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05월에 발표된,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노래이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白基琓ㆍ1932~2021ㆍ89세)"의 미발표 장시 "묏비나리 (1980.12)"의 한 부분을 "황석영(黃晳暎ㆍ1943 ~ ㆍ소설가ㆍ장길산ㆍ무기의 그늘ㆍ손님)"이 차용하여 가사를 지었다.
1. 백기완 (白基琓ㆍ1932~2021ㆍ향년 89세)
시문학가ㆍ소설가ㆍ작가ㆍ시민사회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 민주화운동ㆍ통일운동ㆍ노동운동" 등에 참여ㆍ"장산곶매 이야기ㆍ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등을 써서, 왕성한 저술 활동ㆍ1987년(13대)ㆍ1992년(1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 중도사퇴하거나 낙선하기도 했다.
• 출 생 :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 사 망 : 서울대학교병원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 호 : 민초(民草)ㆍ부심이 • 학 력 : 황해도 일도초등학교 (4학년 중퇴) • 종 교 : 무신론
• 처 : 김정숙 • 자 녀 : 1남 3녀 ㆍ1녀 (백원담 :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ㆍ1남 (백일 : 울산관학대학교 융복합유통플랫폼학과 학과장)
• 저 서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ㆍ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오ㆍ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 노릇을 할까ㆍ통일이냐 반통일이냐ㆍ장산곶매 이야기ㆍ백기완의 통일이야기ㆍ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ㆍ부심이의 엄마생각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모ㆍ작은 형" 등 3명과 남쪽으로 내려왔고, "큰 형" 등 나머지 가족은 북쪽에 남아 이산가족이 됐다. 작은 형 "백기현"은 24세이던 1951년 국군으로 참전ㆍ전투에서 숨졌다. 큰 형 "백기성"은 "황해민보"의 기자생활을 하며, "사회주의자"로 청춘을 보내다가, 1957년 남파간첩으로 월남했으나, 바로 당국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0여 년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30여 년 간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 호랑이"를 통해 통일염원을 나타내 보겠다는 생각에서, 호랑이의 생태에 대한 사진 자료ㆍ관련 민족신화를 수집했고, 이를 책으로 내려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백기완은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문제에 눈을 떠서, 1964년, "함석헌ㆍ계훈제ㆍ변영태" 등 재야운동가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67년, "장준하"와 함께, "백범 사상연구소"를 설립한 후, "백범" 사상 연구ㆍ보급에 힘썼고, "박정희 유신정권ㆍ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ㆍ통일운동"을 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가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5.09월, "양일동ㆍ김동길"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다가, 1981년에 "3ㆍ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3~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1985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민중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1987년 "대통령 선거(13대)"에 출마하였다가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하였으며, 1992년 대선(14대)에서도 다시 민중후보로 출마하여, 24만 표를 득표했다. 당사, 특별한 화법으로 "대통령선거"의 연설 녹화 때도 1번의 중단 없이 주어진 시간을 채워, 방송국 관계자들을 경탄시킨 일화가 있다.
2.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노래이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ㆍ1981.05월 발표ㆍ백기완 원작ㆍ황석영 작사ㆍ김종률 작곡ㆍ"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윤상원"을 기린 노래로, "백기완"의 미발표 장시 "묏비나리 (1980.12)"의 한 부분을 차용하여, "황석영(소설가)"이 가사를 짓고, "김종률(전남대 출신ㆍ대학가요제 수상)"이 곡을 지었다.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하다가,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당시,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3년)"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이 1982년에 제작된 음반 "넋풀이- 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학생운동가ㆍ노동운동가"들이 부르면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반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간주되어 금지곡이 되었다가, "전두환" 퇴진 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풀렸으며, 이후 운동권 외의 일반 시민들도 부르는 대중가요로 보편화되었다. "민주화운동"은 물론 각종 시민사회단체ㆍ노동단체ㆍ학생운동단체의 집회를 시작할 때, "민중의례"의 일부로서 널리 불렸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애국가 제창 대신, 이 곡을 당 행사에 부르기도 하였다.
3. 일화
① 히딩크 (월드컵 한국축구팀 감독)과 인연
한편, 2002년, "히딩크(월드컵 한국축구팀 감독)"과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하였는데, "히딩크 감독"은 2002.04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이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대표 선수들에게 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열정적인 강연 모습ㆍ한복차림의 독특한 카리스마ㆍ통일운동에 헌신한 이력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을 떠나기 전, "히딩크 감독"은 출국에 앞서 "백기완"을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했고, 이를 전해 듣고 공항으로 나온 "백기완"에게 작별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② 백범 김구ㆍ장준하와 인연
1898년, "김구"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했었는데, "백태주(백기완 조부)"가 "김구"가 "황해도 은율" 땅을 지날 때,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후, 부친 "백홍렬"이 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김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김구"를 따르게 된다. "김구" 또한 그를 좋아해서 그가 즐겨 읊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서 주기도 하고, 중학교까지 학비를 대주리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김구" 외에도 "장준하"와도 인연이 있었는데, "장준하"와 함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등 헌법개정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장준하"의 사망 이후, 장례식을 주관하는 등 깊은 관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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