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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시인 : 이백 (李太白ㆍ701~762)ㆍ두보 (杜甫ㆍ712~770)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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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시인들이며, "이백 (李白ㆍ李太白ㆍ701)"은 "시선 (詩仙)"이라고 부르고, "두보 (杜甫ㆍ712)"는 "시성(詩聖)"이라고 부른다. "이백"은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형태의 시를 많이 썼고, "두보"는 정제된 미와 엄격한 형식을 추구했다.

 

1. 이백 (李白)두보 (杜甫)의 차이점

주제 면에 있어서도 "이백"은 현실도피나 허무주의적인 낭만적 경향이 많아, 호방하고 자유로운 위기로 자연과 인생을 노래했고, "두보"는 유교적인 질서에 바탕을 두어, 신중한 태도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인간으로서 도리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노래했다.

이런 이유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에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했다. 그것이 "두시언해"라는 책이다. 조선 건국초기의 어수선한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낭만적이고 파격적인 ""의 시 보다는 교적이고 온건하며, 합리적인 국가관을 추구하는 "두보"의 시가 합당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1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백"""에 취해, "채석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겨질 정도로 "이백" 술을 좋아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후세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백"보다는 "두보"가 훨씬 더 술꾼이었다고 한다.

"" 속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1,050여 수의 "이백 시" 중에서 16%""을 언급한 것에 비해, "두보"1,400여 수의 "" 중에서 21%""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술을 마시는 방법도 달라서, "이백"은 술을 즐기면서 마셨지만, "두보"는 술에 원수진 사람처럼 마셨다고 한다. 일단 술을 마시면, 완전히 취할 때까지 23차를 가고,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도 병문안 온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한다 말년에 "당뇨폐병"으로 고생할 때도, "흰머리 몇 개 났다고, 술을 버릴 수야 없지 않는가"하고 노래한 "두보"58세에 힘든 방랑 생활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했다.

2. 이백 (李白701~76261: 태백 (太白): 청련거사 (靑蓮居士))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쓰촨성(四川省)""()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그에게도 현실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데 대하여, "이백"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신선(神仙)"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그의 시문집은 "송 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 대(元代) 소사빈(蕭士)""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청대(淸代) 왕기(王琦)""이태백 전집(太白全集)"등이 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 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 湖南省)남릉(南陵: 安徽省)동로(東魯: 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불우한 생애를 보냈으나, 43세 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평조사(淸平調詞) 3""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등과 술에 빠져 "술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석문(石門: 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남하하여 "광릉(廣陵: 현재의 揚州)금릉(金陵: 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 紹興)"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 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 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사면되었다(59).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 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사진 좌측)

3. 두보 (杜甫712~77058: 자미 (子美): 소릉 (少陵))

"당시대(唐時代)"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다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審言)"이다.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인간의 심리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고대의 시"지나치게 소박한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등 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등 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추흥(秋興)삼리삼별(三吏三別)병거행(兵車行)여인행(麗人行)"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두공부집(杜工部集) 20"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 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왔다 이후 2년간 "후베이후난"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7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에 뛰어났으며, "() 전겸익""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두시상주(杜詩詳註)"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등이 복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 때는 "유윤겸(柳允謙)"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杜詩諺解)"를 간행하였다.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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