돌베개민족주의자의 길지식인과 현실    수 상 : 1962.0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상1991.08월 건국훈장 애국장

장준하

신앙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숭실학교""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도일하여 "토요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회" 계통인 "일본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유학을 가기 위한 돈이 모자라, "정주군 신안소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신성중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는 "교장 선생님"이 일본 순사들한테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자 격분하여,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학도병"으로 자원입대(말로만 자원입대일 뿐 강제 징집)하여, "학도병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다1944.01, "65사단 7991부대(츠카다 부대장쑤성 쉬저우(徐州) 주둔)"에 배치되었으나, 1944.07, "김준엽(고려대 교수)박승헌" 등 동지들과 함께 탈출해, 장장 7개월간 2,500km 중국 대륙 6,000리를 걸어, 1945.01"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주석"을 만났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이범석 휘)"에 배속되었다.

"미국 CIA의 전신인 OSS (미국 전략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특파되었으나, 작전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광복이 되자, "김구 주석"의 비서로, 1945.12"김구"와 함께 돌아왔다.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6,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이 되었으나, 학업을 위해 "한국 신학대학"에서 학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서기관)되어, 1950"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서무과장사무국장 등을 지냈다1951,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09"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 창간했다.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56,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당시 "사상계""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이후 제2공화국(장면내각)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국토건설단 기획부장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이후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옥중 당선으로 "국회의(7)"에 당선되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의문의 등산 사고로 사망했다1966,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복역하였다. 1967, "서울 동대문 을"에서 "신민당" 천으로 옥중 출마해,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 복귀했으며, 1973"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자격정지 15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1975, "개헌청원 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1975.08.17, "약사봉 (경기도 포천군)"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2012.08,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2. 1975년 의문의 등산 사고 : 약사봉(경기도 포천군)에서 의문 추

"박정희 정권"의 감시가 심해지던 1975.08.17일, 그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거사와 관련, 당시 비밀리에 "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과 연락을 돕고 있던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임춘원"은 1960년대 "상아탑학원(종로)"을 설립ㆍ운영하며, 큰 재산을 모은 재력가로 장준하의 "사상계" 출판을 남몰래 재정적으로 도와주다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고, 장준하의 측근이 된 인물이었는데,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말ㆍ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 전 망우리의 부모 산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손바닥의 상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ㆍ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조철구(검안의사)"는 검안 결과, 오른쪽 귀 뒤쪽 후두부가 함몰 골절되어 추락사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하였고, 담당검사는 이를 수용하여, 5분 만에 현장검증을 종결하였다.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다음 날, 담당검사는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의 실족 증언을 근거로 추락사로 내사 종결하였다.

① 사망 사건 정황

그는 평소에도 지인들과 산행을 즐겼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1975.08.17일 호림산악회의 산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김용덕(호림산악회 회장)" 또는 "김용환(최후 동행인)"의 강권에 의해 따라나선 것인지는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이철우(장준하의 비서)"는 대절된 관광버스 자리가 꽉 찼다는 말을 듣고, 동행하지 않았다.

정오경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한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차례로 계곡 등산에 나섰다. 이들은 약사계곡 중간 지점에서 오후 1:30분경부터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장준하"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진술에 의하면,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해서 "장준하"를 찾았는데, 이 때 일행 중 누군가가 "장준하는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하산 길에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어 "김용환"이 앞장서서 계곡 쪽으로 하산을 했는데, 험한 암벽 지형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던 도중에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준하"가 보이지 않아 실족하여 추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김용환"은 절벽 아래로 내려와서, "장준하"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은 후일 당시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이후 "김용환"은 "호림산악회" 회원들의 점심식사 장소로 달려가 사고 소식을 알렸다. "김용덕" 등 산악회원들은 "김용환"을 따라 사고 현장으로 갔으며, 20여분 뒤 사체를 발견하였다.

② 1993.03월 : 민주당의 재조사

1993.03월,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재조사가 이뤄졌다. 사망 당일 검안의사였던 "조철구"는 민주당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사체 검안 소견에서 "직접 사망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를 감정한 "문국진"은 "중앙 부분이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고 법의학적 소견을 밝혔다. "민주당 조사위원회"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으나, "장준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 추락 지점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이 발견된 암벽은 경사도를 볼 때, 굴러 떨어지는 물체가 멈출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에는 외상골절이 전혀 없고, 휴대한 보온병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 당시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 씨에 따르면 "오른쪽 귀 뒤에 가로ㆍ세로 2cm가량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고, 또 팔ㆍ엉덩이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어,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이라 생각된다      •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정체가 불분명하다.

③ 유골 검시로 나타난 골절 흔적

2012년 여름 장마피해로, "파주시 천주교 나사렛 공동묘원"의 "장준하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었다. 08월, 안장된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의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장 시,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 뒤쪽에서 지름 5~6cm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사고 당시, 검안의사가 확인하고, 이후 재조사 과정에서도 결정적 사인으로, 지적된 두개골 함몰골절과 일치하므로, 엄밀한 의미로 보면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아들 장호권은 "검시를 맡은 서울대 법의학 교수가 "상처가 특이하다. 만약 추락했다면 바위 가운데 직경 5㎝의 동그랗게 튀어나온 바위 위로 오른쪽 귀 뒷머리가 정확하게 떨어지기 전에는 그런 상처가 나기 어렵다"고 했다. "망치 사이즈와 같은 크기로 두개골이 함몰돼, 사인은 망치에 의 가격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반면, 유골 검시를 맡은 "이윤성 교수(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은 정확한 가격 물체를 특정 짓지 않았으며,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이라는 의견만 밝혔다. 그는 유골 검안시 첫 인상은 망치 가격으로 보였으나, "망치로 인한 타살"로 단언할 수 없는 근거도 확인했기 때문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 타원형 골절 바깥의 방사형 골절은 일반적인 망치 가격보다 훨씬 큰 충격에 의해 발생      • 망치에 맞은 시신에는 여러 차례 내리친 상처 자국이 흔히 발견되나 장준하의 시신은 자국이 단 1개뿐      • 시신 두피에 망치 가장자리 모양이 찢어진 상처가 남아야 하나, 과거 조철구 검안의사의 소견에는 이런 내용이 부재

2013.03.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이정빈(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유골 감식 결과, 다음을 근거로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다.

• 추락에 의해 머리뼈가 함몰되었다면, 반대 방향으로 충격이 전해져 왼쪽 안와(안구 주위 뼈)가 함께 손상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깨끗      • 머리뼈엉덩이뼈가 추락으로 손상되었다면 어깨뼈도 골절되었어야 하는데 시신의 어깨뼈는 멀쩡      •  머리에 강한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서 즉사하면 목등뼈에 있는 혈액순환 기능이 멈춰 출혈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출혈이 적었다는 사고기록과 일치

3. 가족의 생활고 논란

그의 사후, 가족들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압박에 시달렸다. "장남 장호권"1976년에 테러를 당해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취업이 곤란해져 가족이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반면 "박정희 정권" 말기,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는 유족에게 미국행을 권유하는 등 일부 편의를 제공했다. 2012, "장남 장호권"은 노모와 일원동 월세 집에서 연금 월 60만원에 의지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였다이에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6"에 의거하여 미망인에게 월 143만 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으며, 일원동 아파트도 동 법률에 따라 특별 공급받은 주택이라고 밝혔다미국에서 스쿨버스운전사인 "3남 장호준 목사""박지만(박정희 아들)"에게 공개서한(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을 쓰기도 했다.

4. 긍정적 평가

"윤보선장면이철승유진산김영삼김대중" 외에 "3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안병욱""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1969.12월호)"에서,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 "함석헌""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다. 겁이 없다. 무서운 것이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김준엽(고려대 교수친구)" "신청년"이라는 이름의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 "사상계는 자유 민권운동통일문제경제발전문제새로운 문화의 창조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하였다"지명관""사상계"가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여석기(영문학자)""사상계는 좋은 잡지였고, 잘 팔리는 잡지였다. 이런 경우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진석(언론학자)"1950~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한편, "한겨레 21"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에서는 "815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와 5060년대 척박한 지적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여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5. 부정적 평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한편 "516군사정변" 초기에 "정변"을 지지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강원용(1917~200689목사통일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그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평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상계" 등을 창간하였으며, 3공화국 출범 뒤에는 "박정희"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고 평하였다"이범석""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한 바 있다. 여기에는 "김구의 비서"로서, 영향을 받은 반공주의적 시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 결벽적인 "배일주의자"면서,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고, "사상계" 1957.12월호에는 역시 친일파인 "최남선"추모하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고 찬양하는 권두언을 쓰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6. 일본군 탈영 증거병적 기록부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영했다"는 주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2004"전병헌(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직접 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병적기록부(유수명부(留守名簿))" 발굴해내고, 2004.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했다"전병헌""유수명부(留守名簿)에 남겨진, 장준하 선생은 1944.01월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그해 07.07일 중국 서주에서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이 기록은 장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장준하 선생의 일본군 징집 및 탈출 기록이 공개되었다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유수명부"에서 찾아낸 장준하 선생의 이름(장안준하(張安俊河)소속부대(7991부대)생년월일 및 본적지(평북 삭주군 외남면)부친의 성명(장석인張錫仁)역종병종 및 계급,공탁금 번호상단에 탈출일자탈출지 등이 기재돼 있다전체 114권으로 구성된 "유수명부"는 일본군의 해외파견 군인군속의 명부로 탈출 및 이탈사망 등 행방불명된 자의 기록을 날짜장소가 기록돼 있으며, 일본군에서 이탈탈출한 한국인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각 권 뒷부분에 따로 정리돼 있다병역 내용에 의하면, 1944.01.20일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며, 07.07상단에 "도망(逃亡) 쉬저우"라고 기재,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7. "김원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김원봉(조선의용대 대장한국광복군 1지대장민족유일당 부당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김원봉"을 가리켜,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라며, 혹평했다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 "김원봉""장준하김준엽"등을 영입하려는 제의를 거절했다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학도병 탈영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썼다."고 하였다.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고 진술했다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출신 부대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김원봉의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의 의도" 역시 의심하였다"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그는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원봉"이 월북함으로써,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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