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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3공 저항 : 함석헌 (1901)ㆍ씨알 사상ㆍ노벨 평화상 후보 (2차례)

by 당대 제일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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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咸錫憲ㆍ1901~1989ㆍ88세)"은 일생을 "민중계몽운동"에 헌신했던 사회운동가로, "평양고등보통학교 3년" 재학 중, "3ㆍ1운동"을 맞아 6촌 형 "함석은(1892~1928ㆍ36세)"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평양"에 배포한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수도승이나 다름이 없는 차림으로, 언제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수염을 드리우고 다녔으며, 가냘픈 몸이 강연장소ㆍ시위현장에 나타나면, 함부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개가 짙게 깔렸다.

 

1. 함석헌 (咸錫憲1901~1989향년 88)

독립운동가종교인언론출판인기독교 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재야운동가문필가오산학교 교사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

•  출 생 : 평북 용천군        •  사 망 : 서울대학교병원          •  학 력 :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문과 (역사과 수석)

•  : 신천(信天)씨알바보새       •  경 력 : 오산학교 교사        •  종 교 : 유교(성리학) 퀘이커

•   : 황득순      •  자 녀 : 25녀         •  친 구 : 안창호이승훈이광수조만식이 스승 유영모의 동창이자 친구

•  저 서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932~33)역사와 민족 (1964)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1984)

함석헌

1919,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후, 사무원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였다1921,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안창호이승훈이광수조만식" 등과도 알게 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1928, "도쿄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으며, 1927"도쿄"에서 "성서 조선"을 창간했다1928~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이후, "교육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신앙 활동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을 하였다.

1961"516군사정변" 이후,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1.07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사상계""516군사정변"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1970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980년 폐간당할 때까지 10여 년 간 많은 글을 발표하고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다2차례(19791985)에 걸쳐,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AFSC)"가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1947,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AFSC""노벨 평화상" 후보추천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

2. 씨알 사상

"()" 대신, "씨알"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씨알"1948년 무렵, "함석헌"월남한 뒤, YMCA에서 옛 스승 "류영모(柳永模1890~198191개신교 사상가육자철학자)"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류영모""()""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겼다그는 "大學之道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다",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뭄에 있나니라"고 해석했다.

"()"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 쓰자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전통 있는 순우리말인 "겨레"라는 단어가 이미 있는데, 불필요하게 새 낱말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물론 "겨레""민중"과는 결이 다르다.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 백성일반 시민들)이 지니는 5가지 특성이 있다.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것을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 백성일반 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3. 사상신념무 교회주의

일본 유학 중,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69개신교 사상가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 성서집회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 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무 교회주의자"였다가, 중기에는 "퀘이커"였으나, 기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게 된다. "김교신" 등과 함께, "무 교회주의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일본인 "무 교회주의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도 "무 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4. 논란

사회진화론자 논란

2010,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인가 아닌가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었다2009.03, "함석헌 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인하대 명예교수)"는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 씨알사상 연구원장"이던 "김영호""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그의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전남대 교수)""씨알의 소리(2010.01~0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싣고,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김상봉"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2010.03, "김영호""함석헌 학회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 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

투사론

함석헌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김용준(고려대 교수철학자)"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석헌 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한국전쟁 예상

한국전쟁 직전, 전쟁을 예상하였다고 한다. "김용준"에 의하면 625 발생 1주일 전에 함 선생님이, "이 백성들이 왜 이러지. 지금 밑에서는 용암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그 위에 살짝 덮힌 암반을 마치 만세반석처럼 여기고 까불고 있으니 이게 언제 터질지 몰라"하고 말씀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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