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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3공 저항 : 문익환 (1918)ㆍ성서학자ㆍ배우 문성근(3남) 아버지

by 당대 제일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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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文益煥ㆍ1918~1994ㆍ76세)"목사는  1989년,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 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잠입죄"로 투옥되어, 1993년 석방되었다.

 

1. 문익환 (文益煥1918~1994향년 76)

목사 (성서학자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대학교 교수통일운동가사회운동가시인작사가문재린 목사의 아들배우 문성근(3)아버지박용길 (부인)와 문동환 목사(동생)도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늦은 나이에 운동권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고, 첫 사회 활동인 1976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8세였다"장준하(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이후, "한신대 신학교수"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하고,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하며 7번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로 인해 11년간의 감옥생활로 인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했다.

•  출 생 : 중화민국 만주 북간도     •  사 망 : 서울     •  사 인 : 심장마비      • 저 서 : 공동번역성서(번역자), 히브리 민중사

•  : 늦봄      •  학 력 : 1947, 한국 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과 1954,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   :  박용길 장로     •  자 녀 : 31(3남 문성근)      • 수 상 : 1990 : 북조선 조국통일상ㆍ2002 : 국민훈장 모란장

• 경 력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재야 민주세력 결집체)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문익환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는 진보적 기독교인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 활동하였다. 실례로, "이현주 목사(감리교)"와 함께, "공동번역성서 번역""개신교 측 번역자"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다윗사무엘" 등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히브리 민중사"(삼민사)를 저술하기도 했다1992, "미국 친우 봉사회""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강도영"의 픽션 만화 "26"에도 등장했다.

1918, "만주 북간도(, 연변자치구 룡정시 지산진 명동촌)"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윤동주장준하"와 절친한 동무였다"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므로, "일본 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 그는 신학적 갈등을 겪는다"일본 신학교""성서 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그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여 해석하려는 "성서 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쉽게 말해,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익숙하던 그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는 "서 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로, "성서 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1976"명동 31 민주구국선언" 참가자 (서명자 : 20) :   구속 기소 : 문익환김대중함세웅문동환이문영서남동안병무신현봉이해동윤반웅문정현     불구속 기소 (고령자): 윤보선함석헌정일형 (여성): 이태영이우정    간접가담 (신부): 김승훈장덕필김택암안충석    기타 관련자 : 공덕귀(윤보선의 처)박용길(문익환의 처)박형규

2. 일화

 윤보선 (전 대통령)과의 만남

1976년, "명동구국선언" 직전, 재야 지도자 "윤보선(전 대통령)"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부인 "공덕귀 여사"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며, 서명을 거절하였다. "윤보선"이 거절하자, "문익환"은 직접 서명문을 작성하여, 그를 찾았다.

• 문익환 : 해위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선언문 초안을 읽어보시고 너무 미온적이라 서명하지 않으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 윤보선 : 그랬지. 내용이 약하면 우리의 투쟁 의지가 너무 나약해 보여서 큰 효과를 거들 수가 없어요.    "문익환"으로부터 서명문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 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시인 경력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ㆍ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작품에 "히브리서 11장1절ㆍ십계명" 등이 있다.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에 바탕을 두고,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③ 천주교와의 연대

"윤보선ㆍ함석헌ㆍ김동길" 등과 함께, 개신교 측의 리더로 활동하였고, "김수환ㆍ지학순ㆍ함세웅" 등은 천주교 측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재오"는 1980년대, 통일운동ㆍ노동운동ㆍ기독교 사회 운동을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 이재오(李在五ㆍ1945~ ): 5선 국회의원 (15~19대)ㆍ민중당 사무총장ㆍ장훈고 국어교사(1973)ㆍ송곡여고 국어교사(1979)ㆍ1979.11월, 남민전 조직원으로 구속"

3. 문동환 (文東煥1921~2019향년 98)

한국기독교 장로회 목사사회운동가한신대학교 교수수도교회(서울) 목사

출 생 : 중화민국 만주 북간도    학 력 : 미국 하트퍼드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 문혜림 (文惠林페이문1936) 1986년 의정부와 동두천에서 매매춘하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두레방"을 처음 시작하였다.    자 녀 : 1(문영미), 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를 썼음.

아버지는 "간도"에서 목회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시인 "윤동주"와는 한동네에서 자랐다어릴 때, "동만의 조선족 대통령"으로 불리던 "김약연(윤동주 외삼촌)"을 보면서 목회자가 될 꿈을 키웠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김재준"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 신학교"유학했다. 그러나 이때는 "태평양 전쟁" 말기라, 학도병 징집의 위험이 있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야 했다. 종전 후, 가족이 모두 월남하여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 "김재준"의 주선으로, "문익환"과 함께 "조선신학교"에 편입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1,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웨스턴 신학대학교프린스턴 신학교하트포드 신학대학교"에서 차례로 공부했다. 유학 이후 귀국하여, 1961년부터 "한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기독교장로회 수도교회" 등에서 목회하였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재야 운동에 뛰어들어 투옥되기도 했다"문익환""문동환"에 뒤이어 재야 운동에 동참하여, 형제가 함께 활동했다말년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활동했다. 2000"615 남북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615 남북공동선언실천 재미동포협의회 공동의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을 벌여 왔다.

4. 신학강의와 공동번역성서

"한국 신학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구약 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구약성서"를 민중의 입장에서 해석한 "히브리민중사(삼민사)"를 쓰기도 하였다1970년대, "개신교천주교""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였다그가 "공동번역 성서번역"에 참여한 이유는 "당시 개역한글판의 단어와 문체가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데 있었다그래서 그는 번역에 동참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 성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예로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을 기록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역대하 24"을 보면, 매우 어렵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개역한글판 문장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이니라."

"이제 본인은 본인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모실 집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분향제를 올리고 거르지 않고 제사상을 차려 올리며,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 안식일과 매달 초하루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정해 주신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5. 유신시절, 민주화운동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1970~1980년대, 국민을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는 군부독재정권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1978)는 등, 여러 차례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1978, "윤보선"이 일본에 체류 중인 "정경모(鄭敬謨1924~202197통일운동가박정희 독재에 반발하여 일본으로 망명)"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그는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 반대했고, 스승 "김재준 목사""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에도 그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그의 강력한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은 무산되었다

"정경모"는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한민통"의 신문 편집장을 했는데, 문익환은 그가 "조총련 신문 편집장" 하고 있다고 오해했던 까닭에, 이를 극렬 반대했던 것이다후에 문익환이 "도쿄에서 만난 그리운 아우 정경모"를 사상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다시 흉금을 터놓은 관계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정경모의 저서 "찢겨진 산하" 때문이었다.

1979.10, "유신정권" 붕괴 이후, 문익환은 한동안 강경투쟁 노선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1985.03.29,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986.05.20,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1987.07.08,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자, 그는 다시 통일운동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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