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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한무제 (漢武帝ㆍBC 156)ㆍ광무제 (光武帝ㆍBC 6)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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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漢武帝ㆍBC 156~87ㆍ69세ㆍ재위 54년)"는 "전한시대"를 대표하는 한나라의 제7대 황제로,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다혈질적인 성격과 무리한 원정, 토목공사들로 인해, 역사가에 따라 성군ㆍ명군ㆍ 폭군ㆍ암군인지,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양면적인 황제이고, "광무제 (光武帝ㆍBC 6~AD 57ㆍ63세ㆍ재위 32년)"는 후한의 초대 황제, 한나라의 제16대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이다.

 

1. 한무제 (漢武帝): BC 156~8769재위 54이름 : 유철 (劉徹)

① "한(漢) 경제(景帝)"의 3째 아들

"경제(景帝)"가 죽은 후, 14세에 왕위를 계승.  54년간 재위하다가, 68세에 순행에 올랐다가 도중에 정묘일(丁卯日)에 병사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에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시호는 "무제(武帝)"라 하였다.  장지는 무릉(茂陵: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동북)에 있다.

② 4세 때, "교동왕 (膠東王)"에 책봉되었으며, 7세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경제(景帝)"가 B.C 141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 병사하자, 그는 같은 날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듬해에 연호를 창시하여,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③ "경제 (景帝) 유계 (劉啓)"의 정책 계승

재위시기에 정치적으로는 "경제(景帝) 유계(劉啓)"의 정책을 계승,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여, "왕후장상"의 봉토를 자식들에게 분봉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많은 "왕후(王侯)"들의 작위를 박탈하여, 제후국들의 중앙정권에 대한 위협적인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였다.

④ 통치이념은  "유학"

사상적으로는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儒家)"를 제외한 기타학설의 전파를 금지하고, "유학"을 봉건사회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유학"은 다시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⑤  물가 안정ㆍ경제ㆍ문화적 발전을 확보

경제적으로는 "공근(孔僅)ㆍ동곽함양(東郭咸陽)"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철ㆍ제염"을 국영으로 회수하여, 국가의 경제적 역량을 견실하게 다졌다.  그리고 "상홍양(桑弘陽)"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성"에 "평준관(平準官)"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물류 수송과 무역을 정부에서 직접 관장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황하(黃河)"를 정비하여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주변 마을로 이주시켰다.

군사적으로는 "대장군 위청(衛靑)ㆍ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고 "흉노"의 위협을 사전에 없앴다.  그리하여 광대한 "황하 유역"의 경제ㆍ문화적 발전을 확보하였다.

⑥  "광동ㆍ광서지구" 통일

"남방"에서 할거하던 "남월(南越, 고대 남방 월인(越人)의 한 갈래)" 정권을 제거하고, 지금의 "광동ㆍ광서지구"를 통일하였으며, 아울러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등에 군(郡)을 설치하여 "한족"과 각 소수민족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⑦  "비단길(絲綢之路)"을 개척

외교적으로는 "장건(張騫)"을 2차례나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신강성 서부), 오손(烏孫: 지금의 신강성 이려하<伊犁河> 일대), 안식(安息: 지금의 이란고원)" 등지로 가서 서역민족과 한족의 경제 문화 교류를 강화하고, 장안에서 유럽 로마제국에 이르는 "비단길(絲綢之路)"을 개척하였다. "한 무제"의 이러한 조치로 "서한"은 전성기로 발전하였다.

⑧ 국고의 탕진

그러나 "한 무제"의 통치 후기에는 잦은 전란으로 "병역ㆍ부역"이 심해졌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치를 일삼아 "문제"와 "경제"시기에 비축해 두었던 국고를 거의 다 탕진하였다.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그는 잔혹한 관리를 중용하여,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고, 매관매직을 방조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가중된데다 흉년까지 겹쳐, 농민들은 갈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게 되고 "농민봉기"도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여, B.C 84년에 그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를 꾸짖는 조서)"를 반포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농기구와 농업기술을 확대 보급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과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하여, 전국은 다시 점진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⑨ B.C 87년 2월, "한 무제"는 외지로 순행에 올랐다.

부풍(扶風: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에 이르렀을 때, 병이 나서 "오작궁(五柞宮: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떡갈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에 누워있으면서,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에 "한 무제"는 급히 명령을 내려, "유불릉(劉弗陵)"을 태자에 책봉한 다음, "곽광(霍光)"을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에, "김일선(金日蟬)"을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상관걸(上官桀)"을 좌장군(左將軍)에 각각 임명하고, 그들에게 승상 "전견추(田見秋)ㆍ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과 함께 태자를 보필토록 했다.  이 5명의 대신들이 "한 무제"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유언을 받들 때, "한 무제"는 이미 말문을 닫고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진 좌측이 "한 무제")

2. 광무제 (光武帝): BC 6~ AD 5763재위 32이름 : 유수 (劉秀)

※ 굳은 신뢰와 충의로 천하를 제패한 광무제와 28장 (二八將) :  등우ㆍ마성ㆍ오한ㆍ왕량ㆍ가복ㆍ진준ㆍ경감ㆍ두무ㆍ구순ㆍ부준ㆍ잠팽ㆍ견심ㆍ풍이ㆍ왕패ㆍ주우ㆍ임광ㆍ채준ㆍ이충ㆍ경단ㆍ만수ㆍ개연ㆍ비융ㆍ조기ㆍ유식ㆍ경순ㆍ장궁ㆍ마무ㆍ유융

후한 (後漢)의 초대 황제 (재위 AD 25~57)

"전한(前漢)"고조(高祖) "유방(劉邦)"9세손이며, 6번째 왕인 경제(景帝, B.C 157~141)의 후손이다 "무제"가 죽은 뒤에 묘호(廟號) "세조(世祖)", 시호는 "광무"라 하였다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은 말기에 이르러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 제국"의 왕족이었던 "유수(劉秀)"는 형 "유연(劉縯)"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차례로 숙적을 무찌르고 "후한(後漢)"을 건국하게 되니, 이가 곧 후한의 창시자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이다 "유수"는 어질고 겸손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왕이 된 후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명군(明君)"으로 후세에 길이 전해 내려온다

③ "한 왕조 (漢王朝)" 재건

"전한"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이라는 왕조를 세웠고, "()"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호족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 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세력범위는 "허베이허난산시(陝西)"뿐이었으며, "()""공손술(公孫述)농서의 외효(隗浴)하서(河西)의 두융(竇融)"등이 할거(割據)하고,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④ 유교 (儒敎) 존중주의

"왕망"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유교(儒敎)존중주의"를 택함으로써, "후한"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유수"의 소박한 꿈

B.C 6, "유수"는 부친의 근무지인 "남돈"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태어날 무렵 "한줄기 볏 잎에서 9가닥의 이삭이 패는 길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 벼 패일 수)"라 지었다 한다 "유수"가 어렸을 때, 당시 관상을 잘 보았던 "채소공(蔡少公)"이란 자가 우연히 유수를 보고는 "훗날 왕이 될 상을 갖고 태어났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성품은 극히 온순하고, 일을 잘하는 젊은이였다 반면 맏형 "()"은 성격이 과격한 호걸이었다.

"한 제국"의 멸망과 "유수"의 궐기

"전한(前漢)" 말기에 이르자, 왕권은 약화되고, 외척의 세력은 점점 커 갔다 "왕망"12대 왕인 "성제(成帝)"의 모후(母后)"왕정군(王政君) 원후(元后)"의 조카였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원후"의 보살핌으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왕망"14대 왕인 "평제"를 독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A.D 812월에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新國)"를 건국하였다 "왕망"은 당시의 혼란한 "관료제도"를 쇄신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 살림은 궁핍해져갔다 장성하여 청년이 된 "유수""왕망"이 실정을 거듭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하남성 완현" 출신의 "이통(李通)"과 함께 군사를 모아 궐기하였다

마침 맹위를 떨치던 "신시(新市)평림(平林)"의 도둑무리를 불러들였으나,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신시평림"의 무리들은 실력 있고 다루기 어려운 "유씨 형제"를 피하고, 인품도 보잘 것 없고 다루기 쉬운 "(劉玄)" 옹립한다 그리하여 형인 "유연""대사도(大司徒)", "유수""장군"이 되었다 반란의 대의명분을 뚜렷이 하기위하여 "유현""경시제(更始帝)"로 받들고, "왕망"과의 대결을 위해 북상하였다 이에 "왕망""왕읍(王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40만이 넘는 대군으로 단숨에 격퇴하려고 하였다.

"곤양"의 결전 (昆陽決戰)

40만의 대군이 몰려오니, 그 위세에 눌려 최전선의 군대는 "곤양성"으로 물러났다 정부군은 곧 이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당시 "곤양성"의 방어 책임자였던 "유수"13기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뚫고 나와, 여기저기에서 3,000명의 원군을 모은 후에 40만의 대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비록 그 수는 3,000밖에 안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인 "유수"를 믿고, 100배가 넘는 "왕읍" 군사들에 대항하여 사력을 다하였다 한편 성안의 군사들도 용기백배하여 성문을 열고, 정부군을 협공하니 정부군은 혼란에 빠져 도망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수많은 시체는 강물의 흐름까지 막았다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곤양전투"이다.

이후 천하 군웅들은 너도나도 반란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평소 "유연"을 경계하던 "경시제""유연"에게 군령위반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유수"는 형의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울분을 삼키며,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해간다 "경시제"는 할 수 없이 "곤양대전"의 공을 인정하여, "유수""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하고, "무신후(武信候)" 봉하였다.

한편 "곤양대전" 이후, "왕망"은 전의를 상실하고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경시제"의 부하인 "신도건(申屠建)" "이송(李松)"에게 공략당하여, 궁궐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써 "신나라"는 건국된 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경시제" 세력은 수도 "장안"으로 입성하여, 실질적인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천하는 "산동의 적미군""하북지방의 왕랑(王郞)"의 삼대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북 (河北)"을 평정하고, 수많은 인재를 얻음

"경시제""하북지방의 왕랑(王郞)"을 격파하는 임무를 "유수"에게 맡겼다 "유수""하북"으로 향하던 중, 일생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를 얻게 되는데, 이가 곧 "(鄧禹)"였다 "등우""유수님의 위덕(威德)이 사해에 전해지는데, 제가 촌척(寸尺)의 도움을 드려서, 공명을 죽백(竹帛) 남기고자 할뿐입니다."고 진심으로 말하였고, 이에 "유수""등우"를 참모로 삼았다 "등우"는 훌륭한 군 지휘관이며, 특히 인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탁월하여, "유수" 수많은 인재를 얻게 되는데, 후세 사람들은 "등우"를 포함하여 28명의 공신을 "28()"이라 부르게 된다.

"왕랑"과의 힘겨운 싸움 속에 쫓겨 다닐 때, "유수"에게 콩죽을 끓여 대접하며, 말없이 격려하였던"풍이" "대수(大樹)장군"이라 불렸다 이는 자신의 공로를 전혀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던 성품 때문으로 부하들이 서로 휘하에 가려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구순"은 문무를 겸비하였고, 사람을 잘 다루었으며, 후일 "병량의 조달""유수"의 창업을 배후에서 빈틈없이 지원하였다

"오한(吳漢)" 호걸형의 우수한 장군으로 맹활약하였다 "왕랑" 세력권의 지방태수였던 "임광""비융""왕랑"에게 쫓기던 "유수"를 도와, "왕랑"에게 반기를 들었다 "유수"는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고, 항복해 오는 "왕랑"의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기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력을 증대하였다 결국 서기 24"한단"을 함락하고, "왕랑"은 처형되었다.

승전보가 "경시제"에게 알려지자, "경시제""유수""소왕(簫王)"에 봉하고, 군대 해산과 장안복귀를 명한다 그러나 "유수""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하북"의 군소세력을 격파하여 수십만의 막강한 병력을 모았다 이어 부하들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드디어 A.D 256"호남"에서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건무()"라 하였다 이제 천하정세는 크게 "유수""경시제", "적미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 : 득록망촉(得朧望蜀)

"광무제가 했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라는 뜻의 격언.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이다 "적미군""경시제"를 공격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경시제"를 참살하였다 그러나 "적미군"은 원래 도적출신의 집단이라, 정치가 형편없이 행해져, 약탈과 방화와 살인이 도처에서 행해졌다.

결국 서쪽으로 향하던 중, "감숙성(甘肅省)"에서 "외효"에게 격파당하여 패주하다가, "하남성"에서 "유수"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천하를 삼분하던 양대 세력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유수"는 나머지 지방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잠팽"을 파견하여 "감숙성""외효"를 공격하였다 "외효""사천성""공손술"과 협력하여 "유수"에게 대항하나, "유수"의 인품에 반한 "외효"의 참모 "마원"의 배신으로 무너진다당시 "유수""잠팽"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의 욕심은 끊임이 없다. 농을 얻는다면 다시 촉을 바라볼 것이다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낼 때마다, 나의 머리에는 흰 머리털이 늘어간다."  라고, 부하들을 걱정하며, 전쟁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술회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사람의 욕심을 표현하는 "득록망촉(得朧望蜀)"의 고사성어가 되었다

이 말대로 "" 지방의 "공손술"을 토벌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고, 수십 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유수""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건무 2(26) "고조묘(高祖廟, 한고조 유방을 제사지내는 사당)" 세움으로써, 자신의 창업이 "한 왕조 부흥"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광무제"는 개국 공신들에게 높은 지위를 줄 경우, 나중에 "황권"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되,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면서 "후한"을 열었다

"광무제"는 서기 57년에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운명하였다. 그 후 즉위한 "후한"2번째 왕인 "효명왕(孝明王)"은 건국에 공이 컸던 "공신 28"의 공덕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서,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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